흔히 말과 글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곤한다.
물론 말과 글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글은 나의 감정을 사람들의 계약체계인
사유의 결과(언어)들을 물감과 붓을 삼아
그려내는 그림이고
말은 나의 감정이 만들어가는 노래이다.
그래서 감정의 말은 언어가 아니라
눈물이거나 웃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글은 종이위를 달리고(종이면 어떻고
죽간이면 어떻고 파피루스면 어떤가...)
말은 공기중에 퍼진다.

그림(글)은 그린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관점이
결과로 나타나고(그래서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보고 평론하는 것은
웃기게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평가일 따름이기에...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런 평가에 주목하고
자신의 관점을 가지지 못한다.
즉 觀하기보다 남의 관점을 듣는 것을 선택한다.
설교를 듣거나 법문을 듣는 것...등등도 같은
것이다.....)

글을 읽고 혹은 그림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은
자기의 관점으로 보고 자기의 해석으로
해석함에서 오는 즐거움이지
그림이나 글이 주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쓴 혹은 그림을 그린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파동과 진동을
감추어 두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늘 그렇게 관(觀)한다.
나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나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해석은 나만의 몫이다.
즉 글에 대한 나의 관점이다.
글은 관(觀)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관할 수 없다.
단지 말 하는 대상을 관하고
말은 감촉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있다.
있다라는 의미는 감촉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해석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어느 누구도 감촉(감각)하며 사는
내 존재에 대한 해석은 해 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가 내 감촉에 의미를 부여하고
즐거움을 삼으며
그리고 감각을 정리하는 사유세계를
체계화..즉 내 스스로 상식적인...자연의 순리와의
비교하여 하나로 조화시켜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감각이 전부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말은 살아있어 감촉되는 것이다
글은 죽어있고 그 글을 읽는 사람에따라 반응하는
거울이다.

그래서 경이 經이 아니라 鏡이다.
나는 그렇게 경전들을 본다.
나를 살피는 거울로서의 역할이지
그 외의 역할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거울에 비춰지는 것은 나의 모습이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본다는 것...
홀로하기 힘들기에 정보를 열어가는 자기의 과정들을
말로서 전하여 주고 있는데 그것을 기록한 것이
이정표를 남겨준 것이 경(鏡)들이다.
말은 기록되는 순간부터 생명이 없어진다.

길은 내가 가는 것이지
그 이정표에 매달려있는 것은 사실
정보들을 열어준 이들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경은 해석하거나 이해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내 길의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다.

말은 살아있고
바람을 안 이들의 말도 공기중에 살아있다.
붓다의 육성...예수의 육성.....을 들으려면
내 소리에 귀를 먼저 귀울이라.

공기는 주파수를 가지고 있고
그 주파수에 진동하면 같은 진동수에 있는
정보들이 파동의 물결을 타고 감각되어질 것이다.

사람은 지(知)..라는 주파수와 정(情)이라는 진동수
그리고 의(意)라는 파동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셋이 하나될 때..그것을 우리는 나라고 한다.
즉 하나...

성부가 의미하는 것이 지.(사유)
성자가 의미하는 것시 정(마음)
성령이 의미하는 것이 의..(행동)

기독교의 삼위일체나
우리 민속신앙의 삼신이나
불교의 삼보나...
그리고 심태극이나...

의미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해석의 옷은 다양하지만 결국에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가는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서 시작하여 나로 귀결되는 것이
삶이다.

성경은 그 길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나로 시작되는 길..나에게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숱한 정보들을 만난다.

우리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설정에 머물기에 시공을
초월해야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시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정보가 편재되어있고
그 정보를 스치며 울려내는 노래와 몸짓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은 정보의 바다
살아있는 정보는 말에 의해,. 자연에 의해 드러나고
죽어있는 정보는 글에 의해 문명에 의해 전개된다.

자연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에 대하여
가타부타한 적이 없고 심판이라든지...
업장이라든지...그런 것으로
대꾸하는 법이 없다.
정보를 가져오는 것..그것은 바람이기에...

