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퇴계가 문제인가?

[지난번 글 ‘퇴계를 묻어야 나라가 산다’ 편과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 의해 최소한의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괴물이 달리 괴물이랴. 공(公)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私)가 괴물이다. 종교집단이든, 이념그룹이든, 조중동 패거리든, 뒷골목 양아치든 공동체의 룰에 의해 통제될 수 없을 때 괴물의 얼굴을 가지게 된다.

사(私)를 극복하고 공(公)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인간 존재의 진면목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조차가 없는 경우가 있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 그래서 완벽한 사람.. 그들은 공의 광장으로 나오지 않는다.

괴물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돈 잘 버는 좋은 남편과, 공부 잘 하는 좋은 자식들에, 좋은 직장과 높은 신분.. 타워팰리스라는 안전한 성을 쌓아놓고 그 안에 안주하는 강남 아줌마들처럼.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는, 그래서 오만해진.. 그들의 횡포를 막을 방법이 없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지 못할 때.. 바로 그 때가 그대가 죽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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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를 뿌리로 하는 영남 남인세력을 단순히 학문적, 이념적 유파로만 본다면 곤란하다. 그거 순진한 거다.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다. 알거 다 알면서 왜 이러셔! 어쩔시구리! 그게 단순한 학문적 견해 차이로 보이나?

고조선이 망하자 지배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삼한을 이루었다. 이후 몰락한 가야계 왕족을 중심으로 삼한일통의 이념이 제시되었다. 왜 삼한일통인가? 본래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왕족은 신(神)이었다.

백제의 서울 웅진이 곰나루로 번역되지만 잘못이다. 곰(熊)이 아니다. 공주의 이름은 ‘금성(金城)’이다. 신라 서울도 ‘금성’이다. 부여 사비성, 곧 ‘소부리’가 경주의 ‘서벌’과 같듯이 이름이 같다는데 주목할 일이다.

여기서 금(金)은 일본 말 ‘가미’와 같은 신(神)의 의미다. 단군신화를 곰토템으로 해석함은 무지의 소치다. 백두산은 개마산(蓋馬山)이고 개마는 곰이고 곰은 신이다. 백두산은 신의 산이다.

무엇인가? 왕실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덴노를 숭상한다는 일본의 신도를 연상할 수 있다. 그런데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등극시킨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의해 신성한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자 말갈족이 이반하게 되고 이에 고구려가 무너졌다.

마찬가지로 성골의 대가 끊어져서 종교적 권위가 소멸하자 김춘추가 그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삼한일통의 이념을 제시한 것이며, 여기에 새로 진골귀족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토착세력에게 미움받은 가야계의 김유신 일당 역시 정치적 권위를 필요로 해서 삼한일통을 내세운 것이다.

정통성 없는 김춘추와 정통성 없는 김유신이 연합하여 새로운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거다. 토착세력이 몰락하고 외부와 끈을 댄 세력이 승리하는 법칙은 어디나 같다.

신라가 망하자 신라귀족은 고려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경순왕의 무덤이 경주가 아닌 개성 인근 한탄강변 호루고루 뒤에 있는데서 보듯이. 마침내 한탄강을 넘지 못하고 호로탄을 내려다보며 애절하게 그곳에 묻혀 있다.

몰락한 가야계와 근거없는 김춘추가 손잡고 삼한일통을 꾀하였듯이, 마찬가지로 몰락한 신라귀족 궁예와 근거없는 해상세력 왕건이 손잡고 철원에 둥지를 틀어 북진을 꾀하게 된다. 역사는 항상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귀족이 조선귀족으로 편입되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순조롭지 못했다. 선비들이 두문동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이성계는 수하를 풀어 72명의 선비를 학살했다. 훈구세력과 사림의 갈등은 여기서 발생했다.

고려시대의 숱한 정변은 경주와 연결되어 일어났다. 고려는 경주(동경)를 중요시하였고, 많은 쿠데타들이 경주에서 모의되어 작당하고 위로 치고올라가는 형세로 일어났다. 경주는 신라계 고려귀족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김부식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경주세력이었던 점이 크다. 김부식이 발해사를 배제한 것도 그렇다. 동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이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북세력과 대립하면서, 서경천도론 등으로 인하여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동경에서 멀어지는데 따른 두려움이 반영된 거다.

고려귀족은 순조롭게 조선귀족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왕씨를 말살하려고 했다. 고려시대의 숱한 정변때 그러했듯이 저항세력은 약속이나 한듯이 경주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서울에 대한 미련이 없을 리 없다.

경주까지는 못가고 태백산 기슭 영주, 안동 일대에 자리잡았다. 지금은 소백산맥으로 이름이 붙었지만 당시는 태백산 자락으로 인식되었다. 소백산 기슭의 영주 부석사도 간판은 ‘태백산 부석사’로 되어 있다.

조선초의 숱한 정치적 갈등은 서울세력과 영남세력 사이에서 일어났다. 금성대군의 역모가 그러하다. 그 정서의 뿌리가 퇴계 문하의 영남 남인으로 이식되었다. 오죽하면 정조임금이 도산서원 앞에서 도산별시를 열었겠는가?

중앙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경주 쪽으로 튄다는 이심전심이 있다. 퇴계는 태백산 아래에 근거지를 마련함으로써 중앙과의 대결구도를 취한 것이다. 진부한 고려귀족의 패턴을 답습한 것이다. 이로서 조선사의 큰 틀거리가 마련되었다.

조선왕조사는 한 마디로 노론과 남인의 대결이며 노론은 조선을 개국한 서북세력이고, 남인은 고려귀족을 계승한 동경세력이다. 가야귀족≫신라왕족≫고려귀족으로 이어지는 면면한 흐름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본질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영남 남인의 우월의식은 바로 거기에 있다. 지금은 매국 한나라떼의 경상도 우월주의로 변태하고 있다.

노론은 조선초의 개국공신 그룹과 일부 신흥사림의 결합이다. 이들은 서울세력이다. 남인은 고려귀족의 잔당이다. 이들 사이에는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강이 있다. 우월의식이라는 강 말이다.

노론은 조선을 건국한 주체로서의 우월의식을 가졌고 남인 역시 고려귀족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군자당, 소인당 운운하는 유교이론과는 상관이 없다. 본질은 지역과 혈통이다.

중국의 주자학 역시 마찬가지다. 유가나 법가는 북쪽 도시에서 일어났고 도교는 남쪽 시골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넘을 수 없는 정서의 벽이 있다. 만리장성보다 더 높은 심리의 벽이다.

주자의 심학은 공자의 유교와 완전히 다른 신유학이다. 거기에는 남쪽에서 수입된 불교와 남쪽에서 자라난 도교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남쪽의 우월주의로 무장하고 북쪽의 여진, 몽고족과 대결하고 있다.

주자학의 본질은 도교전통에 뿌리한 남쪽 중국인과 북쪽 금나라, 요나라와의 차별화다.(중국의 뿌리는 황하에 있으나 여러 전란을 거치며 엘리트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주했다.) 중화와 만이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주자의 이기론은 공자의 가르침에 없던 거다. 그래서 주자도 한때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퇴계의 차별적 이기론도 송나라 지식계급의 심리와 같은 것이다. 금나라가 일어나자 남송으로 쫓겨온 망국의 한과 마찬가지로 소백산 남쪽으로 쫓겨온 고려귀족의 한이 반영되어 있다. 여러 정변에 무식한 군인들이 득세하자 꼴을 못봐주겠다는 거다. 상종하지 않겠다는 거다. 돌아앉았다.

