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이 배움의 과정이라면 그 길은 대개 세 갈래쯤 된다. 하나는 독학으로 일관하여 어느 정도 내공을 쌓지만 곧 한계에 부딪힌 채 ‘우물안의 개구리’로 머무는 경우다. 보통의 경우는 제도권의 교육을 받으며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좀 특이한 경우는 혼자 수련하다 기인(奇人)같은 스승을 만나 도(道)를 터득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무협지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현실속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그가 바로 동부민요 명창 박수관(50·동부민요보존회 회장)이다. 그는 거의 묻힐 뻔한 동부민요를 되살렸을 뿐 아니라 미국 뉴욕의 카네기 메인홀 공연 등 200여회의 공연을 통해 국내·외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린 소리꾼이다.

1999년 국악계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무명’의 인물이 등장, 3월 제1회 상주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인 문화관광부 장관상, 같은해 5월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일반부 대상인 국무총리상, 10월에는 제7회 서울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것이다. 동부민요라는,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소리를 갖고 국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바로 박수관이다.

그가 3개 상을 휩쓸었을 때 국악계 안팎에선 말이 많았다. 정보기술(IT)분야 설비제작업체의 대표이자 최고의 공학기술자에게 주는 대한민국 명장이기도 한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기계기술자이자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사장이 소리를 한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하다. 명창이나, 대한민국 명장이나 한 분야만 해도 보통사람이 이루기엔 너무 높은 ‘고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리는 정직한 것이었다. 그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늘어나면서 ‘뒷말’은 자연히 잦아들었다.

“공학을 전공한 것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소리는 어릴 적부터 제 핏속에 흐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야를 동시에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니 집중력이 대단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산만한 편이라고 했다. 그는 일을 여러 가지 펼쳐놓고 동시에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병렬형 인간’이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동부민요를 널리 알리기 위해 93년부터 21회의 개인발표회와 200여회의 공연 등 세계 각국에서 공연활동을 해왔다. 놀라운 것은 그 모두가 초청공연이라는 점이다. 그의 소리에 나라 바깥에서 더 감탄하고 경이롭게 여긴 것이다. 그는 “몸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는 문화가 다른 사람들도 감동시킨다”고 강조했다.

2000년 6월 미국 카네기 메인홀 초청공연을 비롯해 링컨센터, 케네디센터 콘서트홀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 독일에서도 소리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호기심이 아니라 감동의 박수가 10여분이나 이어졌다. 이탈리아 로마 공연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스승 주제페 타테이는 “내 평생 이렇게 훌륭한 소리는 처음 들었다”며 놀라워 했다고 한다. 2003년 10월16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본부 총회 초청공연 무대에 섰을 땐 185개국의 대통령과 대사, 장관들이 “이렇게 훌륭한 한국의 전통음악이 존재하는 줄 몰랐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러시아 3대 국립음대 중 하나인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에서는 2000년 2월 그에게 명예음악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명예교수로 위촉했다. 2001년 11월 9·11 세계무역센터 참사 추모음악회에 초청된 박수관은 링컨센터에서 경상도의 상여소리를 불러 그 자리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애절한 상여소리가 ‘파란눈’들에게도 통했던 것이다.

박수관은 해외에서 더 알아준다고 할 정도로 굵직한 상을 잇달아 받았다. 2001년부터 매년 뉴욕에서 미주 한국 국악경연대회를 개최, 한·미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올 1월 미국 대통령상 금상을 받았다. 또 지난달 3~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퍼시픽 디자인센터에서 열린 ‘러시아인 밤의 축제’에서 제3회 타워상을 받았다.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영화배우 밀라 요보비치 등이 그와 함께 상을 받았다. 역대 수상자로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샤론 스톤, 더스틴 호프만,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이 포함된 걸 보면 상의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올해 초 프랑스의 현대음악정보자료연구소가 발간한 세계 전통음악가 인명사전에 한국인 음악가론 최초로 등재되기도 했다.

소리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다.

경남 김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박수관은 동네 상여꾼들의 구성진 가락과 각설이패의 장단을 들으며 소리와 친해졌다. 학교에 갈 때나 집으로 돌아올 때도 각설이패를 따라다니면서 막대기를 두드리며 소리를 익혔다. 보다못한 부모는 “공부나 하라”며 초등학교 6학년때 부산으로 전학을 보냈다. 한번 인이 박힌 게 쉽게 빠지랴. 박수관은 부산진역 광장을 연습장 삼아 소리를 계속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완전히 미친 놈’이었다. 그때 부산진역 광장에서 떠돌이 소리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동부민요의 달인 김로인(金路人)이다.

“제 딴엔 한 6년 정도 소리를 닦아 좀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웬 거지같은 노인이 다가와 ‘소리 가르쳐줄까’ 하는 겁니다. 속으로 ‘할배(할아버지)가 소리를 뭐 안다고…’ 했는데 막상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소리가 있었나’ 싶더군요.”

그 길로 박수관은 김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소리를 배웠다. 악보는 당연히 없는 도제식 가르침이었다. 스승은 ‘자연에 가깝도록 소리하고 가슴으로 소리해야 한다’ ‘창법을 완전히 익히기 전에 남들 앞에서 소리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국악계에 알려진 바도 없는 김로인은 동부민요 중 가장 어렵다는 전쟁가, 백발가 등을 전수해 주었다.

박수관은 소리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소리의 학술적인 체계를 다듬고 문하생들에게 전수를 하고 있다. 98년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국제민속학술대회에서 ‘한국 부전(不傳)민요 연구’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한다. 작년 11월 백두대간 소리 ‘박수관 동부민요’ CD 음반을 제작, 해외판매 수익금은 전액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위한 비상구호기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그가 공연을 하고, 논문을 발표하고, CD 음반을 내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맥이 끊어질 뻔한 동부민요를 제대로 보존, 전승하고 널리 알리고자 함이다.

“민요란 우리 민족의 정서가 녹아있는 정신적 자산이자 세계에 내세울 문화유산입니다. 과거 자료로 보관할 게 아니라 생활속에서 흥얼댈 수 있어야 음(音)이 생명력을 갖게 되지요.”

그는 지금도 출퇴근길 차안에서, 옛날 학교 등하교길에서 불렀던 것처럼 목청을 돋워 소리를 갈고 닦는다.

〈이동형 여론독자부장 spark@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5년 05월 15일 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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