그래서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정보)이
풀에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지나...
바람(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말은 바람을 끌어오는 주파수이자 진동수...파동.

말은 누군가에 의해 전해진 적이 없다.
내가 하고 내가 말의 영역을 고저장단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것..그것이 바로 감촉하고
그 감촉을 내 언어로 해석하고

바람을 느끼고 만들고 해석하는 방법을
너에게 설명하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이 비밀은 너무나 귀해서 설명되지 않지만
누구가 가져서 두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바람의 법칙이다.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나...몸.
그 몸이 바람을 만들고 느끼고 그리고 노래하는 것.
그것이 바람의 생명이다.
몸은 바람의 노래를 위하여 있는 악기이다.

사는 것은 노래이고 춤이다.
바람은 늘 흔들리고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
빗방울도 춤추게하고
눈도 흩날려 노래하게 한다.

바람은 비워 낸 자리를 울린다는
그리고 머물지 않는 다는....
자유를 자기의 속성으로 한다.

자유를 꿈꾸는 자는 바람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예수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자유자도 이와 같다...

나도 이와 같다....

그래서 바람의 법칙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내가 바람을 잡아타고 다닐 것인가
거울에 매여 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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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 베푸는 일곱가지 無財七施



보시 (布施)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에는 흔히 세 가지 형태의 보시가 있습니다.


보시의 유형으로


법시(法施) .재시 (財施). 무외시 (無畏施)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시란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으로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외시는 다른 사람에게
정진적 불안이난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시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당연히 어떤 물질적인 것이 상정됩니다.


특히 물질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시하면
당연히 돈이나 물질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지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질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그것이 바로 `재물을 갖지 않고 베푸는 일곱 가지 보시'라는 뜻의
무재칠시 (無財七施)입니다.


1.안시 (眼施)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보시가 됩니다. 요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기고 극복해야할


경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첫눈에 강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대를 대합니다.


이런 눈빛은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심어주며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럴 때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2. 화안열색시 (和顔悅色施)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안시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흔히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 늘 싸우는


표정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성난 표정, 그리고 무심한 표정은


사회를 삭마가하게 하고 서로간에 말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얼굴에 화기애애하고 기쁨으로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소중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3. 언사시 (言辭施)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우리는 늘 험악한 말들을 쉽게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 게시판이나


대화방 같은 곳에 가보면 정말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이렇게 험악한 말이나 가시돗힌 말은 자칫 상대방과


언쟁을 일으키고 분쟁에 휘말리게 합니다.


언사시는 삼업가운데 구업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짓는 열가지 업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이 무려


네개나 된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첫 구가
바로 우리의 구업을 깨끗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



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보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시 (身施) 예의 바르게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신업 (身業)에 해당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공손한 자세로 반갑게 인사하고,
어른을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할 줄 알고,
몸으로 남을 돕는 이런 행위들이 바로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입니다.



이렇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몸가짐은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마음을 안겨주는 보시행입니다.



5. 심시 (心施) 착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심업 (心業)에 해당합니다.



마음 가짐을 늘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보시행입니다.


6. 상좌시 (床座施)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앙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 같은 때 얼마나 필요한 보시인지 모릅니다.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탓을 때 젊은이들이 노약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광경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노약자에게 또는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방사시 (房舍施) 사람을 방에 재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같이 부동산을 재산의 중요한 목록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무재시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집에 사람을 재워 준다고 했을 때
돈 드는 일이 아니므로 무외시로 분류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옛날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밤길을 가다가
남의 집에 하룻밤 묵어가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은 어려운 시절이라면
이것도 크고 아름다운 보시행이겠지요.