고려 왕씨는 해상에서 중국과 무역한 서북의 신흥세력이고 이성계 역시 함경도로 진출한 서북의 신흥세력이다. 이들이 개경과 서울을 근거로 일어나 신라귀족≫고려귀족 세력과 대결구도를 취한 것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신흥세력을 사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남인의 입장이다. 우리는 흔히 보수적 훈구귀족과 개혁적 사림세력의 대결로 묘사하지만 이는 권력에서 배제된 남인의 저항적 입장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과 경상도로 도망간 고려귀족 잔당의 진부한 대결이다. 김시습이 왜 경주로 내려갔고 금성대군은 왜 순흥에서 모의하였는가? 그 지역이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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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자본주의 초창기에 부르조아 계급 사이에서 갑자기 도덕붐이 일어난 데서 보듯이 동서고금의 지배집단은 지배의 근거를 만들기 위하여 위선적인 도덕으로 무장하는 경향이 있다. 차별화의 수단인 거다.

미국도 그렇다. 요즘은 ‘진보=히피’ 이렇게 되어 있다. 조중동 수구떼가 개혁세력을 바라보는 입장도 같다. 부르조아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차별주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조중동이 노무현그룹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며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진보=히피’.. 이것이 남인이 노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들은 일관되게 비타협적인 유교근본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일체의 평등주의와 사회적 신분이동을 반대한 것이다. 왜 노론은 1년상이고 남인은 3년상인가? ‘3년이 아니고 1년이라니 히피놈들이 아닌가’.. 이게 조중동 마인드다.

차별주의는 분명히 있다.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빼고 단순히 오바마와 매케인을 놓고 인기투표를 한다면 9 대 1로 오바마가 이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50대 50에 근접한 결과가 나온것은 백인들이 매케인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는 상층부 20프로를 제외하고 볼 때, 백인은 거의 전부 매케인에게 투표했다. 그들은 가치로 투표하지 않았다. 패거리로 투표했을 뿐이다. 백인우월주의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월주의는 어디가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우월주의가 없는 곳은 없다.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월주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룰에 의해 통제되면 긍정적인 자부심이고 통제되지 않으면 괴물의 얼굴을 한 우월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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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동렬 글)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악의 뿌리가 퇴계에 있다고 말하면 확실히 지나친 거다. 견강부회가 되겠다. 그러나 오늘날 매국 한나라떼의 중심 이데올로기인 경상도 우월주의 뿌리가 영남 남인세력의 유교 근본주의 정서에 가닿는다고 봄은 일정부분 타당하다.

필자로 말하면.. 퇴계학파의 근거지라 할 경상도 안동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는 사람이다. 퇴계.. 정말 고약하다. 1천원권 지폐마저 기피하게 할 정도로.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가시처럼 걸린게 있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목사가 절에까지 찾아가서 스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외쳐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의 개인 홈페이지에까지 찾아와서 퇴계관련 도서를 홍보하는 분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물론 그 분이 악의를 가지고 그랬다고 보지는 않지만, 설사 선의로 하는 일이라 해도 ‘스님 앞에서 설교’는 아닌 거다.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악이 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가? 맹목적 선의가 아니라 비판적 합리성이 필요한 거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도 있더라만.. 필자가 ‘퇴계가 죽어야 이 나라가 산다’고 믿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퇴계의 근거지라 할 특정지역에서 경험한 일인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직도 백정마을이 있었다.

마을 아주머니 말씀이 백정마을 사람과는 혼사를 피한다는 거다. 정말 집요하다. 사악하다. 치를 떨만하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사람들의 잘못을 모두 퇴계 한 사람 때문으로 돌릴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해한 것으로 말하면.. 니체가 ‘초인’을 외치자 나치가 이를 인종주의에 활용했듯이.. 퇴계가 교육을 통한 인간계발을 외치자 경상도 남인세력이 이를 온갖 형태의 차별주의에 이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어느 정도였는가? 조선 후기에 서얼이나 중인들은 길을 가다가 남인 선비를 보면 침을 뱉고 '재수없다'며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한다. 남인들이 서얼등용 등을 집요하게 방해했기 때문이다.

효종 이후 북벌정책이 채택되면서 양반계급과 평민계급을 화해시킬 필요가 생겼다. 평민계급의 지지를 끌어내야 북벌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론이 서얼-중인 등용을 통한 계급간 화해를 주장한 반면 남인이 집요하게 반대한 것이다.

남인은 유교주의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원리주의 세력에 속한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이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차별했기 때문에 사찰이 양반들의 놀이터가 되기 일쑤였는데.. 스님이 일주문 앞에 서서 찾아오는 선비 거동만 봐도 당색을 알아맞힐 수가 있었다고 한다.

노론 선비가 절을 방문하면.. ‘큰 스님 있소? 차나 한 잔 나눕시다.’ 점잖게 이러는 거다. 스님과 선비가 친구가된다. 반면 소론 선비가 절에 찾아오면.. ‘무식한 중들아! 나하고 토론이나 해볼까. 석가모니가 말이여.’ 이러면서 공연히 시비를 건다.

그러나 적어도 소론은 스님을 인간 취급은 한다. 대화 상대로 쳐주는 거다. 남인이 찾아오면.. “이놈. 중놈들 어디에 숨었느냐. 양반들이 여기서 시회를 열터인즉 얼른 시중을 들지 못할까? 술상 봐오지 않고 뭣하느냐?” 하고 꾸짖는 거다.

조선시대의 사색당쟁은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치열했다. 노론과 소론, 남인은 부인들의 옷맵시까지 달랐다. 노론이 계급을 뛰어넘어 풍류를 즐기는 문화주의 패거리라면, 소론은 토론을 즐기는 논쟁가 부류, 남인은 종교적 차별주의 광신도 집단이었다.

정조 대에 남인이 집권했을 때.. 정조가 노론 벽파를 겨냥하여 문체반정을 일으킨데서 보듯이 남인이 수구개혁을 진행시켜 결국 양반과 상민 간에 이반하는 바람에 그것이 조선이 망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왜놈이 침략을 자행하는 데도 무지렁이 평민들은 ‘거 꼴좋다! 양반이 잘난척 하더니 톡톡히 망신당하는구먼’ 하고 비웃고 있었던 거다. 의병장 신돌석은 평민이라는 이유로 양반 의병장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정도였던 거다. 이러니 나라가 망하지.

물론 노론도 장기집권으로 타락했고, 남인 중에서도 뜻있는 개혁가가 없잖아 있었다지만 이는 한나라당 안에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 찾아보면 몇 명은 있다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한 거다.

