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횡포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로 ‘한국병’을 앓고 있는 혼탁한 시절에 고려대 명예교수인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에게 길을 물었다. 한 세대 가까이 강단에 선 교수로서, 법학자로서, 현실참여를 해온 시민운동가로서, 그가 보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암담 그 자체였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우면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김 원장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법,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와 권력’에 대해 얘기했다. 선(善)으로 악(惡)을 극복함으로써 지도자의 신뢰가 형성되고 권위가 만들어진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 원장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전후했던 시절, 가장 많이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교수 중의 한 명이었다. 그 후엔 20년 가까이 ‘낙태 반대’, ‘사형제 폐지’ 등 생명 운동을 펼쳤다. 철저하게 보수적인 신앙관 속에서 누구 못지않게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참여했고, 사회문제에 실천적으로 임했다.
“전두환 정권 임기 후반의 ‘호헌 철폐’운동부터 ‘6·29선언’이 나올 때까지 1년 반 동안 13번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서명했습니다. 김우창 교수, 김용준 선생 등과 같이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저는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편은 못 됩니다. 오랫동안 권력이나 법 집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권력에 대한 공포는 젊은 시절 마치 가위 눌리듯 저를 억눌렀습니다.”
법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사법고시를 통과해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그다. 권력이나 법 집행에 대한 두려움이라니…. “만 네 살 되던 해 6·25전쟁을 겪으면서부터였습니다. 아버지가 해방공간에서 이념운동을 했던 게 좌우 양측의 완장 찬 사람들의 잇단 간섭과 행패를 부르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부역자 가족’이란 꼬리표로 남았습니다.” 김 원장은 “권력에 의한 가위 눌림 현상은 고시에 합격하고 연좌제에 걸려 공직에 임관하지 못하면서 극에 달했다”고 털어놨다.
김 원장은 1974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가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한 뒤 독일 아데나워재단 후원으로 유학 갈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김 원장은 독일 형법을 전공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재발견을 이루게 됐다고 고백했다. 권력과 폭력에 의한 가위 눌림에서 해방된 계기를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법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말고는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이 실천적인 행동을 낳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독일 유학 기간 인간과 개인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면서 권력에 의한 어린 시절의 가위 눌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김 원장은 독일법 사상과 자신의 신앙적 관점을 접합시켜 ‘한국형법’을 펴냈다. 총론 2권, 각론 2권에 총 3200여쪽으로 이뤄진 초(超)대작이다.
―한국형법의 철학적 토대는 무엇입니까.
“형법의 최고 규범은 성경 말씀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겁니다. 십계명 중에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통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모두 형법 아닙니까. 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근본 규범으로부터 흘러나온 나온 행위 규범들입니다. ‘범죄’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인간이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며, ‘형벌’은 파괴된 사랑을 원래의 관계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제 책은 그렇게 체계를 세웠습니다.”
―사형에 대해서는 뭐라고 기술하고 있나요.
“사형제도의 폐지가 합당하다는 의견을 달아놨습니다. 재판은 사람이 하는 겁니다. 오판(誤判)으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해봅시다. 이데올로기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을 했다면 이는 살인행위입니다. 사형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의 사법체계가 잘못됐다는 것 이상의 문제입니다. 잘못된 ‘죗값’을 공동체 모두가 져야 한다는 점에서 나라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흉악범이나 대량학살자를 살려놓는 것 자체가 생명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주장도 있는 것 아닙니까.
“국가권력은 최소한 범죄보다는 도덕적으로 더 정당하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국가가 범죄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존중하는 걸 보이고 생명 가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보인다면 국가권력이 더 정당해지겠죠. 살인을 사형으로 갚아주면 국가는 그 수준밖에 안 되는 겁니다.”
김 원장의 생명 가치 존중 사상은 낙태 반대, 사형제 폐지 운동을 낳았다. 과거엔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던 이 운동들을 20년 동안 해온 결과 낙태는 제도적으로 폐지됐고, 사형제도 사실상 사라졌다.
“과거엔 개신교계의 뜻 있는 어른들조차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니까 놀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러나 20여년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형은 이미 집행되지 않은 게 14년 가까이 됐죠. 대한민국이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김 원장은 정치인, 특히 국가권력을 이끄는 대통령은 이처럼 낮추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같이 급속한 변화에 빠져 있는 사회일수록 정치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이럴수록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 큰 틀에서 정치를 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 정치는 소시민적인 정치, 권력을 위한 정치, 정치를 위한 정치에 불과합니다. 국민들이 이를 여과해 내고 바로잡도록 정치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독일이 2차 대전 패전 이후 짧은 시간 안에 경제성장은 물론 놀라운 민주화를 이룩한 건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나치를 칭송하는 건 중한 벌을 받게 돼 있습니다.”
―아직도 신사참배 같은 걸 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일본과는 대조적이군요.
“일본이 아무리 경제적으로 발전했어도 정치적으로 그런 상태인 한 오래가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의 정당정치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한국의 정당들은 공동체가 향유해야 할 가치를 선택하면서 나가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독일의 경우 기민당은 보수와 안정, 자민련은 자유, 사민당은 분배를 정강정책에 앞세우고 있습니다. 기본 이념과 노선을 바탕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국은 뭡니까. 이념적인 기초가 없습니다. 바람을 타고 정권을 잡는 책략이 있을 뿐입니다. 복지문제가 이슈가 되니까 한나라당은 좌클릭, 민주당은 좌좌클릭 하잖아요. 제대로 된 정당은 아직 없다고 봐야죠.”