이상이 물질를 가지지 않고도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행입니다. 어쩌면 요즘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이같이


무재칠시가 오히려 더 의미있는 보시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를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있어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작은길 (대금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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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 스님은 「큼(maha)은 크고 작은 것을 넘어선 더 큼을 뜻하며 그것을 공(空)이라 한다. 반야(般若 ; prajna)란 지혜를 뜻한다. 이기적인 아상(我相)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번뇌가 생기는데 번뇌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생각이 지혜라고 한다. 금강경은 욕심을 없애자는 경전이며 결국 번뇌를 벗어나 지혜를 내자는 것이다. 무소유(無所有 ; abhava)는 물질이 아니라는 뜻의 무재물 (無財物 ; adhana)과는 다르다.
서로 인연따라 만나는 연기성이란 상호의존적인 신용과 상호존중의 베풀기(布施 ; 재물보시, 법보시, 두렵지 않은 편안함 보시)의 두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소유와 분배가 함축된 말이 무소유이다. 따라서 무소유란 긍정적으로 볼 때 베풀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즉, 정당한 소유와 공평한 분배의 조화를 이루라는 것이 무소유의 개념이고, 그것이 지혜로운 소유라는 뜻이다.

서구의 기독교가 금욕주의 윤리와 귀천 없는 직업관(천부적인 일)에 의해 인간 중심적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면, 아시아의 유교는 윤리와 자본의 결합 중 국가 주도적 자본 쪽에 힘이 실려 도덕적 정치문화가 약화되었으므로, 서구나 아시아는 모두 소유와 분배의 공평성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무소유 개념은 윤리적이고 소유와 분배의 조화성은 높으나 물질 현상에 대한 경시와 생산의 자본 결집이 어려웠다. 이렇게 바른 지혜의 선행에는 여러 문화의 종합적 보완이 요구된다.
금욕적 태도에 의한 자본 결집, 생명존중의 윤리적 지혜를 통한 창의적 기술 개발, 조세 정책과 금융정책 그리고 복지 정책에 의한 분배의 조절, 합리적 소비와 행복의 추구 및 세계적 무대의 대외 관계 결속 등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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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趙州)의 어록에 의하면 “털끝 만한 차이도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사람들이 내면에 큰 기쁨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불성신중(佛性身中)이므로 몸안에 부처가 있다고 하여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라고 했다.
이기적 집착의 마음이 없이 전체로 열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주시하는 연습을 통해 점차 내면을 주시한다.

禪(Dhyana)의 어근인 Dhyan의 뜻은 관계를 끊는다는 말인데 자신과의 관계를 바라볼 때 생기는 이기적 욕망을 끊어버리고, 있는 그대로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임제어록에 의하면 맑은 정신의 각성된 상태에서 주시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禪이라 했다. 그는 남의 체험이나, 경전을 이해한 것이나,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둘 다 쓸데 없는 짓이고 자신이 직접 진리를 체험하여 깨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대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면 나누어 주라. 상대가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나누어 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개의치 마라.”고 했다. 선행을 할 때 상대가 받을 자격이 있던 없던, 받던 아니받던 그것은 자기가 생각할 일이 아니고 상대의 몫이며, 그렇게 하는 자신의 행동이 우주적 의무라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말은 나는 모른다는 말이다. 앎이 있는 것으로 느낄 때가 더 많이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떠한 자세로 선행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훈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단정을 짓는데,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남이 해야 할 생각까지 자기 생각으로 하려 하고, 자기 생각으로 해야 할 일도 남의 생각으로 하려 드는 도착을 줄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요가정신세계이다. 진행과정을 주시하여 전체로 열린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무적 선행을 용기있게 실천하는 것이 길이다. 사극입선(捨戟入禪)이란 불교용어도 부분적 집착에 의해 갈라진 세속적 앎의 틀을 벗어나야 禪에 입문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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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문4-9 : 올바른 선행의 길 - 9

바가바드.기타4-18에 의하면 ‘행동 속에서 무행동(akarma)을 보고 무행동에서 행동을 보는 자는 깨달은 자이며 그가 요가행자이고 모든 행동을 완성한 자이다.’라고 했다.