본질은 유교의 종교화다. 그 뿌리에 남인이 있고 퇴계가 있다. 퇴계가 나쁜건 아니다. 중국에서도 공자를 재평가하자는 마당에 이제 와서 우리가 퇴계의 학문적 성취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모든 악이 퇴계로부터 비롯된다면, 역설적으로 한국의 모든 선이 퇴계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사정이 있다.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조선왕조의 선비문화에 있다면 그 뿌리에 퇴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은 퇴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퇴계의 재평가는 퇴계의 확실한 극복 이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여전히 퇴계는 야차같이 달라붙어 내 목을 조르고 있다. 나를 질식시키려 든다. 대한민국은 퇴계라는 감옥에 갇히어 있다.

군대에서 선참의 얼차려, 회사에서 고참의 전횡, 어느 집단에나 있는 텃세나 기득권의 횡포.. 그 뿌리를 더듬어 보면 끝내 퇴계의 차별주의를 만나게 된다.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한국정신’이 무엇일까?

이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우리가 ‘한국인다움’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그 미학을 완성하지 못하면.. 우리는 변방에 머물러 있을 뿐 세계의 중심으로 치고나갈 수가 없다.

유교주의를 떼놓고 한국다움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두 얼굴, 학문화 된 유교합리주의의 긍정적 측면과 종교화 된 유교 근본주의의 차별 이데올로기, 그 중에서 계승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서구가 여전히.. 서구가 자행한 모든 악행의 원인이라 할.. 백인우월주의의 뿌리라 할.. 기독교를 버리지 못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부시를 앞세우고 전쟁책동을 벌인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가장 사악한 데서 보듯이..

또 아랍이 여전히 회교를 버리지 못하고 있고, 태국이 불교를, 인도가 힌두교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이 유독 유교라는 종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유교가 일정부분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며.. 과학으로서의 유교주의가 존재하고 그 유교주의는 일정부분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한편으로 유교는 종교다. 중국에서 관리등용시험 과목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유교주의를 한국에서 종교로 발전시킨 세력은 영남 남인이다. 그 남인의 뿌리가 퇴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퇴계는 여전히 극복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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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사상과 구조론

지난 겨울 퇴계를 비판하는 글을 여러 편 썼던 사실을 기억하실지. ‘퇴계혁명’이라는 책(김호태 저)을 권한 분이 있어서였는데, 그 분이 필자에게 책을 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략 살펴보았다.

책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고.. 저자는 10년 이상 퇴계를 연구했나본데.. 내가 써도 그보다 낫겠다 싶으니... 퇴계에 대한 새로운 내용은 없고 기존의 비판을 재반박하는 형식.. 알맹이 없는 거다. 자기 주장을 내놓아야지.

남의 주장, 남의 사상, 남의 글 가지고 어쩌구 하며.. 가공무역식으로 중간에서 끼워팔기 해서 부가가치 창출하는 짓은 정말이지.. 선비의 자세가 아니다. 작가 자신의 고유한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 한다.

퇴계 역시 주자의 설을 베껴서.. 남의 사상 가지고 설레발이 치는.. 퇴계를 옹호하는 저자 역시..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가 남의 나라, 남의 사상에 푹 빠져 있는 한국의 강단학계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

저자 본인도 남의 걸 팔면서 말이다! 나? 내게는 구조론이 있다. 이건 수입품이 아니고 기성품이 아니다. 복제품 아니고, 번역한거 아니고, 주석한거 아니다. 백퍼센트 내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다.

10년 간 대한민국 땅을 스무바퀴 이상 걸으면서 내 배 아파서, 내 안에서 낳은 거다. 이문열이 삼국지 저자로 학생들 착각하게 만들어 지하의 나관중 저작권료 소송걸게 만드는 그런거 아니다. 근본이 다르다.

이제는 정말이지 고유한 우리사상, 우리철학, 우리가치, 우리기준, 우리저울, 우리권리, 우리양식 찾아야 한다. 그것은 골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틈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천하’에서 나오는 것이다.

보편주의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를 보는 눈을 뜨지 않으면 안된다. 그걸 해낸 사람이 율곡. 그러니 그만큼 율곡의 사상은 성리학의 본질에서 멀어졌다. 당연하다. 그런데 저자는 그걸 비판한다.

성리학이 이(理)를 숭상하는 학문인데 기(氣)를 주장하니 율곡은 성기학이 아니냐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주자의 사상도 공자의 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것이어야 한다.

퇴계는 그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사상가일 수가 없다. 단지 인간심리를 좀 아는.. 처세술의 달인.. 그의 경(敬) 개념이 처세술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정적으로 유교를 종교화 시켜 놓은 장본인.

진리탐구의 결실이 아니라 인간통제술의 발달. 하여간 퇴계 덕분에 권력자는 편하게 되었다. 퇴계 때문에 인간들이 고분고분해졌으니. 그의 경 사상은 한마디로 ‘고분고분하게 말 좀 들어라’는 거.

퇴계를 비판하자면 한이 없고.. 구조론으로 돌아가서. 필자에게 책을 권한 분이.. 알 수는 없지만.. 필자의 구조론적 접근에 관심이 있었다 치고.. 구조론으로 본 사단칠정론에 관심이 있었다 치고.

이런 이야기 하는 이유는 저자가 ‘사단칠정’을 모르는 것 같아서다. 하긴 누군들 알겠냐마는. 그렇다면 그 동양학의 뿌리를 한 번 캐보자는 거다. 동양정신의 발원지를 거슬러올라가서.

한강은 검룡소에서 시작되고 낙동강은 황지에서 시작된다. 유교는? 대한민국의 모든 산은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지리산에서 마친다. 공자는? 발원지가 없다. 형이상학이 없다.

학문의 발원지가 형이상학이다. 구조론에서 다루는 존재론으로 말하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존재하기 위하여서는 ‘소속,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가 차례대로 있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없으면 존재가 부재다.

포지션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학문을 유도하는 절차를 해명해야 하기 때문에.. 학문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말하면 안되고.. 명확한 출처를 제시해야 하므로.. 형이상학의 자리에 대신 가져다 둔 것이 주역이다.

말하자면.. 공자의 예(禮) 개념이 ‘인류문명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이라면 그 자동차의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공자는 그것을 논하지 않고 저자불명의 주역을 추천했다. 말하자면 공자철학의 근거는 주역인 거다.

그런데 주역은 점 치는 책이다. 이건 넌센스다. 황당하다. 직접 읽어보면 알 거다. 결론적으로 공자의 모든 사상은 근거가 없다. 공자 자신이 근거를 대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되면 학문이 가지를 쳐나가지 못한다.

자동차운전학원은 있는데 자동차는 없다? 공자는 자동차도 없이 자동차운전교습학원을 운영하는 자란 말인가? 그래서 보강작업이 시작되는데. 첫 아이디어는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라 볼 수 있다.

하늘의 원형이정이 인간의 인의예지로 전개된다. 하늘과 인간은 닮는다. 이 점은 ‘패턴’에서 시작하는 구조론과 닮았다. 구조론은 닮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패턴에서 로직을 찾고 메커니즘을 찾고 패러다임을 찾는다.

주자가 이를 발전시켜 이(理)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불교에서 아이디어를 빌린 바 된다. 그러니 금강산에서 1년간 불교를 공부한 율곡이 뭔가를 아는 거다. 또 주자학이 왕양명의 심학으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리(理)는 결이다. 리는 옥을 가공하는 장인이 원석의 결을 따라 가공한데서 나온 개념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목리(木理)라 하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결은 길이다. 길은 도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도학이다.

