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asso의 춘화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피카소(1881 - 1973)가 생전에 남긴 작품 수는 5만 점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화가 1885점이고, 복제가 가능한 판화, 조각, 도자기의 작품 수가 많습니다.

그중 도자기 그림(도자 그림)은 약 2280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한 도자기에 에디션이 50점 부터 500 점 짜리 까지 있으니 대략 400 점 정도의 원판 도자기 그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PABLO PICASSO 1881-1973 높이 250 mm 에디션 85/200 1958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를 한적이 있습니다. 2003년 9월부터 10월말까지 60일간 열린 제2회 경기도 여주 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피카소 도자 특별전'을 열어 70여점의 작품이 소개됐습니다. 그때 많은 관람객들은 피카소가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고, 도자기 위에 그려진 수준 높은 그림에 감탄했습니다.


30 by 22.5cm 에디션 495/500 1968


높이 21.5cm 에디션 12/300 1952
서양의 화가 중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피카소뿐이 아닙니다. 샤갈과 호안 미로 등 여러 화가들이 도자기 그림을 남겼습니다. 도자기라는 또 하나의 예술형태에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보다 넓은 예술세계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고대시대부터 동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만들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위에 무늬나 문양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후 오랫동안 도자기에 대해 소홀했고, 동양에서는 도자기를 생활화 시키면서 그 위에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 색도 변형시켰습니다.

그런데 유럽과 동양 사이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건너갔고, 유럽 귀족사회에서는 동양 도자기 수집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울러 도자기 제작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 공장들이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훗날 일부 근현대화가들이 자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피카소도 그중의 한명입니다.


지름 385 mm 에디션 127/200 1947

피카소가 도자기에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47년 여름이고, 위의 작품이 첫번째 작품입니다. 그가 도자기 그림 작업을 한곳은 프랑스의 도자기 도시인 발로리(vallauris)인데, 당시 그는 '평화 운동(peace movement)'에 참가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발로리 성당에 <전쟁과 평화>라는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발생한 내전때문에 조국에 등을 정도로 평화에 대한 신념이 투철했기에, 한국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의 평화를 특별히 염원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평화> 벽화 중 평화 부분에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을 그렸고, 그 당시 <한국에서의 학살>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지름 18.5cm 에디션 500 1956
피카소는 발로리로 온 이후 25년동안 도자기 그림에 열중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말년의 예술혼을 도자기 그림에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래서 그의 도자기 그림에는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공적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도자기 그림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마지막 연인이자 '생의 마지막 동반자'인 쟈클린 로끄(위의 그림)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쟈클린 로끄는 피카소 보다 40년 연하인데, 발로리에 있는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서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피카소에게는 자신과 같은 여인의 헌신적 뒷바라지가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피카소가 80살이 되던 1961년에 결혼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도록 내조를 했고, 피카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위의 작품을 비롯해 여러 점을 그렸습니다.


지름 42cm 에디션 25/50 1959
피카소는 '투우의 나라'인 스페인의 말라가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미술교사였으니 그의 그림 재주는 '내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가 어린 아이때 부터 소질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14살 때, 문화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의 론잔 미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페인의 거의 모든 미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스페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일 뿐 아니라, 19살 때인 1900년에 바르셀로나에서 화가로서의 첫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번듯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것이 아니라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선술집에서 150점의 스케치를 전시한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전시회를 하고 정식으로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에게 바르셀로나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시회를 끝낸 후 유럽화단을 쥐락펴락하는 화가들이 모여있는 프랑스의 몽마르트로 가서, 그곳 빈민촌에서 폴 고갱, 고흐, 드가 등과 어울리며 그의 청년기를 시작합니다.


지름 253 mm 에디션 455/500 1963

파리에 도착한 피카소는 프랑스어도 못해 고생을 많이 하면서 방황을 했지만, 몇년이 지나 화가로서 이름을 얻은 그는 왕성한 창작력과 함께 '화려한 여성 편력'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등장하고, '여자가 바뀔 때 마다 그림의 화풍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여자와 그림에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영감은 그 여인들과의 열정에서 얻어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높이 22cm 에디션 261/300 1959

피카소는 생전에 7명의 여인과 결혼을 하거나 동거를 했습니다. 물론 중단중간에 잠시 사위었던 여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첫번째 연인은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인으로 피카소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스무살 때 만나 사랑을 했는데 그녀는 '야성형 여인'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현대미술에서 입체파의 출현을 알리는 작품으로, 그때까지의 그림이 평면적 관점에서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기하학적인 입체감을 표현한 새로운 표현방식이라, 당시의 많은 화가들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그는 첫번째 연인인 페르낭드를 위해 1908년에 <부채를 든 여인>을 그렸습니다.


높이 31.5cm 에디션 500 1955

피카소의 두번째 연인은 에바 구엘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청순가련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매우 정열적으로 사랑을 했습니다. 1912년 피카소는 에바를 위하여 <옷을 벗은 에바>를 그렸는데, 그녀가 병이 나자 그는 잠시 다른 여인을 사귀어, '여자가 곁에 없으면 못 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하게 여자에게 집착을 했습니다.


높이 735 mm 에디션 29/75 1951

피카소의 세번째 연인은 발레를 하는 올가 코홀로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귀족적 풍류를 즐겼고, 피카소는 그녀를 따라 파리의 상류사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추구하던 입체파 풍의 그림을 버리고 '상류사회 사실주의' 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친구들에게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피카소는 1917년 다른 연인들에게도 그랬듯이 그녀를 모델로 해서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떠났습니다.


SERVICE VISAGE NOIR> 지름 24.5cm 에디션 100 1948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는 '천진난만형' 여자로, 피카소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을 때 만났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입곱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그의 연인들 중 그녀를 가장 많이 그렸는데, 1930년에 그린 <꿈>과 1939년의 <팔꿈치를 기댄 마리 테레즈>가 대표적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한명 낳았지만, 그녀가 너무 천진난만해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훌쩍 떠났습니다.


36.5 by 18.5cm 에디션 66/100 1955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는 '지성형' 여인으로, 피카소가 파시즘과 투쟁할 때 만난 여인입니다. 그녀는 1937년,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게르니카>를 그리는데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게르니카>는 히틀러가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을 돕기 위해 바스크라는 작은 마을을 융단폭격해 7천명의 주민 중 1천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독재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표작입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당시 연인이던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한달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또 다른 여인을 만나 그녀에게서 떠났고, 그녀는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에 이르렀습니다.


375 by 310 mm 에디션 400 1953

위의 그림은 피카소의 여섯번째 연인 프랑스와 질로인데, 그녀는 '피카소의 연인'들 중 유일하게 피카소를 버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스물 한살 때인 1941년 피카소를 만났는데, 법학대학을 나왔지만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라 법학을 포기하고 미술 석사 과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했고 그녀의 부모는 딸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피카소와의 연애를 심하게 반대했지만, 그녀는 1944년 집을 나와 63세의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그녀의 친구와 바람을 피자, 그녀는 피카소에게 결별을 선언합니다. 피카소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여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황하여 '네가 떠나면 나는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바로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피카소 호적에 입적시켜, 그가 사망한 후 많은 유산을 상속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떠났는데도 피카소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훗날까지 그녀의 모습을 그렸으니, 이것이 피카소의 인간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지름 35.5cm 에디션 72/100 1962

위 그림의 여인은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자 부인인 쟈클린 로끄로, 그의 남은 여생을 행복하고 편하게 해준 헌신적인 여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로부터 버림도 받지 않았으니 그가 만난 여인 중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피카소가 80세 때인 1961년에 젊디 젊은 쟈클린과 결혼신고를 하자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는 앞을 다퉈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세상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잘 살려서 피카소가 도자기 그림에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말년에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도자기 그림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카소의 말년을 함께한 쟈클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에게 남겨져있던 상당수의 도자기 그림들을 피카소가 첫 전시회를 열었던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에 기증해서 헌신적인 남편 사랑을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줬습니다.


지름 45 cm. 에디션 16/200 1957

피카소는 이렇게 자신의 예술혼을 활짝 펼치며 세상을 품었습니다. 데상에서 시작해서 유화, 조각, 판화, 도자기 그림 등 모든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원없이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에 하늘을 향해 날았습니다.
뱀의 다리 : 현재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 가격은 한점당 5천 ~8천 달라정도 합니다.

음악정원|예인스

Beethoven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Carlos Kleiber & Concertgebouw Orchestra 1983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4/4박자, 도입부를 가지는 소나타형식

제 2악장 Allegretto 2/3박자, 론도형식

제 3악장 Presto 3/4박자, 트리오를 2번 낀 스케르초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2/4박자, 소나타 형식

작품개요 및 배경

이 곡은 1811년 가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완성되었다. 그 전 교향곡인 6번(1808년 완성) 작곡 이후 3년 이상 교향곡 작곡에서 멀어져 있던 셈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된다. 먼저 1809년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이 빈을 피해 도망을 가 베토벤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창작이 생각되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해 11월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 다시금 연금을 받을 수 있게되고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1809년 무렵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을 알게된다. 1810년 베토벤은 테레제를 위해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 하였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등으로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811년에 접어들어 베토벤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테프리츠로 간다. 이 곳에서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다음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은 테프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교향곡 7번 작곡에 반영되었다. 사실 1811-1812년의 작품은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밝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곡과 초연

베토벤의 스케치 북에 의하면 제 7번 교향곡은 늦어도 1811년에 착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12년에 들어와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제 2악장의 스케치는 이보다 앞선 1806년 현악사중주 작품 59-3의 작곡중에 발견된다는데 아마도 처음엔 이 현악사중주에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 곡의 완성은 1812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라고 적혀있는데 몇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리된다. 베토벤은 1813년 2월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비공개의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공개초연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빅토리아 회전과 웰링턴의 승리> op. 91과 교향곡 8번 op. 93도 같이 초연되었다.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향곡 7번보다 <전쟁 교향곡>이 더 큰 인기를 받긴 했지만 7번도 대호평이었으며 선율이 아름다운 제 2악장은 앙콜을 받기까지 했다.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7이 너무 인기가 높아서 결국 4일 뒤인 12월 12일에 재연되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때마다 제 2악장은 앙콜되었다고 한다. 초연부터 대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곡의 대중성을 그대로 들어내보이는 것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곧 익숙해지는 악상 (2악장)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넘치는 위트 (3악장)와 무엇보다도 광란에 넘치는 1악장과 4악장의 매력이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유명하지만

그중 교향곡 7번은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자극적이고 광란에 넘치며 흥분시키는 베토벤 교향곡 7번..