요가의 문자적 뜻이 자아완성인데, 무행동자가 자신을 다 이룬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면 무행동(akarma, nishkama-karma)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사무욕행(私無欲行)을 뜻한다.
이 우주자연도 그러하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과 모든 생명체들도 창조적 성장과 진화를 하고자 하는 절대정신을 본성으로 하고 있는데, 그 목적과 의무에 일치된 행동을 개체가 하는 것이 무행동이다. 개체가 우주의 진리를 따르는 것은 우주의 행동인 것이지 개체의 행동이 아니라는 뜻도 되고 그러한 개체의 행동은 당연한 행동이고 온전한 행동이며 자신의 창조적 성장을 참되게 실현한 행동이다. 개체가 행동을 하지만 개체의 이기적 목적에만 집착되지 않고 전 존재의 본성과 목적 그리고 성장의 의무에 맞게 착한 행동(善行)을 하는것을 삶으로 삼으며, 그러한 무이기적(無利己的)행동을 알아차린 이가 자신을 완성한 자(pandita)라는 요가의 가르침은 최고의 진실, 최고의 아름다움, 최고의 선함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4-20에 의하면 ‘어진이(요가행자)는 행위의 결과에 (이기적)집착함이 없이 언제나 만족할 줄 알고, 어떤 것에도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행함으로써) 자신이 자신의 행위 속에 있으면서도 (이기적 욕망을 위해서는)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다.’고 했다.
행동의 결과에 대한 이기적 기대함이 없이(nishkama) 행동 그 자체의 기쁨으로 행함으로, 언제나 만족할 줄 알고, 스스로 행하는 자기성장을 이룩해 가기 때문에 주변으로 하여금 어떠한 부담도 느끼지 않게 하고 주변에 대한 원망도 없으며, 자기 행동에 대한 흔적도 없다는 명쾌한 가르침이 요가의 선행이다.

삶의 행동은 삶의 결과로 남아서 이 우주 속에서 영원히 쓰이므로 행동자체의 흔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에게 이기적 목적으로 쓰일 이유나 작용이 없다는 개인적 입장을 말한 것이다. 그렇게 개체가 무행동일 때에 전체의 진리를 행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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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에서는 인생의 생활기(Ashrama)제도가 있었다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4차원의 변화과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차원이 태어나서 부모와 주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성장기이다. 이 때는 자기가 제왕처럼 주변이 자기에게 최선의 조건을 마련해 주고자 한다. 그래서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사고와 행동이 다소 허락된다.
그러나 30대가 되기 전에 그 반대적 차원으로 전환해야 함이 두번째 차원이다. 자기중심에서 타중심으로의 변형을 연습하여 자기가 구축한 자신의 능력을 주변을 위해 나누어 줌으로써 자타의 균형적 조화를 이루는 가치를 깨쳐야 한다. 사람이 성장하면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자타의 균형적 조화를 폭넓게 실현해 가야 한다.
세번째 차원은 40대를 넘어서면서부터 자타와 사회를 넘어서서 우주자연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의 가치를 넘어서서 스승을 찾아 요가수도원(Ashram)에 입문을 하고 자연의 법칙과 개체의 우주적 의무를 배우게 된다.
네번째 차원은 50대 이후이며 깨달은 법칙을 통해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을 돕는 선행을 하는 시기이다.
삶의 지혜를 생각해 보면 작은 것도 있으나 인생의 전체적 의무를 모두 이루는 큰 지혜도 있다.
나이가 60이 넘어도 아직도 20대 이전의 성장기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이기적 집착은 자연에 대한 반란이다. 때에 맞게 자신의 바탕을 바르게 잡는 것은 슬기로운 삶의 길이다.