길에는 네거리가 있다. 그것이 심이다. 심은 core다. 그런데 퇴계 아저씨는 엉터리 번역의 옛날 천자문을 공부하다보니 심을 마음으로 잘못 이해했다. 천자문의 한자뜻풀이 중 다수가 엉터리라는 사실 알아야 한다.

심은 볼펜심과 같은 거다. 복숭아 속에는 씨앗이 있다. 그게 핵이다. 지구 속에도 핵이 있고 원자 속에도 핵이 있다. 모든 존재는 내부에 핵이 있다. 심 1과 날 2다. 핵에서 날로 가지치는 것이 리(理)다.

심(心)을 마음심으로 번역하지 말고 core로 이해해야 한다. 왕양명의 심즉리는 정확한 이해다. 구조론에서는 심 1과 날 2로 ┻ 모양을 하고 있다. 가운데가 심(心)이고 옆으로 뻗은 것이 리(理)다.

어떤 존재든 내부에 심이 있어야 하며, 심을 가진 존재를 외부에서 타격하면 저절로 박리되어 리가 생겨난다. 심과 리는 바퀴의 축을 이루는 굴대와 사방으로 뻗은 바퀴살처럼 항상 같이 가는 거다.

이심전심은 이 core에서 저 core로 통한다는 거다. 왜 심에서 심으로 통할까? 밀도가 같아야 반응하기 때문이다. 심과 날은 밀도차이가 있다. 밀도가 같은 것끼리만 반응하므로 소리가 전달된다.

무선전화가 연결되고 안테나가 작동한다. 주파수가 같은 것만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림과 떨림이 있고 감응이 있다. 공명이 있다. 심은 소통의 중심이다. 심의 밀도가 다르면 공명하지 않는다.

주역의 핵심 개념이 무엇인가? 청나라 강희제는 주역의 원리로 중국을 통치하여 태평시절을 열었다는데 강희제 본인의 표현을 빌면 ‘밸런스 원리’다. 이 부분은 구조론과 닮아 있다. 밸런스가 포지션을 낳는다.

문제는 주역의 원리와 퇴계사상이 일치하는가이다. 아니로소이다. 퇴계는 주역의 정신에서 벗어났다. 그는 리(理)와 기(氣)를 차별하여 밸런스를 무너뜨렸다. 통치자와 민중 사이의 밸런스가 무너져 조선은 망했다.

주역의 밸런스 원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늘의 원형이정이 인간의 인의예지에 반영된다. 무엇인가? 심즉리다. core에서 날로 전개한다. 그것은 도다. 도는 길이다. 길은 결이다. 결은 리(理)다.

원형이정은 사계절로 나타난다. 사계절은 시간의 길(道)이다. 그래서 태극기에는 건리감곤 네 괘가 있다. 음양이라는 core에서 4괘라는 날로 전개한다. 퇴계는 이 패턴을 사단칠정 개념에 적용한다.

사단이라는 이가 칠정이라는 기를 지배한다는 논리. 그러나 이는 국어공부를 게을리해서 일어난 착각에 불과하다. 이와 기가 무엇이 다른가? 간단히 말하면 이는 수학이고 기는 과학이다.

수학은 논리게임이다. ‘A면 B다’의 규칙. 과학은 거기에 에너지를 태운 것이다. 이라는 자동차에 운전수가 올라타면 기가 된다. 야구, 농구, 축구, 배구의 공통된 규칙은? 두 팀으로 나누어 공으로 경기하기.

이렇게 공통점만 뽑아놓은 것이 리. 기는? 구체적인 스포츠 종목이다. 야구라면 방망이도 필요하고, 배구라면 네트도 필요하고, 축구라면 골대도 필요하다. 이에 에너지를 올려태우면 기가 된다.

이라는 자동차에 승객을 태우면 기가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그게 사단칠정론이 되느냐다. 근대의 개념으로 말하면 리는 합리성이다. 합리주의를 품으면 인, 공유하면 의, 실천하면 예, 파악하면 지다.

말하자면 인의예지 사단은 억지로 주역의 4괘에 끼워맞춘 거고, 억지로 원형이정의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시간의 길에 맞춘 거고, 그러니까 글자수 맞추기 게임이고, 근대개념으로는 그냥 ‘이성’이다.

인의예지가 있는게 아니고, 그냥 이성이 있는데, 그 이성을 품고(인), 그 이성을 공유하고(의), 그 이성을 실천하고(예) 그 이성을 파악하며(지). 넷으로 짜맞춘 것은 중국사람들이 원래 4언절구를 좋아해서다.

천자문도 천지현황, 우주홍황, 일월영측, 진숙열장 하며 4자로 맞춰놓았다. 7정은 무엇인가? 존재론은 소속,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로 전개한다. 세번째 파트너에서 짝을 짓는다. 절대성이 아니라 상대성.

짝을 지으면 대상이 있으므로, 구조론의 세번째 가역원리에 따라 (반복, 연속, 가역, 분할, 순환) 내가 결정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이 결정한다. 이 경우 선악, 플러스 마이너스는 공존하게 된다.

희노애락애오욕에서 애라면 사랑이다. 얼마나 많은 살인사건이 사랑때문에 일어나는가? 사랑이 선하지 않다. 욕은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이 문제를 일으키지만 문명의 진보는 욕망이 일군 것이다.

노는 성냄이지만 거룩한 분노가 518의 항쟁을 낳았다. 희노애락애오욕이 모두 선으로도 혹은 악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이유는 구조론의 가역원리 때문이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결정하니까.

구조론으로 말하면 소속은 절대적이며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로 갈수록 점점 상대적으로 된다. 총은 파트너를 괴한으로 만나면 악이 되고, 경찰로 만나면 선이 된다. 그 방아쇠에 누구 손가락이 걸리느냐다.

이가 기보다 우월하다는 퇴계의 발상은 자동차는 자동차운전보다 우월하다는 주장과 같다. 자동차는 아직 운전수와 승객이 타지 않았으므로 사고가 나지 않는다. 반면 자동차운전은 필연 사고를 부른다.

게다가 기름값도 만만찮다. 감가상각비도 든다. 자동차는 타인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으므로 무조건 좋은 것이요, 자동차운전은 기름값 들고 중고차 되고 사고날 위험 있으므로 제한적으로 좋다.

●이 - 자동차를 주겠다≫누구나 좋아한다.

●기 - 자동차운전 시켜주겠다.≫어떤 사람 좋아하고 어떤 사람 싫어한다.

그래서 자동차는 자동차운전보다 낫다? 이건 얼빠진 소리다. 모든 자동차는 운행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율곡의 기일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년은 천사와 같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그러므로 소년은 선하고 어른은 악하다? 그 소년은 결국 어른된다. 사과는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사과잼은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한다. 왜?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를 해야하니까.