베토벤의 9개 교향곡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하겠지만 교향곡 7번은 베토벤 교향곡을 하나만 꼽으라는 설문조사에서 높은 득표를 보일 만큼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베토벤은 일찌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라고 했다하는데 그의 수많은 걸작중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그의 7번 교향곡이다. 정말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예외없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또한 술에 취했을 때마냥 용기에 넘치는 힘을 느끼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곡이다. 이곡의 1, 4악장을 가르켜 베토벤이 술에 취해서 작곡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훗날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비꼬았다고 하는 데 이는 '술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틀리듯이 어리석은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말을 돌리면 건강한 취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앞뒤로 꽉 막힌 분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리스트가 이곡을 가르켜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교향곡 7번에 대해 바그너는 [춤의 성화(聖化)]라고 하면서 밝고 명쾌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의 주장에 대한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교향곡 3번이 귓병에 대한 절망을 떨치고, 5번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작곡하였다면, 7번은 전쟁과 실연을 극복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구성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4/4박자, 도입부를 가지는 소나타형식
도입부 전체 관현악의 투티(f)로 시작되서 침착하게 pp로 상승하는 음계가 길게 이어지다 크리센도 되면서 최초의 관현악 폭발은 ff로 이뤄진다. 이어 오보에에 의한 노래이후 다시금 관현악은 ff로 폭발하고 이를 수반한 현의 상승은 관들의 sf로 장식되어진다. 뒤이어 비바체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제시부 - 제 1주제 플룻과 오보에에 의해 1악장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리듬이 제시되고 곧이어 플룻이 경쾌한 제 1주제를 노래한다 . 목관에서 바이올린으로 주제가 옮겨지면서 이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참여하여 호른과 바이올린은 제 1주제를 트럼펫과 팀파니및 저음현은 리듬을 노래한다 . 이후 미쳐서 날뛰는 듯한 양상이 되어 간다.
- 제 2주제 플룻과 제 1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제 2주제 역시 역동적인 것이다. 곧이어 겹8분 음표들로 구성된 리듬 부분을 거친후 클라리넷-바순-오보에-플룻으로 이어지는 크리센도후 ff로 종결부로 이어진다.
- 종결부 관악기와 팀파니에 의해 앞서 언급한 그 리듬을 ff로 계속 연주하다 제 1주제에 맞춰 신경질적으로 거듭되는 ff로 제시부를 맺는다. 이 제시부는 악보에는 반복표시되어있으나 70년대 이전 녹음들은 대부분 반복은 생략한다.

전개부 앞의 리듬을 철저히 되풀이하면서 발전되어나가다가 254째 마디에서 트럼펫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클라이막스를 만든후 현에 의해 추스러진다음 재현부로 이어진다.

재현부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충실히 재현한 후 다시 1악장의 리듬에 의한 강한 클라이막스를 ff로 만든 후 p로 음량을 갑자기 줄인 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주요 리듬과 제 1주제로 장쾌한 코다를 만든후 화려하고 통쾌하게 끝을 맺는다.

◆제 2악장 Allegretto 2/3박자, 론도형식
제 1 주제부 목관부가 2마디를 화음으로 울려 안정감을 준뒤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끌리는 듯한 주제를 제시한다. 곧 애수를 띈 이 주제 위에 비올라와 첼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한다 . 이후 이 두가지 흐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목관도 참가하야 크리센도 되다가 금관과 팀파니가 ff로 참가하고 클라이막스를 이룬 후 점점 여리게 잦아든다.
제 2주제부 클라리넷과 바순에 의한 온순한 선율이 제 2주제를 담당하고 현이 크리센도로 참가하면서 금관과 목관이 ff로 주고 받으면서 제 1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제 1주제부 (푸가에 의한 작은 전개부 붙임) 앞서의 제 1주제와 선율이 동시에 나타난다.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으로 푸가토풍으로 발전되며 수를 늘려가다 끝에 ff로 투티하고는 종결부로 들어간다.
제 2주제부 (재현) 종결부는 제 2주제부를 재현되다가 코다부분으로 발전된다.
제 1주제부 (최후 제시) 제 1주제를 최후로 들려주면서 마친다.

◆제 3악장 Presto 3/4박자, 트리오를 2번 낀 스케르초
스케르초 주제 갑자기 f로 떨쳐버리듯 거칠게 되풀이 되다가 p로 급변한 주제로 시작된다. 곧 크리센도 되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동시에 사분음표 9개의 리듬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시원한 분위기를 만든후 사분음표 3개의 리듬을 확인시키면서 트리오로 넘어간다. 스케르초를 반복하도록 지시되어있으나 역시 1악장의 제시부처럼 반복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트리오 트리오는 템포가 느려지면서 클라리넷이 노래하는 선율을 기초로하고 있다. 후반부의 큰 클라이막스 이후 다시 스케르초로 넘어간다가 다음과 같이 트리오를 거쳐 다시 스케르초로 돌아온다.
스케르초 주제-재현 트리오 재현-스케르초 주제 반복 후반부에는 프레스토로된 4마디의 ff부분이 종지의 화음을 4번 울린 후 이내 끝난다.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2/4박자, 소나타 형식
제시부 먼저 강하게 4악장의 주제 리듬을 제시해본 후 총휴지, 다시 이를 반복한 후 미친 듯한 제 1주제로 돌입한다. - 제 1주제 바이올린에 의한 제 1주제는 약박에 sf가 표시되어 있고 이와 함께 sf로 관악기들이 강하게 찔러준 다음 관에 의해 4악장 주제 리듬이 제시된다 . 이 리듬은 곧 금관과 팀파니를 위주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 제 2주제 f로 끝맺은 제 1주제부에 이어 단조로 전조된 제 2주제가 바이올린에 의해 제시된다.
- 종결부 ff로 모든 관악기들이 거침없이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가면서 4악장의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전개부로 넘어간다.

전개부 전개부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져 있고 역시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재현부로 넘어간다.

재현부 재현부에서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재현한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코다는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선율을 주고 받는 가운데 팀파니와 트럼펫이 f로 찔러주면서 점점 긴장을 고조시켜 나가다가 ff로 일단계 폭발이후 결국 fff로 최고조에 이른후 다시 크리센도를 거쳐 두번째 fff로 이어진다. 곧 ff로 모든 관현악의 투티로 장대하게 끝마친다.

2004년 7월 타계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우리에겐 낯설고 생소하지만 음악계에선 카라얀 이상으로 평가받는 지휘자다. 그가 죽자 음악계는 거장 지휘자의 세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평했다.
클라이버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건 카라얀과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라얀은 상업적이고 미디어 지향적, 대중 지향적이었다. 돈이 되면 지휘봉 들고 흔드는 것쯤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라이버는 달랐다. 세상이나 자기 PR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기록이라는 명언처럼, 음반을 낸 적도 드물다.
카라얀이 비정하리만큼 차갑다면 클라이버는 가족을 위해서는 지휘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단원을 이끄는 방식도 독재적인 카라얀에 비해 클라이버는 민주적이고 예의가 넘쳤다. 그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은 평생에 만난 최고 지휘자로 평가했고 그의 음악을 들어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버는 어느 누구보다 리허설을 많이 했다. 악보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은 독보적이었고 음악에 대한 열정, 지식, 경험의 삼위일체에 모두 감탄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워낙 사생활을 드러내기를 꺼렸던 지라 한국 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현지에서도 그동안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작년에 독일에서는 알렉산더 베르너라는 저널리스트가 집필한 최초의 클라이버 전기가 출판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클라이버만을 다룬 최초의 단행본인 것은 아닙니다. 재작년에 뮌혠 대학교의 옌스 말테 피셔 교수가 얇은 비평적 성격의 책을 낸 이후로, 클라이버에 관한 단행본으로는 독일어권에서 2번째로 출판된 책이지요.)
베르너의 전기는 클라이버라는 인물의 음악 연주사적, 지휘사적 의미나 그의 음악 해석에 대해 나름의 비평적 시각에서 쓴 책은 아니라서 '평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동안 상당히 베일에 싸여 있던 그의 생애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고 사실관계를 자세히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어서,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독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밑에 적는 글은 전적으로 이 책을 토대로 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려서,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제의를 거절했다"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카라얀 사후, 새로운 상임 지휘자 투표를 앞두고 대다수의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클라이버를 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의중을 떠본 결과 아무래도 거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되어, 하는 수 없이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투표 과정에서는 클라이버가 후보에서 "공식적으로는"배제되었지요.
그러나 그랬음에도 실제로 투표 과정에서는 클라이버에게 표를 던진 베를린 필 단원들이 많았습니다. 득표수만 놓고 보면, 클라이버가 압도적으로 1등이었지요.
그러나 클라이버의 표가 가장 많이 나온 선거 결과는 '무효'로 선언되었고, 그는 '선택'은 되었지만 '선출'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전기를 토대로 전후사정을 좀더 자세히 정리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카라얀이 죽고 새로운 상임 지휘자를 선출해야 했던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클라이버는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단원들의 심적인 분위기가 클라이버 쪽으로 흘러갔던 주된 이유는 독일 연방 대통령이 주최하는 자선 음악회에서 자신들을 지휘한 클라이버에게 엄청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햐르트 폰 바이쯔제커는 대통령이 주관하는 자선 음악회를 정례화시켰고, 이후 이 '자선 음악회'는 후임 독일 연방 대통령들이 주관하는 여러 행사들 가운데에서도가장 중요한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잡았지요. 저도 몇 년 전 당시의 대통령이던요하네스 라우가 주최하는 자선 음악회에서 래틀이 지휘하는 브루크너 9번 교향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그래서 당시 단원 대표였던 알렉산더 베도우와 클라우스 호이슬러는 클라이버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뮌혠에 있는 클라이버의 자택으로 찾아갔습니다.
이 전기의 집필자 알렉산더 베르너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 단원들과 관계자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전말을 재구성해놓았지요. 그중 당시 클라이버를 직접 찾아갔던 베도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호텔에서 그와 만나, 오페라 극장 근처에 있는 그의 단골 선술집으로 갔습니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클라이버가 결코 상임 지휘자 추대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우리 동료들은 그가 수락하리라고 믿고 있었지요. 클라이버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깊은 인상을 주어서, 심지어 그에게 음반 녹음 기피증이 있다는 것도 그를 추대하는 데 전혀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천재였고, 다른 시대에서 온 지휘자 같았습니다. . . . 그는 자기는 레파뚜아가 너무 좁아서 상임지휘자로는힘들다고 이유를 댔지요. 저는 그 후에도 클라이버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을 것입니다. . . .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공간은 클라이버에게는 너무 현대적이었고 객석은 단상에서 너무 가까웠습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제의를 거절했다"는 말에 대해"예, 아니오"로 대답하기 힘든 이유는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의 상임 지휘자 투표 절차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을 경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2사람으로 2차 투표를 벌이는 식의 복잡한 절차는 여러 나라의 공직자 선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는 예비 투표도 있었지요.