일본의 임제종 선사 난닌(南隱:1834-1904)은 한 철학교수의 방문을 받고 찻잔이 넘치도록 계속 부었다. 그리고 당신은 많은 견해로 넘치고 있으니 스스로를 비우지 않으면 선(禪)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좋은 스승이라면 제자의 에고(ego)를 쉽게 변형시킬 수 있는 지혜를 주어야 한다. 이기(利己)를 이전(利全)으로 제자가 전환하도록 이전(利全)의 아름다움과 질 높은 가치를 가르쳐 보여주면 그만이다. 이제는 긍정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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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문3-54 : 크고 작은 삶의 지혜 ? 28

일본의 동경대학 의학박사 하루야마 시게오(春山茂雄)는 일본의 다이와(大和)시에 전원후생 병원장이다. 그가 쓴「뇌내혁명」이란 책에서 긍정적 시각에 의한 마음의 평안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학이고 보다 질 높은 사회의 의료이다」「도파민 호르몬이 부족하면 의욕이 없어지고 우울증과 파킨슨 병에 걸리지만, 너무 많으면 정신분열증에 걸린다. 그 근본 원인은 마음이다. 식이법, 운동법, 명상법으로 치료된다」고 했다.

그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상상하거나 과거 행복했던 일을 말하게 되면, 뇌파가 알파파가 되어 뇌하수체 호르몬기관에서 엔돌핀이 나와 마음이 편안해지고 성인병이 치유된다고 했다. 그는 산책을 하는 것이 좌뇌를 진정시키고, 운동과 호흡을 조화시키면 우뇌가 강화되어 우뇌에서 알파파의 뇌파가 일어나고, 우뇌에 의해 지혜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엔돌핀은 단백질로 만들어지며 마음이 쉽고 편안할 때 분비되며, 에이텐 신경을 자극하여 창의력, 면역, 의욕, 기억, 감성을 강화시켜 준다고 했다.

마음이 어렵고 불편하게 느낄 때는 스트레스가 생겨서 뇌에서는 노르아드레나린(noradrenalin) 호르몬이 분비되어 혈압을 상승시키고 조직을 굳게 하며 노화를 촉진시켜 혈액순환을 약화시킨다고 했다. 마음이 대약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아름답게 수용하면, 몸에는 엔돌핀이 나와서 산화를 방지하고 발암물질을 약화시키며 활성산소를 저지시킨다. 그러나 화를 내면 노르아드레나린이 많이 분비되면서 활성산소를 만들어 세포핵을 침범하므로, 썩고 암이 생긴다고 했다. 자세의 쏠림을 찾아 그 역으로 그만큼 몸을 움직여 신체적 활동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요가운동을 하면, 노르아드레나린이 소비되어지고, 불쾌감을 다각적 안목의 이해를 여는 긍정적 기회로 삼는 요가명상을 하면, 노르아드레나린이 소비되고 활성산소가 줄어든다.
활성산소란 산소분자 두 개가 하나씩으로 나누어져서 이온화한 상태를 말한다. 활성산소의 폐해가 밝혀진 것 때문에, 성급히 숨가쁘게 뛰기, 땀내기 등의 운동이 줄어 들고, 그 반대로 느리고 편안하게 운동하는 요가의 보급이 촉진되고 있다

45억년 전의 태초에는 산소가 없어서 무산소 생명체의 미생물들이 살았으나 수초가 생겨 광합성을 한 것 때문에 공기 중에 산소가 생기고 새로운 유산소 생명체가 생겼다 한다.
오늘날에도 깊은 땅속이나 물속 그리고 사람의 내장 속에는 무산소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인간의 몸을 이룬 세포들의 세포핵은 무산소 생명이어서 세포막이 상하면 세포핵이 산소에 노출되어 죽어버린다. 사람은 산소 때문에 살고 산소 때문에 죽는다. 활성 산소는 공기 중에0.2%있으나 저기압일때는 증가하여 환자들의 증상을 악화시킨다.
진통제 복용 시와 격렬한 운동과 자세의 편중과 경직에 의한 혈액순환이 나쁠 때 활성산소가 많이 생긴다.