이렇듯 존재론의 전개는 5단계가 있으며 전개의 정도가 심화될수록 선택이 복잡해진다. 존재론의 질에서는 누구나 좋아하지만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갈수록 궁합이 복잡해져서 좋거나 혹은 좋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 퇴계는 이와 기를 구분하였을까? 옛날 천자문이 한자번역을 잘못해놔서 퇴계가 한문의 어원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본질은 따로 있다. 왜 인의예지 사단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인의예지 넷은 원형이정, 건리감곤, 사언절구에 맞추려고 억지로 나눠놓은 것이고 정답은 합리성 하나다. 그러므로 합리성 개념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기일관성, 자기동일성, 자기정체성이다. 인의예지가 중요한 것은 한번 하면 계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자동차이고 칠정이 그 자동차의 운전이라면 처음 자동차를 잘 선택해야 한다.

자동차가 마티즈인데 운전솜씨가 F1일 수는 없다. 자동차와 자동차운전은 필연 연동된다. 사단과 칠정은 연동된다. 차가 슈퍼카라야 운전솜씨가 F1급이다. 이 점에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정확하다.

기의 에너지원리가 이의 일관성 원칙을 태우고 가는 것이다. 에너지의 길은 논리의 길에 연동된다. 에너지는 절대로 일관성의 길을 간다. 율곡은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계를 구조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런건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주자학에 숨은 중화주의다. 지금 모택동이 사방을 정벌하여 티벳과 내몽고와 만주를 자기네땅이라 우기지만 어디 사실이 그런가 말이다. 진실로 말하자면 신해혁명은 만주를 제외한다.

신해혁명은 청조를 타도하고 명조를 계승했다. 그래서 그들을 장발적이라 불렀다. 명나라 중국이 진정한 중국이다. 그들이 청나라때 얻은 대만과 모택동이 정복한 티벳을 자기네땅이라 우기니 ‘대중국주의’다.

주자는? 소중국주의다. 주자는 금나라 오랑캐는 중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중국은 중화민족의 중국이라 여겼다. 그의 이원론은 중화민족의 지배를 주장하는 것이다. 왜? 북송이 망해서 남쪽으로 쫓겼기 때문에.

비슷한 일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났다. 고려시대 김부식과 묘청이 대결한 이후 한국사의 큰 줄거리는 경주세력과 서북세력의 대결이다.(필자의 과거 글 참조) 그런데 조선왕조의 건국주역은 서북세력이다.

이성계는 중국계, 통두란은 여진족이다. 고려 왕씨 역시 중국계다. 그러므로 서북세력의 입지를 주장하여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이다. 조선왕조 역시 건국주역이 서북세력이므로 기자조선을 더듬어 조선으로 국호를 정했다.

지금 우리 교과서는 다르게 기술했겠지만 이성계가 국명을 정할 때 기자조선으로부터의 중국쪽 연고를 강조한 것이다. 승자인 서북세력이 훈구공신 되고 패자인 경주세력은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경주세력이 소백산 남쪽으로 도망가서 영남 남인세력을 형성한 것이며 이들이 퇴계의 패거리다. 이들은 줄기차게 서북세력과 대결하면서 서북을 한국에서 배제하려는 소한국주의를 퍼뜨린다.

율곡은 출신이 북쪽이라 자연히 서북세력에 가담하고 이후 노론이 권력을 잡고 북벌을 추진하게 된다. 서북에서 정체성 찾기다. 퇴계에서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남인정서의 뿌리는 서북을 배제하려는 소한국주의다.

중국은 대중국주의를 표방하며 사방을 정벌하여 자기네땅이라 우기는데 우리는 왜 소한국주의를 표방하며 얻은 북한도 중국에 내주려고 하는지 나는 딴나라 인간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이름이 딴나라겠는가? 자기 나라를 남의 나라로 여기니 딴나라인 것이다. 개성공단 포기하고 금강산 포기하고 국토를 다 내주려고 한다. 왜 이런 짓을 벌이나? 뿌리깊은 경주세력의 습성이다.

퇴계 이원론의 이 개념은 인도 브라만 계급의 발상과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차별하고 분리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천하에 대한 개념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우리 것은 우리 조상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것은 진리의 보편성에서 나온다. 서북이 있고 그 위에 대륙이 있고 그 위에 세계가 있고 그 위에 우주가 있고 그 위에 신의 완전성이 있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한국에 안주하지 말고 보편진리, 보편가치, 보편원리에서 우리의 입지를 찾아야 한다. 퇴계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옛날에 쓰다버린 수입품이다. 율곡이 우리것이며 율곡은 보편주의를 주장했다.

율곡은 편벽에 서지 않고 보편타당을 추구했으므로 덜 한국적, 덜 성리학적, 덜 유교적이다. 진리는 원래 그렇다. 한국진리 일본진리가 따로 있으랴. 우리불교가 통불교이듯 유교도 일원론이어야 한다.

이와 기의 구분은 수학과 과학의 구분이다. 퇴계의 이발개념은 수학을 과학 위에 올려놓고 둘 사이에 계급을 가른 거다. 구조론으로 보면 수학이 과학에 선행한다. 율곡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분리할 수 없다. 과학없는 수학은 존재가 없다. 수학없는 과학 역시 존재가 없다. 수학과 과학의 분별망상, 이와 기의 분별망상은 ‘나’와 ‘나의 몸뚱이’를 구분하는 것과 같다.

나의 정신은 높고 나의 몸뚱이는 낮다는 식이다. 그러나 하드웨어 없는 소프트웨어가 무슨 소용이랴. 존재론으로 말하면 소속과 영역과 파트너와 포지션과 임무는 항상 함께 가야 한다. 연동되어야 한다.

http://gujoron.com

이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율곡의 완성이다.

"Chanson... ..."
샹송이란?
샹송이라는... 프랑스 말은...
스페인의 칸시온이나... 이탈리아어의 칸초네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어...가요라든가 노래를 의미한다.
프랑스의 파퓰러송을... 모두 샹송이라 말해도 무방하지만...
전통적인 샹송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노래와는... 상이한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샹송은... 가사가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이...
많은 것도 그 특색중의 하나이며...
곡은 쿠플레(couplet)라는... 스토리 부분과...
르프랭(refrain)이라는... 반복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일상 대화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알기 쉬운 말을 쓰고...
때로는... 아르고(은어)를 섞어서 엮는다.

세계 각국의... 파퓰러송 중에서도... 샹송에서는 특히 가사가 중요시된다.
따라서... 샹송 가수는... 단지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의... 내용을전하는것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가수가...음악 학교는나오지 않았더라도...
대개 딕션(화법) 공부를 하는데... 이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소리가 아름답다든가... 음악적으로 정확하다든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하여... 개성적인 표현으로...
듣는 이에게... 전하는가 하는점을 평가받는다.

이리하여... 어떤 샹송을... 처음으로 불러 성공시키는 것을...
크레아시옹(creation)이라 한다.
이것은... 창조라는 의미인데... 보통 초연이라고 번역된다.
샹송에서는... 특히 이 크레아시옹이 존중된다.

즉 가수는... 자기의 개성으로... 샹송을 연기하고 부름으로써...
작자와 공동으로... 그 노래에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한 번... 크레아시옹된 샹송이... 초연자 이외의...
가수에 의해... 다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샹송도... 외국의 노래와 같은 경향이 되어...
크레아시옹의 의의는약해지고 말았다.


샹송의 종류
샹송은... 그 성립이나 구조... 혹은 다루는 테마 등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샹송 포퓔레르 (chanson populaire)
민중의 노래라는 뜻의... 샹송 포퓔레르는...
영어의... 팝송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유행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샹송사에 있어서는... 작자 미상의 민요나... 이에 준하는 것을 말한다.