당시 베를린 필의 단장이었던 한스 게오르크 셰퍼는 이 예비 투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
모두가 자기가 좋아하는 지휘자를 순서대로 적어 내야 했지요. 그러면 그걸 가지고 비교를 하는 겁니다. 단원 대표가 클라이버는 가망이 없으니 논외로 하자고 분명히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클라이버를 1순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예비 투표가 무효가 되어버렸지요."

다음 글은 전기 집필자 베르너의 글을 직접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를린 랑크비츠 구에 있는 지멘스 빌라에서 정식 투표가 열렸다. 1차 투표에서도 적지 않은 단원들이 클라이버를 1순위로 적어냈고, 로린 마젤이 그 뒤를 이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도 순위에 들기는 했다. . . . 투표는 다시 무효로 선언되었다. 클라이버는 아직도 단원들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단원들은 토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른 주자 게르트 자이퍼트는 설사 클라이버가 추대를 수락하지 않더라도 자기는 클라이버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클라이버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니 그가 선출되었다고 하면, 다른 지휘자들도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 거고, 설사 클라이버가 추대를 거절해서 다음 순위의 득표자를 다시 추대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당사자는 역시 그리 기분 나빠 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악장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베를린 필 단원들 대다수가 처음부터 클라이버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지휘자들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클라이버를 놔두고 다른 사람을 선출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거기서 모욕감을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스타브라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클라이버를 선출하고 그가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면, 그런 일은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 전설적인 솔로 트롬본 주자 크리스트하르트 괴슬링 같은 이는 (이 사람은 지금은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의 학장이기도 합니다)당시 단원들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겪은 고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아주 격심한 오케스트라 세대 교체를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악단을 꾸준히 돌볼 지휘자가 필요합니다. 클라이버가 군계일학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면 악단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최소한 객원 지휘자로라도 부르려고 시도했었지요."
의견이 분분한 논의를 거쳐 결국 단원들은 다시 2차 투표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젤이 되리라는 예상을 깨고 아바도가 마젤을 득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앞서 선출된 것은 이 2차 투표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아바도가 음반사와 체결한 음반 취입 계약 건수가 마젤을 갑자기 월등하게 앞지르게 되었다는 점이 선출의 주된 이유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의 일들은 다들 아시는 내용일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클라이버는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직을 "공식적으로" 제의 받은 적은 없습니다."공식적으로는" 선출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거절"했다는 것은 내용상, 정황상 맞는 말로 보아야 하겠지요.
<출처: 고클래식, dahlemdorf님>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추억하는 헨리 포겔의 글
헨리 포겔|음악 평론가, 미국 오케스트라 연맹 CEO

돌이켜봤을 때,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실제로 지휘하는 모습을 보려 했다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정작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지휘자, 그러나 부인할 수 없도록 세계 음악계에 우뚝 솟은 지휘자가 지난 7월 74세의 나이로 별세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20세기 음악계에서 가장 이상한 수수께끼의 주인공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지휘자가 거의 지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젊은 카를로스는 지휘자로서의 커리어 초창기부터 연주회 무대에 서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주회는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매번 자신의 지휘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완벽의 사운드, 그에 걸맞는 해석을 이루지 못하면 지휘대 위에 설 가치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카를로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를 부친인 위대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탓으로 돌린다. 지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성격의 그는 아들의 지휘에 대해 아버지다운 뒷바라지가 부족했고, 그로 인해 카를로스의 불안정한 성격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카를로스가 지휘하기에 앞서 구토를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85년, 내가 시카고 심포니의 행정수석으로 부임했을 때 클라이버는 이미 1980년대 초반을 통틀어 가장 볼만했던 두 주 동안의 예약제 콘서트(Subscription Concert)에서 지휘하고 떠난 뒤였다. 시카고 심포니의 청중들과 위원회 회원들, 행정 관리들, 그리고 연주에 직접 참여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로부터 그 콘서트가 얼마나 격조 높고 훌륭했던지 듣고 또 들었다.
음반으로 만들어져 살아남은 하루분의 연주를 제외하고는 이 당시의 연주를 직접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시카고 심포니에 다시 초청한다면 소문의 명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시카고에서의 연주(1978·1983년)는 카를로스가 미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유일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카를로스는 연주에 만족했고 많은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생의 20년 동안 그는 은둔하면서 세상의 모든 초대를 거부하며 살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존재를 유일무이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의 아버지보다도 더욱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인은 그의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가 음악의 거인들이 군웅할거하던 시대에 지휘했다는 점일 것이다. 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멩겔베르크·클렘페러·발터· 비첨·몽퇴·스토코프스키·미트로풀로스·쿠셰비츠키·크라우스·크나퍼츠부쉬 등등, 당시 세계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자들로 가득했었다. 대놓고 할 수는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즘은 그 시대와는 다르다. 약 40년 전쯤부터 지금까지 거장 부재의 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됐다는 분석이다.
몇 가지 경우 그의 음악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나 또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해석할 때 그가 사용하는 베버식의 접근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거기에 참되고 설득력 있는 음악적 개성이 존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카를로스는 음악계로 비교적 서서히 진입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자란(나치를 피해 이주한 부모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공부했지만 1949년 취리히로 가서 화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50년 남미로 돌아와 음악을 공부한다. 1951년 21세의 카를로스는 독일 오페라하우스의 코치가 됐고, 1954년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이런 그의 전력과 ‘클라이버’라는 이름의 상충된 감정은 그가 데뷔할 때의 가명인 카를 켈러(Karl Keller)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 후반쯤부터 카를로스는 드디어 자신의 이름으로 지휘했고, 1960년대부터는 그의 명성이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오페라극장에서 유명해졌다. 1970년대 중반, 카를로스는 바이로이트의 스타로서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로덕션을 지휘했다. 이 당시의 실황은 해적 음반으로 보존됐는데, 나중에 그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지나치게 공들인 듯한 스튜디오 레코딩보다도 훨씬 선동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해석이다.
1970년대에 클라이버의 명성은 교향악 분야에서도 드높아졌다. 그 명성은 위대한 지휘자로서, 그리고 괴벽스러운 지휘자로서, 두 가지 모두를 의미했다. 그는 장시간의 리허설을 요구했고 느닷없이 잇달아 계약을 취소하곤 했다. 그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결코 예상치 못했던 것까지 다양했다.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연주에 대해 언론의 혹평이 나오자 그는 런던에서는 다시 지휘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 뒤로는 정말로 런던에서 지휘하는 카를로스를 볼 수 없었다.

1980년대에 그는 레퍼토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손에 꼽을 정도로까지 연주곡목을 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에로이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소한 그가 유명해지고 난 뒤 전성기 때 그것을 들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베토벤을 매우 제한적으로 연주했다. 교향곡 4번, 5번, 7번 정도. 다른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버가 조금이라도 연주를 했다면 그 작곡가는 행운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런 기벽과 함께 사람들로부터 달아난 것일까. 그리고 왜 세상이 그에게 지휘를 간청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의 도입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카를로스가 지휘하던 시대, 지휘자들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몰개성의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 단조로운 음악의 장에 개성적이면서 압도적인 힘과 통찰력을 지닌 음악가 클라이버가 등장한 것이다.
세계인들은 1975년에 그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도이치 그라모폰이 그의 고전이랄 수 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발매한 것이다(빈 필과 1974년에 레코딩했다). 모든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레코딩이었다. 나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뉴욕의 시라큐스에 위치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국의 오너이자 PD로 재직 중이었다. DG에서 온 LP의 포장을 처음 뜯을 때 나는 비아냥거렸었다 “오, 우리가 원하던 그것이군. 또 하나의 베토벤 5번이라니!” 그리고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었다.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때 이 음반의 첫 감상은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레코딩은 여전히 동곡의 스테레오 녹음 중에서 최고 명반 중 하나이다(역시 굉장한 연주인 베토벤 교향곡 7번과 함께 커플링된 CD DG 447 400-2로 구할 수 있다).
이 레코딩이 특별한 이유를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악기 간 밸런스의 디테일, 화음의 조율을 향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집중력과 명료한 텍스처, 완벽한 템포, 상쾌한 어택음과 프레이징의 호흡 등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양상들과 더불어 거기엔 악기들의 질주나 강렬함 같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단원들이 그들의 인생을 건 듯한 연주다. 현은 부지런히 활을 긋고 있으며 목관은 불타는 듯 격렬하게 음을 내고 있다. 금관은 다른 악기들이 궤도를 잃지 않게끔 배려하면서 파워풀하게 포효한다. 이 음반을 들으면 베토벤이 작곡했을 당시 초연됐을 때 청중이 받았을 충격을 함께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클라이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에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단원들은 세부까지 놓치지 않고 듣는 카를로스의 놀라운 귀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악 주자들은 무대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더라도 카를로스는 그들이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똑똑히 듣고 있었음을 확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카를로스가 현악 주자들에게 ‘자유로운 보잉’을 권했는데, 그것은 디테일을 강조하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측면이었다고 한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지휘할 때 쓴 바 있는 ‘자유로운 보잉’이란 말 그대로 활을 쓰는 방식을 연주자들 각자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그 대신 활을 올릴 때와 내릴 때 방향을 일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스토코프스키는 한꺼번에 활을 바꾸면 음악적인 흐름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클라이버는 스토코프스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보잉을 모두 계산해서 적어 두었다. 다시 말해 청중들에게는 활을 올려 긋고 내려 긋는 것이 단원들의 자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실은 클라이버가 각각의 스트링 파트에 서로 다른 보잉을 명시해 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정되고 정확한 디테일을 끄집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프랭크 밀러는 이에 강력히 반발해서 악보 사서들은 첼로 파트 악보를 그로부터 지켜야 했다. 걸핏하면 클라이버의 보잉 지시를 삭제하고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을 적어 놓곤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클라이버는 즉시 시카고를 떠났다고 한다.
지난 50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모든 객원 지휘자들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의 악단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을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클라이버다.