활성산소는 혈관의 내피를 손상시켜 유전자를 손상시키고 암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지방질과 만나서 산화물질을 만들어 조직을 노화시킨다. 스트레스를 받은 후 즉시 그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으면 엔돌핀이 나오면서 활성산소를 중화시키나, 스트레스를 받은 후 괴로워하고 원망하게 되는 부정적 접근이 되면 노르아드레나린이 분비되어 활성산소를 대량으로 만든다.

지혜로운 마음이 몸 속의 분위기를 바꾼다. 다른 동물에는 없는 대뇌의 피질은 감정을 조절하고 지혜를 내는 능력이 있는데 사람에게만 있다. 알파파의 뇌파는 뇌의 피질(전두연합야)을 활성화시키고 의식 세계와 잠재의식 세계를 통합시켜 엔돌핀을 나오게 한다. 알파파가 창의력, 직관력, 영감을 생기게 하므로 지혜를 위해서는 마음을 평화롭게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 시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로저 스페리(Roger Sperry:1913-1994)는 좌우 뇌의 기능분담에 대한 연구로 1981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의 동물학 박사로 이성(좌뇌)과 감성(우뇌)이 마음을 만든다고 했다. 1940년 간질병 치료를 위해 약3억 개의 뇌량(우뇌와 좌뇌의 연결장치)를 절단한 바가 있었던 신경외과 의사에 의해서 좌우 뇌의 기능적 차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로저 스페리의 연구를 통해 발전되었고, 그 후 지속적으로 크게 발전되고 있다.

후천적 삶의 체험(지식)은 좌뇌에 저장되어 있고, 선천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의 역사 45억년은 물론 인류의 역사 500만년의 체험 정보가 우뇌에 저장되어 있으므로, 우뇌에는 좌뇌보다 10만 배 정도 더 많은 잠재력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았으나 서양은 다르게 보았다. 뇌의 연구가 서양에서 과학적으로 늦어진 이유를은 17세기 초 프랑스 데카르트(근대 철학의 시조)의 이론 때문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그의 말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내용 때문에 몸과 마음을 별개로 보았다.
따라서 근대 의학에서는 마음을 종교에 맡기고 몸은 물질적 차원에서만 연구함으로써 뇌의 정신활동에 대한 연구가 늦어졌다. 마음이란 좌뇌의 감각적 조건만이 아니고 우뇌의 선천적 지혜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외적인 물질적 요소와 지식적 관념에 의한 이기적 감정만을 마음으로 착각한 현대인의 정신적 성향은 과거의 오랜 습관에서 왔다. 따라서 이제는 선천적 지혜를 발동시켜 마음을 바르게 수정하는 삶의 지혜를 일구어야 한다.
감정을 폭넓은 마음으로 조절하는 것이 우뇌의 발현이다.
왼손을 잘 사용하면 우뇌가 발달된다. 특히 동양인은 좌우 뇌가 균형적 조화를 이루어야 하므로 좌우 손의 조화로운 사용이 지혜로운 길이다. 교감신경의 흥분은 밝은 조건, 산성조건, 좌뇌기능 강화에서 유리하고, 부교감신경의 흥분은 어두운 조건, 알카리성 조건, 우뇌기능 강화에서 유리하다

좌뇌의 기능은 남성적이며 양성적이다. 좌뇌는 이성, 분노의 감정, 언어, 손익계산, 희로애락의 일부, 논리, 분석, 경쟁심, 긴장, 투쟁, 지식, 감정의 쾌감과 불쾌감, 교감신경 흥분 등을 일으키는 기능을 담당하므로, 좌뇌기능에 치우친 사회는 물질주의, 다툼과 전쟁, 환경파괴의 성향이 된다. 좌뇌손상자는 칼을 보면 그림으로는 그리지만 칼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우뇌손상자는 칼이라는 말은 하지만 칼 그림은 그리지 못한다.
우뇌의 기능은 도형의 인식기능, 초능력, 기적, 문제해결의 지혜, 온유하고 정서적임, 선천적 잠재능력, 여성적이고 음성적이다.