♧샹송 사방트 (chanson savante)
학식 있는 샹송이나... 고급 샹송이라는... 의미의 샹송 사방트는...
샹송 포퓔레르에 비해... 작자가 분명한 것을 말한다.
중세의 궁정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사랑의 노래가 많았다.
가사의 형식도 정돈되고... 곡도 예술적이어서...
샹송 포퓔레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근대 샹송의 발달을 촉구시켰다.



♧샹송 드 제스트 (chanson de geste)
보통... 무훈시라고 번역되는... 샹송 드 제스트는...
기사도가 화려했던...
중세 무렵에... 발달한 서사시의 일종이며...
12세기에 만들어진... 4,000행으로 된... 롤랭의 샹송 등이 유명하다.
대개 기사나... 왕의 무훈을 찬양한 내용을 가졌고...
노래한다기 보다는 음송되었다.


♧콩플랭트 (complainte)
역시... 중세에 프로방스 지방에서... 일어난 세속적인 노래의 일종으로...
로맨틱한비련 이야기나... 종교적인 수난과 기적 등을 엮었고...
애수를... 내포한 가락을 지녔다.
16세기 경부터... 주로 종글뢰르jongleur라고 불리는...
음유 시인에 의해... 성하게 불려졌다.
이 콩플랭트라는 명칭은...
현대에도 전해져... 샹송의 제목으로 흔히 쓰이며...
애가라든가... 비탄의 노래로 번역되고 있다.


♧로망스 (romance)
원래의 중세의 음유시인(트루베르trouver나...
트루바두르troubadour)이 불렀던...장편의 감상적인 이야기 노래였으나...
그 후 차츰... 달콤하고 부드러운 노래를... 널리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기악곡에도 적용되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샹송 리테레르 (chanson litteraire)
문학적 샹송을 말하며...
샹송 포퓔레르에 대해... 샹송 사방트와... 똑같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인의 시에... 작곡가가 곡을 붙인 작품을 말한다.

1567년... 시인 장 앙투안 드 바이프와...
음악가... 티보 드 크루비유가... <시와 음악의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나서...
이 장르의 샹송이 발달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샹송 리테레르는 크게 융성했고...
이윽고... 18세기의 카보나...
19세기의... 문학적 카바레가... 그 주요 무대가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조금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 부흥의 징조를 보이면서...
오늘날의... 샹송계에도... 전통이 계승되어왔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에 의한 <미라보 다리>나...
루이 아라공의 시에 의한 <엘자의 눈동자> 등은...
샹송... 리테레르의 좋은 예이다.


♧샹송 레알리스트(chanson realiste)
현실적... 샹송이라고 번역되는...
샹송 레알리스트의 테마는... 대개 사랑인데...
그것을... 드라마틱한 수법으로... 전개시켜 많건 적건...
서민 생활의... 가장 어두운 면을... 리얼리티를 존중해서 그려낸다.

즐겨 다루는 주인공은... 건달이나 매춘부... 선원이나 병사 등이며...
번화가나 항구가... 그 드라마의 무대가 된다.
이 종류의 샹송은... 19세기 말 경부터 대두하여...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주된 레퍼터리로 하는... 여성 가수를 샹퇴즈 레알리스트라고 한다.
남성인 경우는... 샹퇴르 레알리스트라 하지만...
이 분야의 가수는... 거의가 여성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이전... 다미아, 프렐, 이봉 조르주 등이...
3대... 샹퇴즈 레알리스트라고... 일컬어지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전후에... 샹송 레알리스트는... 급속히 위축되었다.


♧샹송 팡테지스트 (chanson fantaisiste)
호나상적 샹송이라... 번역되는 샹송 팡테지스트는...
여러 가지 타입의 작품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분류로서...
자유 자재로... 공상을 펼치며... 엮은 샹송을 말하며...
재기에 넘치고... 코믹한 요소를 갖고 있다.

주로... 카페 콩세르나... 뮤직 홀의 무대에서 불렸는데...
이것을... 레퍼터리로 하는 남성 가수를... 샹퇴르 팡테지스트라고 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샤를 트레네, 마르셀 아몽 등이... 이 분야에 속한다.
여성 가수는... 극히 적지만...
코르디는... 대표적인... 샹퇴즈 팡테지스트라고 할 수 있다.


♧샹송 드 샤름 (chanson de charme)
매혹의 샹송이라는... 의미의 샹송 드 샤름은...
주로... 사랑을 주제로 한... 감미로운 샹송을 말하며...
이것을 부르는... 남성 가수를... 샹퇴르 드 샤름이라고 한다.

이 말은... 1930년대에... 미성으로 당시를 풍미했던...
티노 로시에 대해... 처음으로 붙여졌고... 앙드레 클라보에게 계승되었다.

여성 가수의 경우는... 샹퇴즈 드 샤름이라 하며...
뤼시엔 부와예 등이... 이에 속하지만...
오히려... 샹퇴즈 상티망탈(감상적 샹송 여가수)라... 불릴 때가 많다.


♧ 이밖에 샹송 폴리티크(chanson politique)
이미... 중세 무렵부터 있었던...
정치적 샹송... 샹송 앙가제(chanson engagee) 참여 샹송...
프로테스트 샹송... 혹은 샹송 드 메티에(chanson de metier)...
직업에 관한 샹송 등... 여러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옮긴글-


샹송모음 131곡♧




    " Who's your favorite musician?
    What kind of music do you like?I love Chanson~!
    ♪~ ♪♬Thanks~ have a nice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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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섹스하는 이유 (Why Women Have Sex)

여자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로맨틱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라고. 물론 미국 얘기다. 7일(현지시간)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에 따르면 텍사스 대학의 신디 메스턴 교수와 데이비드 버스 교수가 공저한 ‘여자들이 섹스하는 이유’(Why Women Have Sex)는 환상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이에 따르면 여자들은 따분해서, 남편이 집안 일을 대신해줘서 섹스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남성의 성적 매력이나 열정이 별 동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들의 연구 결과 남성 대다수는 상대방 여성에게서 성적 매력을 조금이라도 느껴야 끌리는 한편 대다수 여성은 상대방 남성에게서 성적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해도 관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대상 여성들 가운데 84%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섹스한다고 밝혔다. 어느 여성의 말마따나 “섹스가 싸우는 것보다는 쉽기 때문이다.”

섹스 기교를 향상시키기 위해, 혹은 상대 남성으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근사한 식사를 대접 받아서 섹스한다는 답변도 있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여성 10명 중 1명은 선물 받은 대가로 상대 남성과 관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섹스가 신(神)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섹스한다고 답한 여성은 1000명 중 1명꼴이었다. 편두통을 치유하거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섹스한다는 여성도 있었다.

아래는 메스턴 교수, 버스 교수가 밝힌 ‘여자들이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이유’다.