위에 언급한 대로 베토벤 CD 외에도 카를로스의 재능의 전모를 드러내는 레코딩을 약간 더 찾아볼 수 있다. 골든 멜로드람 레이블에서 발매된 4장으로 구성된 세트(GM 4.0043)에는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실황이 수록돼 있는데 슈베르트 교향곡 3번, 버터워스의 ‘영국 목가’ 1번, 그리고 뜨거운 베토벤 교향곡 5번이 담겨 있다. 이 세트에는 또한 슈투트가르트·쾰른 ·빈 등에서의 연주도 들어 있는데, 보로딘 교향곡 2번, 하이든 교향곡 94번,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이 그것이다. DG의 베토벤 5·7번과 함께 클라이버 지휘의 관현악곡을 섭렵하는 데 필수적인 음반이다.
그는 DG에서 몇 편의 뛰어난 오페라 음반을 녹음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두 편의 오페라는 모두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1970년대 라이브 레코딩이다.

첫 번째는 플라시도 도밍고·미렐라 프레니·피에로 카푸칠리의 ‘오텔로’(1976)이다. 도입부의 폭풍우 장면부터 불을 뿜는 연주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저변에 깔린 운명과 비극을 의식하고 그 불가피성의 관성으로 오텔로의 죽음 장면에까지 몰고 간다. 이 연주는 뮤직 앤 아츠 등 여러 레이블에서 발매됐다(내가 가진 것은 Exclusive EX92T 08/09이다). 이보다 더 인상적인 음반은 푸치니의 ‘라 보엠’이다. 이 연주 역시 몇몇 레이블에서 발매됐다(역시 Exclusive 음반으로 가지고 있는 EX92T 01/02). 이 1979년 연주에는 파바로티·코트루바스· 카푸칠리 등이 노래했으며, 무제타 역에는 루치아 폽이 분하고 있다. 내가 들었던 연주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캐스팅이다. 당신이 ‘라 보엠’에서 원하던 모든 것들이 여기 있다. 다정함, 유머, 깊이 있는 열정, 비탄, 고통, 모두가 있다. 라 스칼라 필은 무엇에 홀린 듯이 연주하고 있고, 클라이버는 스타 가수들을 녹여 하나의 앙상블로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서 파바로티는 배역을 노래하는 파바로티가 아니다. 처음으로 자신이 로돌포 자체가 되고 있다. 그의 미미와 또 다른 등장인물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파바로티는 진정으로 배역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클라이버는 이 같은 분위기를 소중하게 유지시키며 파바로티를 향한 찬사를 대신하고 있다.
향년 74세.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죽음은 모든 음악 애호가들의 슬픔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너무나도 드문 진정한 거인을 잃었다. 더욱 슬픈 것은 지난 20년 동안 그의 무대가 너무나 드물었고, 그로 인해 그가 남긴 유산의 폭과 범위가 더욱 축소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천재가 남긴 음악을 길이 향유할 수 있음을.
브라보!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마이뉴스 정윤수 기자]'헤이리 음악 소풍' 때문에 베토벤의 음반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번 주말 예정인데, 실은 사회학자 김종엽 선생에게 '모짜르트 소풍'을 부탁하였으나 원고 사정으로 연기되고 내가 대신 맡은 것이다. 이 일도 원래는 음악평론가 강헌 선생의 몫이었으나 그는 지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다.
대책없이 떠맡고 나서 베토벤 음반을 정리하던 중인데, 아뿔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6일, 모친의 고향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한 그는 역시 슬로베니아 출신인 아내의 묘지 옆에 지난 10일 안장됐다고 한다. 향년 74세.
그리하여 몇 자 적는다.

클라이버를 위하여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대척점에 있던 카라얀이다. 20세기 후반의 클래식에 있어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만한 카라얀의 생애는 확실히 은둔자 클라이버와 거리가 있다.
카라얀은 클래식이 20세기 전반기의 '실황 연주'에서 세련된 녹음과 '스타 마케팅'으로 옮겨가는 지점을 절묘하게 파악했으며 이를 그 누구보다 최상의 수준에서 활용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자신의 지휘하는 장면을 녹화했으며 최첨단의 스튜디오에서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수십차례 녹음했다. '클래식=카라얀'이라는 음반 마케팅의 공식을 그는 입증하였다.
반면에 클라이버는 스튜디오 녹음 대신 연주회장의 라이브를 절대적으로 존중하였다. 그의 음반은 손을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라이브를 녹음한 것이다. 감상자에게는 불과 대여섯 장만 구입해도 되는 뜻밖의 기쁨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조금이라도 빈 틈이 보이면 녹음은 물론 실황 연주마저 취소했으며 음반 산업자와 언론의 관심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두 번째 인물,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카라얀에 비해서도 음악사적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는 멩겔베르크나 푸르트뱅글러처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시대의 지휘자로 현재 들을 수 있는 그의 음반은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히틀러의 전성 시대. 모차르트 오페라에 있어 불멸의 유산을 남긴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러나 히틀러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예술가에 대한 탄압에 절정에 이른 1935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 '칼'의 이름을 아버지는 남미식으로 '카를로스'라고 바꿔버렸다. 파시즘에 대한 뼛 속 깊은 저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대신 카라얀의 시대가 열렸다. 푸르트뱅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 파시즘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독일 음악의 유산'이 카라얀에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인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등장한다. 독일 음악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인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남았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중에야 몇몇 기록과 증언에 의하여 복권되지만 그가 베를린 필에 다시 서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스튜디오 녹음이 서서히 대세를 확보해가는 시절에 푸르트뱅글러는 오로지 '라이브'을 고집하였으며 복권 후 몇 해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적 제사장으로 최후의 명연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의 운명은 카라얀 쪽으로 기울었다. 1933년에 나치에 입당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빈 국립오페라극장, 베를린 필 등을 독점하다시피 한 카라얀은 그러나 놀랍게도 47년에 해금되었으며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전성기를 열었다. 클래식이 '레코딩' 산업과 판촉 활동을 겸한 연주회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월터 레그는 레코딩 전문악단 필하모니아를 설립해 카라얀에게 맡겼고 이후 카라얀은 스튜디오 시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죽고 말았다. 푸르트뱅글러는 한사코 '히틀러 군악대장'에게 독일 음악의 유산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도 카라얀과 대척에 섰으나 그마저도 56년에 사망하고 만다. 남은 사람은 브루노 발터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콜럼비아 교향악단으로 명연을 남기고는 역시 노환을 이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5년에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직까지 맡아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그 무렵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1974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통해 뒤늦게야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그는 단 한번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을 2년 쯤 맡은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상임이나 무슨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뮌헨, 빈, 류블랴냐 등의 교향악단과 연주를 했지만 전속은 맺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휘자였고 음악가였다. 89년에 카라얀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정작 클라이버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세상 밖에 머물렀다.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 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클라이버의 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대신 카메라, 마이크, 음향 설비를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을 그는 기피했다.
어쩌면 카라얀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말일 수도 있다. 뛰어난 지휘자이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연출자이자 20세기 음반산업의 마케팅 팀장이기도 했던 카라얀에 비하여 어쩌면 클라이버는 19세기에 형성된 서구 클래식의 마지막 정통파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악의 주술적 요소를 존숭했다는 점. '라이브'가 갖는 일회적인 엄숙성, 피날레가 끝나면 박수에 묻혀 영원 속으로 저장되는 '실황 연주'의 숙명에 대하여 클라이버는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에 불려가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지휘해야만 했던 푸르트뱅글러가 일체의 스튜디오 녹음을 거절한 것처럼 클라이버는 적어도 베토벤에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의 현장성과 일회성, 요컨대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영원히 소멸하고 마는, 그러나 단순히 '공기의 흔들림'으로 그치지 않고 부채꼴의 연주자와 말굽형의 관객들 사이의 한 정점에 서서, '영원 속으로 소멸'하는 음악적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그는 맡았던 것이다.
클라이버의 불가피한 선택은 틀림없이 음악 산업이라는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음악적 가치와 명성은 높아졌으며 은둔할수록 세상은 더욱 그를 원했다. 관습적인 데뷔, 상투적인 레코딩,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연주회 등으로 오늘날 클래식 산업은 오히려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는데 그 화려한 패잔병들 틈에 끼지 않고 클라이버는 은둔과 사색의 만년을 선택했던 것이다.
몇 장의 음반만 남기고 그는 떠났다. 당연히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음반이 아니라 세속을 거절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예술가'로 버틴 그의 생애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이채롭게도 제작사인 '오르페오'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제 듣게 될 4악장의 마지막 대목과 열렬한 박수는 고인이 된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이 세속 도시의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장송이 될 것이다. 정윤수 기자