―평소 ‘폴리페서’들을 비판해 오셨는데요.
“소수의 교수들이 현실 선거에 깊이 개입을 해서 교수직을 유지한 채 정치 한복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이 최근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폴리페서는 연구도 열심히 한다고 하던데요.
“그렇지 않아요. 정치에만 눈을 돌리면서 연구가 됩니까. 학자의 본분은 연구하는 겁니다. 우리의 경쟁단위는 한국이 아닙니다. 외국 학자들과 경쟁해야죠. 한국에는 왜 마이클 샌델과 같은 사람이 없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수 평가용으로 논문 몇 편 쓴 걸 갖고 연구했다고 볼 수 없죠.”
―교수들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는 있는 것 아닌가요.
“교수든 목사들이든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제 뜻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거나 정치인 행세를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다 딴 뜻이 있어서 하는 거예요.”
―과거엔 폴리페서라 해도 정치인의 보조적 역할에 그쳤는데 지금은 아예 정치를 끌고 가겠다는 흐름이 많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뉴 미디어 때문에 그런 현상이 가능해졌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수가 트위터 팔로어를 수십만명씩 갖고 있다면 그걸 관리하는 시간이 엄청날 겁니다. 그 시간에 공부에 매진했다면 더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내겠죠. 조국 교수 같은 사람도 그 좋은 머리로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는데…안타깝죠. 학문에 소명감이 없으면 정치에 뛰어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좀 잦아들긴 했지만 ‘안철수 바람’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한국 정치의 환멸에 대해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철수도 본분은 가르치는 겁니다. 그는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 치고 낭만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나이브한 사람이죠. 정치하고 싶으면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물 한번 안 묻히고 바람을 타고 민심을 이용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을 거쳐야 하고 책임에 대해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김 원장은 분명하게 주문했다. 정치를 하려면 다 버리고 정치판에 뛰어들든지 아니면 교수직에 전념하든지 하라고. “공자 말씀대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법입니다. 김 원장은 “교수는 교수다워야지 정치에 영향력이나 행사하려면 안 된다”면서 “자기 본분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아야 국력도 커지고 선진국이 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에 대해서도 일일이 평가했다.
“최초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이 행한 과거 청산은 좋은 작업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측근 스캔들이나 자기관리를 못한 건 문제가 있었죠. 김대중 대통령은 나름의 몫을 했고 노력했습니다. 그분은 충분히 신중했습니다. 그런 면에선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좋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에 기대했지만 갈수록 경박해져서 좋게 볼 수가 없죠. 노 대통령이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스스로를 비(非)신화화한 것은 민주화를 위해 장점이었지만 품위와 품격을 희화화한 건 단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를 할 때엔 저도 모르게 손에서 땀이 났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땀이 안 나더군요. 권위의 상실이죠. 정치도 조폭 떼몰이 식으로 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고요. 당연히 있어야 할 권위가 무너져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하나로 뭉치게 하는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권위주의는 타파 대상이지만 권위는 중요합니다. 이걸 다시 세우려면 국가적 비용이 많이 듭니다. 지금도 노풍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가벼운 지도자는 그분 하나로 족하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는 어떻습니까.
“이 대통령 취임 1년 됐을 때 쓴 글이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대통령을 표방했지만 인간의 경제에 대한 욕구는 한정이 없기 때문에 경제만 갖고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정치를 잘해야 한다, 상대를 포용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 이렇게요. 지금 우려한 대로 된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이 대통령이 정치를 포기한 게 가장 큰 실책입니다. 청와대 권력과 여의도 권력, 두 개의 권력이 존재한다고들 합니다. 정치에 관한 한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 못한 것 같습니다.“
―형법학자로서 교육감 선거에서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복귀한 곽노현 교육감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실망했습니다. 그분의 법정 진술을 보니까 말은 굉장히 현학적이지만 진실이 담겨 있지 않아 환멸이 느껴졌습니다.“
―곽 교육감의 직무 복귀의 법적인 문제는 어떤가요.
“법적으로 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여백이랄까, 법의 공백이 있어요. 이 여백은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메꿔 나가야 합니다. 곽노현은 그 여백을 제대로 채울 만한 인물은 안 돼 보여요.”
―형법학자로서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도 한마디 해주시죠. 법체계를 강화해서 엄벌주의로 하면 폭력이 좀 줄어들까요.
“학교폭력은 과거 정권에서도 문제가 됐었습니다. 정부가 전쟁이다 뭐다 해서 대대적인 소동을 벌일 때도 있었고요.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각해졌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살 외에는 돌파구가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비상상황에는 비상대책을 써야 하죠.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이 했던 것처럼 단기간에(Short), 날카롭고(Sharp), 충격적인(Shock) ‘3S’ 정책이 필요합니다. 이후 영국에서는 학교폭력이 사라졌습니다. 학교폭력보다 공권력이 위에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 후에 서서히 한 단계씩 내려가는 중장기 정책을 써야 합니다. 청소년 범죄를 에피소드로 취급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아요.”
김 원장은 22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4주년 특별기자회견이 열린 후 추가 전화인터뷰에서 임기 말 되풀이되는 측근비리와 친인척비리와 관련, “한국 정치가 아직도 돈이 많이 드는 정치를 하는 데다 이해관계와 탐욕에 얽매인 사람들이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4주년 특별기자회견 직후 이뤄진 추가 인터뷰에서 “더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이 딱 부러지게 ‘내 탓이다, 잘못했다’며 진솔한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 허민 사회부장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