1) 따분함을 극복하기 위해
2) 남자가 집안 일을 대신해줘서
3) 섹스가 신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이라서
4) 남자가 그냥 불쌍해서
5)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 받아서
6) 섹스 기교를 향상시키기 위해
7) 편두통을 치유하거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8) 언제 다시 섹스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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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청년 김대중에 대하여

출처>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68&article_id=4654

2009.8.19.수요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야당 지도자 였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서 민주화에 투신하였고, 온갖 고초를 넘기면서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룩하고, 노벨평화상을 받고, 6.15공동선언을 이끌어 내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뭐 이 정도가 대부분 알고 있는 전부 아닌가? 자, 그럼 1971년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렇다. 언론이건 뭐건 간에 1971년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언제 태어났는가 그 정도만 -그것도 고령의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도 한국 현대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에 아무런 배경없이 도깨비 방망이에서 뚝딱 튀어나오듯이 역사에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김대중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저 그렇게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비전과 철학, 가치가 그저 1971년 이후 수많은 탄압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온 결과물을 1971년부터 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필자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연설과 자료들을 보게 되었으며,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그 분의 면모를 계속 새로 발견하게 되고, 경의와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잘 모르던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보면서 그 분의 거대한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김대중은 처음부터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인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때야 동영상도 많이 남아 있고, 최근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자료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료들도 극히 일부분을 확대 과장하거나(좃선벼룩 류의 '김대중 분석'이 그러하다.) 어떤 이야기를 끌어 나가기 위해서 일부만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단 확인된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생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제대로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따라서 1923년~1925년까지 여러 설들이 있다. 웃기지 않는가? 무슨 고대사 인물 탐방도 아니고, 출생연대부터 분명하게 알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보다 오히려 더 자료가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우등생으로 자라났고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좌익활동을 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선언문

여기서 잠깐!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 씨앗이네, 젊을 때부터 빨갱이 짓이었구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딴지에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술자리에서 빨갱이론에 대처하기 위해서 논리를 제공한다면 아래와 같다.

당시 미군정에서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우파는 겨우 10%,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무려 90%가 나왔다. 1920년대부터 민중들에게 침투하고, 지하조직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좌익세력은 이미 대중화 되어 있었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이상, 민중 뿐만 아니라 소위 글 좀 읽고, 쓴다는 사람은 모두 좌익계열이었다. 김대중 빨갱이론을 펼치는 사람에게 '까놓고 니 조상도 전부 빨갱이였어'라고 정중하게 설명해주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나타나서 간신히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 또한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냉전은 어린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상처로 남기고 만다. 보통 이쯤 되면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상이다. 뉴또라이처럼 되거나 혁명가가 되거나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기보다는 유연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특히 목숨을 잃을 뻔 했다면 더더욱 드물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의 유연한 사고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1955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로 인해서 젊은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그런데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니. 무슨 꼭 80~90년대 운동권적인 제목의 글 같지만 1955년의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시 1950년대의 한국노동운동의 모습과 대안이 매우 잘 제시되고 있다. 실로 80~90년대의 이론과 비교해봐도 글의 수준이나 통찰력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사상계 창간호

이 글은 일단 반공을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북한과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지만, 실제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동의 유연성' 어쩌구 저꺼구 씨부려대는 뉴또라이들이나 재벌들의 논리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하여야 하고, 관료자본주의 지배체제를 극복하여 합리적인 경제시스템을 얘기하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 잘 들어보면 흡사 민주노동당 분위기를 나타내는 이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전략...

여기서 장황하게 정치론을 늘어놀 여유는 없지마는 여하간 자본주의의 제도하에서는 노동자의 복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가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근대적 생산을 급속히 확충 발전시켜야 함을 서두른 나머지, 우선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놓고 그 후 서서히 노동자의 후생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논자가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고기더러 동해 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는 개철지어의 장자고어와 마찬가지 모순으로서 그간에 있어서의 노동자와 전 근로계급의 고초와 희생을 무엇으로 감당해낼 것이며, 기술한 바 공산당과 대항해서 노동자가 어떻게 굳센 민주 진영의 선봉으로서 싸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가?

그렇다고 필자는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당장에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도록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초보조차 제대로 못 갖춘 우리 나라 경제 형편으로 사회주의를 꿈꾼다는것은, 그것이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만의 관장을 주장하는 소극적 사회주의건 생산, 소비 양면의 장악을 목적하는 적극적 사회주의건 도저히 현실을 무시한 공상에 불과한 것인 동시에 사회주의 그 자체 역시 각국에서의 실험의 결과 상당한 결함이 있다는 것도 이미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지향할 길은 죄악적인 착취와 지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일방, 우리의 실정이 용납지 않고 겸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를 면치 못하는 사회주의 자체도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결국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는 이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되 종래와 같은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단연 배격하고 노동, 자본, 기술의 3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그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노동자와 기술자 역시 응분의 참여가 허용될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 사회주의가 생산 수단의 사회화에만 중점하던 것을, 이제 생산수단보다도 기업운영과 이윤분배에 있어서의 사회화라 할까, 즉 노동자와 기술자를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처우함으로써, 생산능률화의 감퇴를 가져옴이 없이 사회주의 본래의 목적인 근로계급의 복리의 증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새로이 각성된 세계적 사조의 지향이며, 이러한 경향은 북구제국을 위시한 구주 여러 나라와 심지어 자본주의의 본가인 미국에서까지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며 , 지금 미국에서는 각 기업체의 주권을 노동자에게 적극적으로 분배하는 노력이 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후략...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54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럼에도 현재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그 만큼 우리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당시 31살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석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영민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연거푸 실패한다. 1954년 총선에서도 떨어지고, 뒤이어 강원도 인제에서도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에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1961년 5월 14일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16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국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된다.

지독히도 정치에 운이 없던 김대중 대통령의 초기 정치 이력은 함께 회자되는 경쟁자(나는 결코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자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수준이 맞아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력과도 비교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개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하고 그리고 대개 선거에 '떨어진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토호인 부모의 든든한 후원과 정치적 후원자의 지원으로 비교적 무난하고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차이가 바로 3당 합당 당시 엇갈린 두 사람의 선택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드디어 국회의원 뱃지를 달게 되는 것은 1963년 6대 국회의원선거였다. 고향 목포에서 승리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 전라도에서 민주당 달고 이기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냐?'라고 하겠지만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11곳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휩쓸었다. 전라북도는 2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민주공화당이었다. 당시는 우리가 아는 그런 지역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국회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만큼이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특히 1964년 4월 21일에는 김준연이라는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상황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무려 5시간 19분에 걸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였다.(이는 현재 한국 기네스에 올라있다.).6대 국회의원 활동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유력 야당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1967년에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건 더욱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무려 16개 지역에서 민주공화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박정희 정권의 관권선거가 포괄적으로 개입된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하는 쇼까지 보여주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뚫고 승리한 것이었다.

이 선거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왜냐하면 이 선거를 기점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당시 선거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흡사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연상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나의 비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은 돈이 아닙니다. 2억도 싫고 20억도 싫고 200억도 싫습니다.