내가 접했던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연주
우리와 호흡하며 살아 있었던 전설
교 미츠토시|음악 평론가, 게이오대학 부교수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초연한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였다.
젊은 카를로스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친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카를로스는 유명한 취리히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음악도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그 몇 년 뒤 그는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보수도 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포츠담·뒤셀도르프·취리히·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이따금 그는 가명으로 오페레타를 지휘해야 했다. 부친이 알면 격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972년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둔다. 이 작은 바그너 마을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3년 동안 지휘했다. 그의 ‘트리스탄’은 이 사랑의 드라마를 극도로 열정적이고 뜨겁게 만든 연주였다.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의 멤버들과 청중들에게 이 훌륭한 연주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1970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푸치니 ‘라 보엠’,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오텔로’ 등을 지휘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 기사’는 특히 명망이 높았다. 이 작품들은 카를로스의 장기 레퍼토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런던과 밀라노에서도 이렇게 세심하게 선택한 레퍼토리만을 공연했다.
클라이버는 1980년 이래 가장 센세이셔널하고 전설적인 지휘자일 것이다. 그는 단지 손으로 헤아릴 만큼 적은 수의 몇 가지 작품들, 즉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오페라들과 몇 가지 교향곡들(베토벤 교향곡 4번과 7번, 브람스 교향곡 2번과 4번, 모차르트 교향곡 34번 등)만을 지휘했다. 그는 뮌헨이든 베를린이든 빈이든 시카고든 도쿄든 그 어디에서나 이 레퍼토리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연주했다. 가끔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다른 작품들을 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베토벤 ‘전원’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등등. 그는 간혹 드물게 이들 작품을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 레퍼토리들은 연주를 준비했다 하더라도 콘서트 직전 혹은 리허설 중에 연주를 취소하기 일쑤였다. 그가 왜 그렇게 수줍음을 탔는지, 자신감이 없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위대한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로부터의 심리적인 압박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카를로스는 잦은 공연 취소로 매우 유명해졌다. 그는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본 투어나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 등 큰 프로젝트 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그는 다른 음악가들을 잘 주도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했다고 한다.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모두가 그를 초청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클라이버의 답변은 언제나 아주 비관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휘할 악단을 선택하게 됐는데,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이 그것이었다.
빈 필하모닉의 단원들에게 클라이버는 경모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빈 필을 지휘할 때 안절부절못했다. 베를린 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시카고 심포니 등 명문 관현악단들도 몇 차례 지휘를 해 본 뒤로는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했다.
죽음 예견한 사르데냐 라스트 콘서트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다른 지휘자들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콘서트홀이나 오페라하우스에서 들어 봤다면 그 차이는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를로스의 음악은 언제나 극도로 뜨겁지만 난폭하거나 거칠지 않았다. 몹시도 예민하지만 엄격하지는 않았다. 자유롭고 유동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자연스러웠다. 거기엔 언제나 두드러진 감성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는 레코딩보다는 훨씬 많은 작품들을 지휘했지만, 그는 레퍼토리의 협소성 면에서 볼 때 유일무이한 지휘자다. 가령 그는 말러의 교향곡에 매료됐었고 복잡한 스코어를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 빈 예술 주간 때 지휘한 ‘대지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말러 교향곡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점차로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잃어 갔던 것이 아닐까. 모든 단원들과 청중들이 그토록 그를 사랑했건만 1980년대 후반,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를 떠났다(그는 나중에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지만 뮌헨에서는 아니었다). 이후, 그가 어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베를린에서, 한 번은 인골슈타트(뮌헨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본사가 그곳에 있다)에서, 한 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빈에서 몇 번 지휘를 하곤 했다. 그가 연주 횟수를 줄일수록 그가 벌어들이는 액수는 커져 갔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를 아주 희귀한 보석들과 동일시했다.
커리어 말기인 1998년과 1999년에 카를로스는 카나리아 제도와 사르데냐 섬에 나타났다. 둘 다 작렬하는 태양과 푸른 바다가 있는 전형적인 유럽 남쪽 지방의 섬이다. 이 두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카를로스의 모든 공연 계획은 전면 취소됐다.
1983년부터 1999년까지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와 오페라들을 다수 관람했다. 그는 내게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내가 음악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카를로스 클라이버 때문이다. 18세 때 뮌헨에서 그의 ‘장미 기사’를 관람했을 때였다. 얼마나 섬세하고 정력적이며 화려하고 도취적인 연주였던지. 마치 꿈을 꾸는 듯 느껴졌었다.
이후 나는 카를로스에 심취했고, 열광했다. 그러나 그건 단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 심지어는 전문가들조차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열중했던 것이다. 가령 현재 가장 저명한 지휘자 중 하나이며 원전연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프란스 브뤼헨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유일한 음악가”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궁금하다면 베버 ‘마탄의 사수’의 서곡과 그 이후의 음악 전개를 들어 보라. 아마도 당장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드라마틱한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연주를 들어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푸르트뱅글러에 비견하곤 한다.
사르데냐에서 카를로스의 라스트 콘서트를 참관했을 때, 그는 늙고 지쳐 보였다. 음악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상적이지 못했다. 들으면서 내내 ‘카를로스는 이제 스스로 은퇴하겠구나 혹은 운명에 의해 사라지겠구나’ 하고 예감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정말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클라이버의 연주가 담긴 방송 녹음들과 CD 제작자들이 많이 존재하리란 점이다. 카를로스는 이 녹음들의 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첼리비다케가 그러했듯이 이 녹음들은 곧 음반 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더불어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음악가였다. 동시대를 호흡하며 전설의 반열에 오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류태형 기자(mozart@)

|?음반으로 남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유산
레코딩 완벽주의자가 남긴 진정한 명품
이영진|음악 칼럼니스트

“나에게 있어 녹음 발매를 허락하는 것은 일종의 공포감을 수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라 고백했듯 클라이버는 평생토록 레코딩 기피증에 시달렸다. 음악적 완벽주의에 신경과민증 성격이 더해져 기인한 것이리라. 그래도 스튜디오반과 영상물, 몇 종의 비정규 앨범을 합치면 거장이 지휘했던 레퍼토리 대부분을 섭렵할 수 있다. 먼저 관현악 장르. 제일 중요한 작곡가는 베토벤으로 교향곡 4·5·6·7번을 연주했다. 1974년에서 1976년 사이 빈 필과 녹음한 ‘운명’ 및 7번(DG)이 상쾌한 스피드감으로 장전된 명반. 1982년 카를 뵘 추도 콘서트 라이브인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4번(Orfeo)도 다이내믹하고 폭발적인 열연이다. 1983년 로열 콘서트헤보를 지휘한 4·7번 영상(Philips)에서는 신명 나게 바통을 휘두르는 클라이버의 춤추는 듯한 자태를 볼 수 있다. 반면에 작년 말 발매된 1983년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6번 실황(Orfeo)은 좋지 못한 음질로 논란이 됐다.
1980년 빈 필을 지휘한 브람스 교향곡 4번(DG)은 대담한 강약의 콘트라스트와 극적 추진력으로 작품에 신선한 비전을 부여한 역작이다. 같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슈베르트 3번 및 ‘미완성’(DG)에서도 관습의 찌꺼기가 철저히 씻겨져 있다. 스타일리시한 모차르트 ‘린츠’와 생기발랄한 브람스 2번이 커플링된 1991년 빈 필 라이브 영상(Philips) 또한 출중하다. 빈 필을 지휘한 연주라면 1989년과 1992년의 신년 음악회(Sony)를 잊을 수 없다. 유려한 프레이징, 용수철 같은 비트가 발군이다. 해석상 논쟁으로 취소될 뻔했던 1989년보단 1992년 쪽이 더 자연스럽다. 보로딘 2번·말러 ‘대지의 노래’는 부틀렉(Golden Melodram)으로만 들을 수 있는 작품. 1969년 ‘박쥐’ 서곡 및 1970년 ‘마탄의 사수’ 서곡의 리허설과 실연을 수록한 DVD(Pioneer)는 스코어의 세부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클라이버의 진지한 모습을 포착한 귀한 자료이다.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이 파트너이다. 협주곡 녹음은 단 하나. 리히테르를 반주한 드보르자크 피아노 협주곡(EMI)이 그것이다.
오페라 분야에서 인기 높은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1975년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스튜디오반(DG), 1986년 뮌헨 국립극장 실황 영상(DG),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양자 공히 약동하는 리듬과 흥청망청한 축제 분위기, 호화로운 배역진으로 꾸며져 있으나, 이 곡은 DVD로 시청하는 편이 재미있다. ‘천둥과 번개’ 폴카에 맞춰 대소동이 벌어지는 2막 피날레가 관람자를 포복절도하게 한다. 클라이버의 데뷔 레코딩인 베버 ‘마탄의 사수’(DG)도 전설적인 음반이다. 관록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자존심 드센 독일계 보컬들을 맘대로 주무르고 있다. 연주 내내 관통되는 긴장감이 특필할 만하다. 슈트라우스 ‘장미 기사’는 영상물로만 두 편 존재한다. 1979년 바이에른 국립극장 실황(DG)과 1994년 빈 국립오페라 라이브(DG)가 그들로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대단히 우미하고 화려하다. 프라이스가 주연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DG)에선 로맨틱한 관능성을 탐닉하기보다는 모던한 미감 표출에 주력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튜디오 레코딩으론 1976년에서 1977년 사이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 연주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DG)가 있다. 일레아나 코트루바스를 비롯한 캐스팅 전원이 쟁쟁하지만, 무엇보다 의표를 찌르는 듯 자극적인 클라이버의 리드가 일품이다. ‘오텔로’는 비공식 음원으로만 네 종 유통된다. 애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절찬하는 연주가 1976년 라 스칼라 극장 라이브(Music&Arts). 도밍고·프레니·카푸칠리 등 당대 최고의 명가수들이 거장이 설치해 놓은 치밀한 복선을 따라 질투와 파멸의 드라마를 처절하게 연기해 낸다. 푸치니 ‘라 보엠’ 역시 비정규 녹음이 5편. 1979년 라 스칼라에서 상연된 3월 22일 실황(Exclusive)과 30일 실황(Golden Melo- dram)이 막상막하라 전해진다.
이제 클라이버가 작고했으니 레코딩 허가의 끈을 조금은 늦출 필요가 있다. 1979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비제 ‘카르멘’, 소니에서 LD로 나올 예정이었다가 지휘자의 거부권 행사로 취소된 1993년 빈 필과의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및 R.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등은 반드시 정식 발매되어야 할 것이다. DG 측에서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브람스 4번·슈베르트 ‘미완성’·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 일부를 디스크 한 장에 집합한 앨범을 급거 출시했다. 앞으로도 거장이 남겨 놓은 명품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출처] 객석 : 클라이버의 추억 음악정원 joba

  • 萬古 江山|2009/02/17 04:45

다섯 손가락의 이름과 유래

1. 첫째 손가락 -
엄지손가락, 무지(拇指), 벽지(擘指), 대지(大指), 거지(巨指)
'엄지'는 '첫머리'라는 뜻으로, '엄'은 '어미'와 어원이 같다. '무(拇)'와 '벽(擘)'은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의 한자이며,
'대(大)'와 '거(巨)'는 엄지손가락이 가장 큰 것에서 유래하였다.
엄지는 우두머리를 상징한다. ‘내가 최고’라하는 자신감과 일등의식이 동할 때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엄지는 넉넉한 마음, 부유함, 여유, 안락함의 상징이다. 엄지의 기운이 잘 발달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있고 푸근하다.