언어적 개념을 통해 생각을 잘 이끌어가면 좌뇌적이고, 사실적인 움직임의 영상(형태)과 함께 생각을 잘 이끌어가면 우뇌적이다. 생각이나 느낌을 함축된 개념의 단어로 잘 표현한 사람은 좌뇌형이고, 자신의 느낌을 사실적으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우면 좌뇌형이다. 그러나 도형이나 행동 또는 소리로 느낌을 쉽게 표현한 사람은 우뇌발달형이다.
힘든 일을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이 온다고 생각하여, 힘든 일도 잘 실천하는 사람은 불만도 긍정적인 안정으로 이끌어가고, 주변과 잘 싸우지 않고 친화력을 잘 발휘하므로 우뇌발달형이다.

우뇌의 발달은 50세까지 지속되며, 우뇌의 발달은 알파파가 일어나게 하여 엔돌핀의 분비가 촉진된다. 수행자, 음악가, 예술가 등은 순간의 느낌을 작품으로 구상하여 전체적 조화력을 창조적으로 발휘하는 우뇌형이다.
요가수련은 우뇌개발을 하면서 좌우 뇌의 균형적 조화를 실현해간다.
자기 암시적 잠재능력개발, 도덕적 가치의 존중, 우주의식적 지혜로운 삶의 추구는 우뇌적이다.
이기적 부분에 집착된 욕망은 좌뇌적이고 전체로 열린 이전(利全)적 갈망은 우뇌적이다. 참나의 속삭임은 영감이 되어 질 높은 의식의 실현을 예고한 것이므로 우뇌적이다. 꿈은 우뇌가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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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문3-52 : 크고 작은 삶의 지혜 ? 26

가장 큰 재앙(災殃)은 이미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다. 자신의 근본인 참나(atman)는 참 아는 자이고 지혜의 최고종자라 했듯이 우리의 내면에는 생명이 45억년 동안 체험한 진화의 지혜가 누적되어 있고, 그 재원으로부터 잠재능력이 발휘된다. 인체의 생명정보를 담고 있는 분자구조가 유전자이며 DNA라 하는데 약10만개가 있고 그 유전자와 염색체를 게놈(genome)이라 하는데 약30억개라 한다.

사람은 이미 축복 받은 존재로서 수많은 종류의 행복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집착된 욕망 때문에 삶의 편중이 심화되면, 피로나 통증으로 자각되어 자기 속에서 해결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남을 원망하거나 남에게서 그 해결을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의 재앙이다. 전문가에게 이해의 길을 듣고 스스로가 찾아내어 다시 수정하는 자신의 삶을 살면 된다.

중국의 선승 임제(臨濟790-886)는 붓다가 되기 위해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지팡이로 쳐서 쫓아내면서 「너는 이미 붓다다」라고 했다 한다. 누구나 자기자신으로 되어 있으면 되는 것이지 별도로 노력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석가는 무아(無我;anatta)를 주장하며 「행위는 있으나 행위자는 없다」고 했다. 이기적 집착에 의한 자기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적 집착의 자기가 깨달음의 장벽이라 했다.

우리가 갑자기 아플 때 「아야!」하는 소리를 내는 것은 겉의 편협한 자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고, 속에 있는 참나 즉 전체성의 영혼에 의한 것이다. 부분에 집착한 것에서 오해가 온다. 자신의 전체성을 열어서 이해의 길을 닦으면, 바른 지혜가 온다. 석가는 유언으로 장아함경에서 「자기와 법을 등불로 삼고 자기와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했다. 자신의 가능성을 다 이루는 방향으로 지혜를 내야 한다.

예수는 요한복음 10-9에서 「내(자기)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자기)를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맹자6-1-17에는 “사람마다 자기 몸 속에 귀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고 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자기를 깨치고 자기다움을 다 이루는 자아실현을 통해서 자기와 주변과 우주의 평화를 실현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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