내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신라 삼국통일 이래 1500년 동안 처음으로 이렇게 국토가 갈라져 있는 사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해방후 국토가 20여 년이나 분단된 이 사실이, 나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평화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박정권 아래에서 건설입네, 수출입네, 증산입네, 하면서 몇 사람만 잘살게, 몇 사람만 부자되게, 몇 사람만 배떼기 부르게 만들고 부익부... 재벌은 더욱 더 대재벌을 만들고 모든 국민은 헐벗은 가난뱅이요, 모든 국민은 더욱 빈익빈하게 만드는 이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내가 주장하고 우리 당책으로까지 채택된 중산층과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중경제체제를 실현해서 나라의 혜택이 국가의 혜택이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모든 사람의 피부와 뼈끝까지 골고루 돌아갈 그러한 올바른 경제정책이 이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나의 절대적인 소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몇몇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얘기하면서 '반독재 투쟁, 민주화, 민족화해-평화노선'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견제를 받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타동적인 외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60년대에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적 흐름이나 과정에서 타동적으로 묻혀가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만들었고,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내놓았다.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을 쥔 세력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비전들을 더욱 구체화하여 1970년에 <1970년대의 비전>이라는 글을 쓴다. 그 글을 살펴보면 그의 구상이 얼마나 튼튼한 철학적 기반 위에, 얼마나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이 글이 나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이 글을 읽는 당시 기득권 세력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위협으로 느껴졌을 지 그 심정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잠시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나라 국민들은 적어도 헌법이념상으로는 ‘교양과 재산’을 가진 시민계급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19세기의 근세 초기 민주주의의 제한된 시대에 살지 않고, 만 20세 이상의 성년이면 누구나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20세기의 보편화된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이 나라의 기본법과 법률제도는 외관상으로 다른 어느 선진 민주제국과 비교해도 과히 손색이 없는 이념과 가치를 선언하고 있고, 또 이들 제도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1인 1표제의 원칙에 입각해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의 권익을 보호, 신장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 우리 나라의 정치체제는 겉으로 드러난 상징과 제도만을 가지고 규정한다면, 데이비드 이스튼 교수가 그의 명저 『정치체계론』에서 정의한 바 ‘정치체계 속에 투입되는 모든 요구를 설정시키고 모든 결정을 유효케 하는 방법의 규제조치로서의 체제가 민주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서와 이론상에 비친 그림 속의 떡 같은 정치체제일 뿐 우리 국민대중이 지금 이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감하는 실제의 정치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중략...

철인정치를 구가한 고대 희랍의 플라톤으로부터 오늘의 개발독재 옹호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엘리트에 의한 통치의 효율성을 믿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정치를 혐오하고 비판했다.

#1 대중은 무식하고 학식이 없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2 대중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3 대중은 허망한 것을 약속하는 선동정객에 표를 매수당한다. #4 대중은 언제나 권위지향적이며 자조력도 발전의욕도 없다. #5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가 똑같이 1표씩 갖는 것은 불공평하다.


개발독재 옹호자들은 대중의 자치역량을 지나치게 회의하고, 지식수준의 열악함을 개탄하여 대중에 의한 지배를 회피한다.

...중략...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에 대한 피상적 관찰의 산물이다.

국민대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개발독재 지지자들이나 엘리트 통치예찬자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우매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봉건정치의 이론적 대종인 공자조차 대중을 가리켜 ‘지극히 어리석되 가히 속일 수 없는 존재’라고 갈파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대중은 언제나 자기의 올바른 지도 세력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독재정권의 타도에 앞장섰다.

대중은 언제나 역사의 편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승리자였다. 나폴레옹도 진시황도 대중 앞에서는 무참한 패자가 되고 만 것이다.

...중략...

첫째. 박정권의 경제건설이 외국의 반완제품을 도입 가공하는 매판적 건설이며 이것이 국부를 한없이 해외로 유출시키고 있으며 농업을 희생으로한 건설이 도시, 농촌 간의 이중구조를 극대화하고 경제기반의 파탄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그 청산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적 분업관련의 심화에 의한 내포적 공업화와 농공업간의 긴밀한 관련발전 위에 국민경제 전반의 통일성 있는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인 재생산권의 형성을 촉진하여 우리 경제의 상대적인 자급자족 체계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둘째, 공업화의 과정에 있어서는 국가는 전력 수송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투자하는 동시에 민족자본인 중소기업의 보호육성과 이의 경제적 단위에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련기업간의 수평적 계열화를 적극 지원하도록 유의할 것이다.

...중략...

셋째, 농업은 식량의 자급자족과 경제발전의 기본 여건으로서 가장 중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업의 구조는 한국농업이 지니고 있는 제조건에 비추어 자발적인 농민참여에 의한 협업농의 창설과 자주농업의 안정에 그 중점이 두어질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공업과 농업간의 분업 관련의 심화를 위해 상업적 농업의 전개가 권장될 것이다. 특히 어떠한 정책방향도 경제적 유인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이를 유도하는 조치가 꾸준히 취해져야 할 것이며 농업취업자와 공업취업자간의 소득 균형을 위한 적정한 농산물 가격과 이중가격제도, 가격예시 및 유지정책이 취해져야 한다.

넷째, 계층간 분배구조는 산업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에 의한 자본에 대한 약간의 간섭과 근로자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근로자의 경영참여는 단순히 권익확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협력에도 큰 의의를 둔다.

근로자의 정당한 배분참여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기업체에 있어서 노동조합의 경영참여, 종업원 특수제도를 법제화할 것이다.

다섯째, 국민경제의 운용에 있어서는 혼합경제의 한국적 형인 대중경제는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추진하다. 그리고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위하여는 약간의 기간산업을 국가가 소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 범위는 한정적이고 과도적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할 것은 대중경제는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기능을 존중하는 대중경제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발전과 운용은 크게 격려될 것이며 그것이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공헌하는 한 결코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여섯째, 대중경제는 재정금융세제의 운용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소수 특권층 위주를 단호히 배격하고 이미 지적한 바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 중소기업의 육성, 농업경제의 급속한 발전 위주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 폭넓은 중산안정계층이 형성됨으로써 우리의 경제가 무한한 발전을 지향함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의 물질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후략...

솔직히 내가 기득권 세력이라도 이건 가만히 둬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비전은 점점 정교해지고, 구체화 되었고, 또한 확대되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 속에 그 분이 겪을 험난한 여정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글을 쓴 지 무려 28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비상 상태였고, 그의 '70년대 비전'은 나온지 무려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현실화 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글을 쓴 다음해, 1971년에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 나오게 되었고, 박정희와 인상적인 한판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한 선거였지만, 온갖 관권 선거와 부정 개표로 간신히 김대중 대통령을 따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는 김대중 대통령을 죽이려 하였고, 거기서부터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살펴보면서 왜 그가 그토록 탄압받았는지,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역량은 너무나 높았기에 탄압받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그를 이겨낼 역량까지 함께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노무현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생각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극복해야 할 구시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연설과 글을 보면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시대가 달랐을 뿐이고, 세련함이 달랐을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영민했으며,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시대상황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독재자와 기득권의 공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늘 거꾸로만 돌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역주행을 멈추게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으로 잠시나마 역사의 온전한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기득권과 독재권력에게는 진땀나는 위험인물이었고, 거대한 역사의 역주행을 홀로 막은 거인이었으며,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바로 보여준 최초의 정치인으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에게 말하는 듯한 글이 하나 있어 인용하도록 한다. 이것은 1973년에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에서 펴낸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책에 있는 -경애하는 국민에게-라는 글의 첫머리 부분이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하며 또한 증오한다.

역사전달자(lim149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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