이런 자신감을 잘못 쓰는 경우가 반대로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으로 로마의 황제들이 사람을 죽이라는 신호로 썼었다. 이와는 반대로 간혹 주먹을 쥘 때 무의식적으로 엄지 손가락을 안으로 숨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자신감이 없어
매사 뒤쳐지려고 하는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

엄지 손가락에는 폐(肺)와 관련된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이
흘러간다. 폐(肺)란 글자를 살펴보면 고기 육(肉)변에 시장
시(市)자가 들어있는데 사실 재물과 연관이 있다.
시장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익을 남기는 주체가 상인이다. 절묘하게도 폐경락이 출발하는 엄지손가락 끝의 경혈 명칭이 바로 소상(少商) 즉 소규모 상거래라는 뜻이다.

수태음폐경이 발달한 사람은 재물에 대한 상업적 두뇌 회전이
빠르다. 예로부터 엄지로 흐르는 수태음폐경이 발달하고 엄지
아랫부분이 두툼하면 재산 복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한의학적으로 볼 때 마른 사람이 엄지손가락이 적당하게 크면 길하나 뚱뚱한 사람이 엄지손가락이 지나치게 크면 조심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마른 사람은 대개 양의 기운이 많은데 수태음폐경의 음이 발달하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니 길한 것이고, 뚱뚱한 사람은 대개가 음의 기운이 많은데 거기에 수태음폐경의 음이 더해지면 음이 과하기 때문이다.
음이 과하여 욕심이 과한 것을 경계하는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말이 그렇게 널리 회자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으니 항상 염두에 두어 조심해야 한다.

각 장부의 암은 각기 관련되는 경락적 특성을 살펴보면 암의
발생부위에 따라 차별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비만한 사람이 걸린 폐암이라면 담배가 원인일 수 없다. 오히려 건조하고 매운 연기가 약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한의학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폐암은 열두 경락에 영향을 주는 열두 가지 마음 중
어떤 마음이 뭉쳐서 영향을 주는 걸까?

통계를 보면 폐암은 오십대의 부유한 도시민들에게 많이 발병한다. 그리고 잇따른 재벌들의 폐암이라는 신문기사가 증명하듯
부족함을 모르는 부유한 마음, 지나친 재물 융통으로 인한 분주한 마음 등이 정신적 원인이 될 수 있다.
재물 상실과 배우자의 배신, 직장에서의 해고 뿐만 아니라 포만감, 애정, 자신감도 지나치면 마음의 병이 된다. 허기짐을 모르고 항상 포만하여도 병이 되는 것이다.

폐는 호흡을 주관하는 장부이다. 숨을 내쉴 때를 호(呼)라 하고 들이쉴 때를 흡(吸)이라 하는데 숨가쁘게 재물 거래 생각이 오갈 때 마음에는 바람이 일어난다.
여기서 어지럼증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중풍이 일어나기도
한다. 중풍(中風)이란 맞을 중 바람 풍자를 써서 바람을 맞는다는 뜻인데 이 바람이란 마음의 바람을 뜻한다.

바람은 공기의 빠른 움직임인데 작은 부채를 움직일 때보다 큰 부채를 움직일 때 더 큰 바람이 일어나듯이 중풍은 비만한 사람에게 많다.
그러므로 퉁퉁한 체질이면서 엄지손가락의 폐경락도 발달해
재물거래가 빈번한 사람은 마음을 놓고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반대로 엄지손가락이 유달리 약한 사람은 자부심과 기백의 회복이 필요하다. 황제내경에 이르기를 폐장백(肺臟魄)이라, 즉 폐경락은 기백을 간직한다고 한다. 기백이 떨어진 사람은 유유한
배포와 함께 긍정적인 자신감을 길러야 한다.



2. 둘째 손가락 -
집게 손가락, 검지, 식지(食指), 인지(人指),
염지(鹽指), 두지(頭指)
'검지'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식지(食指)'라는 명칭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에 宋(송)이라는 공자가 입궐하는데 갑자기 식지(食指)가 떨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동행하던 친구에게 보이면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더라는 말을 하였다.

궁에 들어가 보니 과연 요리사가 커다란 자라를 요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자 왕이 그 까닭을 물으므로 식지(食指)가 떨린 일에 대해 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장난을 할 생각에 그를 밖으로 내보내 요리를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그는 나가면서 요리 솥에 식지(食指)를 넣어 국물을 맛보고는 물러났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할 때나 욕하려고 삿대질할 때나 방향을 가리킬 때는 주로 둘째 손가락을 쓴다.
엄지가 주로 ‘나 위주’의 긍정적 에너지라면 검지는 주로 ‘너
위주’의 부정적 생각을 표현한다.
둘째 손가락으로 가리킴을 당하면 대부분 불쾌한 느낌을 받는데, 이는 검지에 공격적인 살기 또는 경멸을 암시하는 기운이 흐르기 때문이다.

둘째 손가락에는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이 흐른다. 옛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부자가 된 사촌 앞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가난하다는 이런 상대적 빈곤감을 느낄 때 작동하는 경락이 바로 수양명 대장경이다.

배가 아픈 경우는 대부분 배가 차서 아픈 법인데 이 양명 기운이 차고 건조한 가을의 기운이다. 남이 잘못되면 좋아하고 잘될 때 질투하는 사람은 대장이 싸늘하게 식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둘째 손가락이 길면 가난할 상이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둘째 손가락의 기운이 약해도 몸에 병이 생길
수 있는데 대표적 질환이 바로 비만과 중풍이다. 대체로 뚱뚱한 사람에게 많이 오는 중풍의 전조증상 중에 둘째 손가락 안쪽이 저린 마비가 있다.
나 위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이 찌고 정신적으로는 권태에 빠질 수도 있다. 몸이 비대하고 생활이 지루한 사람에게는 둘째 손가락의 날카로운 양명 기운이 약이 된다.

예로부터 ‘양명’해 보인다는 말은 야무지고 총명해 보인다는 의미로 쓰여왔다. 첫째 손가락의 ‘태음’이 ‘살(肉)’에 해당한다면 둘째 손가락의 ‘양명’은 ‘뼈(骨)’에 해당한다.
양명경은 근본에 해당한다. 검지가 다른 손가락에 비해서 발달된 사람은 뼈대가 단단한 사람으로 보아도 된다.

양명은 바른 기운, 정기(正氣)다. 자동차로 보자면 브레이크 작용 즉, 절제력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맑고, 단단하고, 절도가 있으며,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계획성 있게 일을 한다. 잘못된 일을
보고 못 본 체하고 넘어가지 않고 날카롭게 따질 줄 안다.

만일 자신의 검지가 비교적 빈약한 편이라면, ‘주변 상황에 너무 흔들리지 않는가?’ ‘정도를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삶, 나태한 삶을 살지는 않는가?’ 하는 의심과 항상 조심하며 반성해 보는 자세를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셋째 손가락 -
가운데 손가락, 중지(中指), 장지(長指), 장지(將指)


'중(中)'은 가운데에 위치해서, '장(長)'은 길어서, '將(장수 장)' 역시 가장 길어 우뚝 선 모양에서 유래하였다. 셋째 손가락에는 지성리듬인 수궐음심포(手厥陰心包) 경락이 흘러간다.
‘마음보’인 ‘심뽀를 잘 쓰라’는 말도 있는데 심포 경락은 지식의 저장창고에 해당한다. 심포경락이 잘 발달된 사람은 지식이
풍부하고 기억력이 좋다.

가운데 손가락이 유난히 긴 사람들은 대체로 지성리듬이 발달되어 학문적인 소질이 다분하다. 게다가 가운데 손가락 안쪽에 푸른 핏줄이 선명하며 손바닥까지 푸르면 대체로 심포경락이 무척 발달한 사람이다.
이 청록색이 궐음(厥陰)의 색이며 바람과 봄의 상징색이다. 누구든지 공부도 잘하고 명예도 얻고 권력도 잡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기 욕심 채우고 남 잘못되는 쪽으로 머리 굴리면 놀부 심뽀라는 말을 듣는다.
현 사회의 지식추구 현상은 결국 지성 리듬이 발달된 사람만이 사회의 엘리트 계층을 이루게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 리듬만 발달하면 뭐하겠는가? 자신만이 잘 되기 위해 심포 경락을 활용한다면 그 심포는 놀부심뽀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나아가서는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도 불행하게 만드는 경락이 될 수도 있으니 언제나 조화를 유지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부할 의욕이 떨어지는 수험생들 경우에 셋째 손가락 끝 중충혈을 손톱으로 눌러주면 기억력 증진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 외우기가 싫어질 때 누르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고 머리 속에도 쏙쏙 들어온다고 한다.
가벼운 건망증 뿐만 아니라 알츠하이머 치매증상에도 곧잘 이
경락을 응용한다. 또한 연탄가스 중독 등으로 의식이 소실된
사람에게 의식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동치미 국물과 같은 신
국물을 먹이고 셋째 손가락 끝 혈자리를 시술한다.
또 기억이 잘 안 날 때는 가운데 손가락을 모아 주물러 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둘째, 셋째, 넷째 손가락을 모아 쥐면 셋째 손가락이 가장 힘을 받게 된다.

이런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셋째 손가락에 지성리듬이 흐른다는 것이 옛날에는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좌측 손가락은 우뇌와, 우측 손가락은 좌뇌와 연관지을 수 있다.

좌뇌는 수학, 언어, 논리 등을 주관하는 기능이 집중되어 있고, 우뇌는 이미지, 직관력, 연상력, 창조력 등을 관할하는 능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좌뇌는 디지털 뇌, 우뇌는 아날로그 뇌라고도 말한다. 양쪽 손을 비교해보아 만일 왼쪽 손의 궐음 경락이 더
발달했다면 우뇌, 오른손이 더 발달했다면 좌뇌가 더 발달하였
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뇌의 아날로그적 이미지로 기억하는 정보의 양이 좌뇌의 분석적 디지털 뇌로 기억하는 양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어쨌든 수학적 지식 등 좌뇌에서 담당하는 분야가 기억나지 않으면 우측 중지, 문학이나 이미지 등 우뇌에서 담당하는 분야가 떠오르지 않으면 좌측 중지를 누르면 효과를 볼 수 있다.


4. 넷째 손가락 - 약손가락, 약지(藥指), 무명지(無名指)

원래는 이름이 없다고 하여 '무명지(無名指)'로 불려졌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 손가락은 한의학에서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 독이나 해로운 물질이 있으면 이 손가락에 증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약을 저을 때 반드시 무명지를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약지(藥指)'라는 명칭이 붙여졌지 않나 싶다.

넷째 손가락으로 흐르는 경락은 지식을 저장하는 셋째 손가락의 경락과는 정반대로 지식을 배설하는 망각에 관여한다. 이를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이라 한다.
중지의 심포 경락을 흡수하는 ‘지식의 위장’이라고 한다면 약지의 삼초(三焦)경락은 배설하는 ‘지식의 대장’이라 할 수 있다.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이유에는 중독성도 있겠지만 담배가 주는 정신적 위안 때문이기도 하다. 담배나 마약 등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바로 이러한 망각 작용이다.
복잡한 생각과 문제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머리를 비우는 순간 알 수 없는 황홀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비워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라 의존해서 오는 편안함은 일시적이어서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더욱 큰 공허감이 자리잡을 수 밖에 없다.
중요한 일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잊어버리고 싶은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준다.

창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릴 때보다 오히려 화장실에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많다고 한다. 화장실은 배설하는 곳이다.
지나치게 많이 먹은 사람은 배설해야 다시 식욕이 생기듯이 많은 정보를 집어넣은 머리 또한 어느 정도 망각이라는 배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담배, 마약, 수면제 등에 의존하거나 꿈이 어지러운 사람은 대체로 과거의 나쁜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사람으로 망각의 통로 삼초 경락이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불면증 등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은 넷째 손가락을 자극해서 효과를 보기도 한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사는 사람은 몸이 젊더라도 마음은 늙은
노인이다. 입력되어진 기억과 편견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지금 현재의 생동하는 현실을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한 시선으로
직시한다면 악몽에 시달릴 염려 없다.

그러나 삼초의 기운이 과하게 되면 잘 잊어먹는 건망증이 생기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 생긴 열등감으로 인한 분노가 쌓일 수도 있다. 반지는 보통 약지에 낀다.
그러면 모래가 기름불을 꺼주듯 반지의 금속 금(金)기가 넷째 손가락의 화(火)기를 어느 정도 억눌러 주므로 특히 소양 경락이
발달하여 성급하고 다혈질인 사람에게 좋다.

공부를 잘 하고 학교와 가정에서 인정받는 학생은 대체로 고분고분하고 교칙 등을 거역하는 말썽을 부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것은 공부를 잘해서 받는 칭찬으로 자존심의 기운인 궐음지기가 만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등감이 있는 학생은 자존심이 상처받고, 반항기운인
소양지기가 발동하기 쉽다.

약지가 발달한 사람은 대체로 모른다는 생각으로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는데 자신이 매우 소중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잘 개발하기 바란다.
삼초경에는 혁명정신,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창조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수소양 삼초경이 발달한 사람은 순수하다. 날카로운 풍자를 구사하는 유머감각도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혁명이나 혁신적인 정열이 있다는 것이다.



5. 다섯째 손가락 -
새끼 손가락 (애지), 소지(小指), 계지(季指), 수소지(手小指)

가장 작고 끝에 있으므로 '새끼', '작을 소(小))', '끝 계(季)'라는 이름이 붙었다. 흔히 새끼 손가락을 펴 보이면 통상 애인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끼 손가락 안쪽으로 흐르는
경락은 심장에서 흘러오는 소음경락이다.

서양에서도 심장모양을 딴 하트 문양이 사랑의 상징으로 내려오고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생리현상이 증명하듯
새끼 손가락으로 흐르는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은 사랑과 예술의 감성리듬이다. 그래서 유별나게 새끼 손가락이 길고 수려하게 발달되어 있으면 예술가적 기질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수소음 신경은 예술적 재능과 자기애, 미적 감각과 신명나는
기운에 해당한다.

아름답고 청초하고 매혹적인 이성을 볼 때의 가슴 두근거림,
사춘기 소녀들의 명랑함, 적당히 멋 부릴 줄 아는 미적 감각이
바로 수소음신경의 고양된 에너지이다.
나이 들어 걱정과 근심이 쌓이다보면 이러한 명랑성을 잃게 되어 무겁게 되는데 청춘들의 경쾌하고 발랄한 아름다움은 주위의
분위기를 신명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린이들은 간지럼을 많이 타는데 일종의 소음의 열로 인한 현상으로 지나치면 물론 좋지 않다. 예로부터 남자가 간지럼을 많이 타면 줏대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희기완(喜氣緩), 즉 즐거움은 기를 늘어지게 한다고 하였고 즐거움이 지나치면 심장이 약해져 단명한다고 했다.

수소음신경이 지나치게 발달하면 결정이 신속하니 경솔하기 쉽고, 자기애가 강하니 공주병, 왕자병 같은 자기도취에 빠져 현실감각을 잊기 쉽다.
또한 쾌락에 탐닉하는 경향이 많아 건강을 잃고 말년이 불행하게 되기 쉽다.

첫째(폐)와 둘째(대장) 손가락은 1차적인 신체리듬, 셋째(심포)와 넷째(삼초)손가락은 3차적인 지성리듬이 흘러가는데 다섯째 손가락으로는 2차적인 감성리듬 두 줄기가 안쪽과 바깥쪽으로 흐른다.
안쪽으로는 심장 경락이, 바깥쪽으로는 소장 경락이 흘러간다. 그래서 폐와 대장, 심포와 삼초, 심과 소장을 각각 부부(夫婦)장부(臟腑)라고 한다.

새끼 손가락에는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과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이 흐른다. 수소음심경은 겨드랑이에서 새끼 손가락 안쪽 끝에 이르고 수태양소장경은 손톱 바깥 끝에서 시작하여 몸 속으로 들어간다.
수태양소장경은 피를 주관한다. 심장 경락은 따뜻한 이미지인데 반해 소장경락은 섬뜩한 이미지이다. 심경락은 사랑의 이미지가 있고 소장경락은 죽음의 이미지가 있다.

수태양소장경은 피를 흘리는 선뜻한 느낌을 연상시키는 경락이기는 하지만 피와 관련된 증상에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경락이다. 과도한 출혈, 하혈, 빈혈 등 피와 관련된 증상에는 새끼
손가락 바깥쪽을 눌러주면 효과가 있다.

* 참고로 영어에서 'Finger'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4개의
손가락만을 지칭하며,

엄지 손가락은 따로 'thumb'라고 한다.

둘째 손가락은 'Index Finger' 또는 Second Finger',

셋째 손가락은 'Middle Finger' 또는 'Third Finger',

넷째 손가락은 'Ring Finger" 또는 'Fourth Finger',
새끼 손가락은 'Little Finger' 또는 'Fifth Finger'라고 부른다.


          Beethoven /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 3 in C minor, Op. 37 (I ~ III) 굴드카라얀 - 세기의 만남, 기묘한 조합 :1957년 베를린 콘서트 31세의 나이에 무대 공연을 완전히 그만둔 내성적인 비르투오소 굴드. 제트기 여행자로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지휘대의 스타였으며, 열정적인 오페라 지휘자이자 연출가인 카라얀. 이 둘이 처음 만나 공연한 1957년 베를린 콘서트. "부조니 이래 이처럼 능란한 피아노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 음악평론가 슈투켄슈미트 (당시 공연평 중에서) "마치 나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만 같았다.' - 카라얀 I. Allegro con brio(16:19) II. Largo(09:30) III. Rondo[Allegro] (08:59)
Glenn Gould pianoHerbert von Karajan cond. Berliner PhilharmonikerBeethoven, Sibelius · The Legendary Berlin Concert 2009. 2. 12. Slm&m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March 27,1927–April 27,2007)

러시아의 작곡가이자,지휘자,첼리스트.

20세기 전반에 파블로 카잘스(1876-1973)가 있었다면,20세기 후반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의 시대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첼리스트이면서,동시에 빼어난 지휘자이자 음악 스승이었다.

2007년 4월 27일(현지시간),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러시아 남부의 종양 전문센터에서 향년 80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지난해말부터 간종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최근에는 간 이식 수술을 받기도 했다.

3월 27일 80회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렘린 궁에서 마련한 성대한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지만,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돼 다시 입원했다.

80회 생일상을 받은지 꼭 한달만에 눈을 감은 것이다.

당시 생일 축하연에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제자인 첼리스트 다비드 게링가스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500여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영국 더 타임스는 로스트로포비치를 '현존하는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망 소식을 접한 후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입원했던 병원으로 급히 향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안장될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스승인,작곡가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를 비롯해 니키타 흐루시초프,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 여사,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에밀 길렐스 등 정든 친구들이 묻혀 있다.

1990년 2월 11일,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26년만에 고국 땅을 밟은 그가 모스크바 공항 도착 직후 곧장 달려간 곳도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이었다.

3일전 타계해 이곳에 묻힌 보리스 옐친 러시아 전 대통령도 로스트로포비치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옐친을 가리켜 '내가 100 퍼센트 믿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러시아의 수호자' 메달을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애칭은 '슬라바'.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말이지만,러시아어로 '영광' 이라는 뜻도 된다.

아제르바이젠의 바쿠에서 태어난 그는 4세때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10세때부터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였던 아버지로 부터 첼로를 배웠다.

16세때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피아노는 물론 작곡,지휘까지 배웠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20세기 러시아 음악의 거장들을 두루 사사했다.

1942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와 협연으로 챠이콥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으로 대뷔하였다.
그는 1955년 당시 볼쇼이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였던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만난 지 4일만에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탁월한 피아노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아내의 독창회 때 반주를 도맡기도 했다.

1956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부임한 로스로포비치는,구 소련 시절 인민예술가 칭호와 함께 예술 분야 최고 권위의 레닌상과 스탈린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영국 출신의 여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가 그에게 배우기 위해 모스크바로 유학을 왔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그의 음악활동은 순탄치 못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로 반체제 소설을 쓰다가 탄압받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공개 편지를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이 '수용소군도'를 집필할 때 자신의 아파트를 몰래 제공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도 끝내 박해를 받아 1974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소련 당국이 모스크바에서의 연주를 금지하고 출국을 거부했을 때 자살까지 생각했다" 며 "그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아내와 두 딸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각각 첼로와 피아노를 전공한 올가와 엘레나 등 두 딸을 두었다.
그는 파리에 체류하던 1978년 부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지만,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 의해 복권됐다.

1980년 2월 27일,파리 살 플레옐에서는 한달 전 고리키로 유배당한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날 공연에는 뜻을 함께 하는 동료와 후배 첼리스트 24명이 무대에 섰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91년,군부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크렘린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가담하기 위해 사전 예고도 입국 비자도 없이 모스크바에 들어오는 용감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로스로포비치는 서베를린 쪽 벽 아래 혼자 앉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이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199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 행사에서는 미국,러시아,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를린에 주둔했던 나라에서 온 젊은 첼리스트 166명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했고,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20세기에 숱한 첼로 명곡들이 그에게 헌정(獻呈)되었다.

브리튼,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의 해석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첼로 협주곡 2곡은 모두 로스트로포비치가 초연했다.

그는 생전에 ..."나의 음악으로 공산주의에 희생된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죽음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브리튼도 '첼로 소나타','3개의 첼로 모음곡','첼로 교향곡' 등을 모두 쇼스타코비치에게 헌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고발한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은 1996년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러시아에서 연주되기 전까지는 60년간 소련 정부가 금지곡으로 낙인을 찍었던 곡이다.

그렇지만 정작 ‘첼로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64세가 된 뒤에야 녹음할 만큼 음악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다.

오랜 망명 생활에서도 고향을 못내 그리워했던 그는 아제르바이젠 바쿠에 1999년 러시아 어린이를 돕기 위한 로스트로포비치 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2002년 '로스트로포비치 가정 박물관'을 열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써오던 첼로는 1711년산 '뒤포르 스트라디바리우스'로 현존하는 첼로 중 가장 뛰어난 악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1977년부터 94년까지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구 소련의 박해를 받아 망명해온 음악가가 자유 서방의 심장부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지휘자로 활동한 것이다.

1993년에는 내셔널 심포니를 이끌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무료 야외음악회를 열어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연주했다.

로스트포비치는 무엇보다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를 발굴한 스승으로 유명하다. 1994년 파리에서 열린 로스로포비치 국제 콩쿠르에서 장한나에게 우승 트로피를 안겨줬다.

1995년 프랑스 칸 미뎀(MIDEM) 음반박람회 때 장한나가 쇼케이스 연주를 할 때도 직접 참석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로코코 변주곡'등을 실은 장한나의 데뷔 앨범(EMI)에서는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첼리스트 출신의 명지휘자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한번 협연해 보는 게 전세계 첼리스트의 꿈이었다.

미샤 마이스키도 1990년부터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지휘를 부탁해왔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지금까지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협주곡 음반을 녹음하는 영예를 안은 연주자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막심 벤게로프,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첼리스트 장한나 뿐이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영광’이라는 의미의 ‘슬라바(Slava)’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을 보냈다.

일반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팔순 생일 잔치였던 지난달 27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그를 위해 직접 축하연을 열었고 러시아 국영방송이 중계방송할 정도로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자리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기립박수를 받으며 마치 유언을 하듯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투병 중이던 로스트로포비치는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참석했지만,기쁨은 한 달을 넘지 못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장대함,바로 그것이다.

지성과 정열이 무비(無比)의 기교와 결합됨으로써 희대의 웅변과 시정으로 충만되어 있다.

게다가 넘쳐나는 인간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감명을 받게 한다.

그의 스타일은 전혀 새로운 연주양식이었으며,어쩌면 <로스트로포비치 스타일>이라 불러도 좋을것 같다.

그의 수많은 레코드는 우열을 가리기 난감할 정도로 하나같이 수연(秀演)이다.

그중에서 우리의 귀에 익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들어 보면 그의 연주의 특색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곡만 하더라도 탈리히 지휘의 체코 필하모니 반,보울트 지휘의 로열 필하모니 반,하이킨 지휘의 모스크바 방송관현악단 반,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니 반 등이 있는데,이것을 순서대로 들어 보면 그의 명기의 성장을 더듬을 수 있다.

이 밖에 협주곡으로는 브리튼 지휘,영국 실내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과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된 브리튼 <첼로 협주곡> 결합반,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리히테르(피아노),카라얀 지휘,베르린 필하모니 연주에 의한 베토벤의 <트리플 협주곡>,졸리베 지휘,프랑스 국립방송 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졸리베의 <첼로 협주곡 2번> 등이 발군의 명연반이다.

소나타로는 리히테르(피아노)와 공연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이 기념비적 명연이고,브리튼 반주에 의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도 간과할 수 없는 명연이다.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 2 번>,<제 5 번> 결합반은 교과서와도 같은 연주다.

그의 지휘반으로는 파리 관현악단을 지휘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그의 부인 비쉬네프스카야 등이 출연한 볼쇼이 극장 관현악단 지휘의 <에프게니 오네긴> 전곡반이 있고,비쉬네프스카야의 반주를 맡아 녹음한 <러시아 가곡 리사이틀>,챠이콥스키와 브리튼의 <가곡집> 등이 있다.

*.앨범

1.Dvorak - Cello Concerto; Tchaikowsky / Rostropovich, Karajan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Cello

2.Beethoven - Complete Music For Cello & Piano / Rostropovich

Mstislav Rostropovich (Cello)
Sviatoslav Richter (Piano)

3.Legendary Treasures -Beethoven, Brahms, Grieg, Prokofiev / Richter, Rostropovich

Mstislav Rostropovich (Cello)
Sviatoslav Richter (Piano)

4.Schubert, Debussy,Schumann- Rostropovich, Britten

Mstislav Rostropovich (Cello)
Benjamin Britten (Piano)

5.Haydn, Saint-Saens, Edgar / Rostropovich

London Symphony Orchestra,

Mstislav Rostropovich, Gennady Rozhdestvensky -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Conductor

6.Grand Prix - Vivaldi, Tartini, Boccherini: Cello Concertos / Rostropovich

Zurich Collegium Musicum,

Paul Sacher,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Cello

7.Haydn - Cello Concertos No 1 & 2 / Rostropovich, Asmf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Mstislav Rostropovich,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Cello

8.Mstislav Rostropovich - Schumann, Cello Concerto, etc/ Chopin, Saint-Saens, et.al

All-Union Radio Orchestra,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Moscow Youth Orchestra,

Kiril Kondrashin, Samuel Samosud, Grigori Stolyarov -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Cello,
Alexander Dedyukhin, Vladimir Yampolsky, Naum Walter - Piano

9.Rostropovich - Mastercellist / Legendary Recordings 1956-78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oston Symphony Orchestra,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Mstislav Rostropovich, Gennady Rozhdestvensky,
Herbert von Karajan, Seiji Ozawa -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Cello)
Alexander Dedyukhin (Piano)

<Cellist, Mstislav Rostropovich, 1927-2007>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1927-2007>

<Mstislav Rostropovich and His wife, Galina Vishnevskaya>

<President, Vladimir Putin and Mstislav Rostropovich>

<Jacques Chirac's wife, Bernadette, left, Queen Sofia of Spain, second left, and the widow of former Russian president Boris Yeltsin, Naina>

<Galina Vishnevskaya (C), the widow and daughters Yelena (L) and Olga (R) >

<Azerbaijan's President Ilham Aliev and his wife Mekhriban >

<Queen Sofia of Spain pays her last respect to the master cellist, Russian musician Mstislav Rostropovich, >

*.Franz Joseph Haydn - Cello Concerto No.2 in D major, Hob.VIIb:2
Mstislav Rostropovich, Cello

1,Allegro Moderato

2,Adagio

3,Rondo Allegro

(펌-빈들)
희귀영상으로 만나는 명연주 명음반
찾아가는 클래식FM, 춘천에서 만나요

본방송 : 2009.2.14(토) 14:00
재방송 : 2009.2.15(일) 03:00

*

이 프로그램은
지난 2월 14일(토) 춘천 한림대 일송아트홀에서 열린
희귀영상으로 만나는 명연주명음반,
찾아가는클래식FM, 춘천에서 만나요
공개방송 실황입니다.


* 4주간 다시듣기가 가능합니다.

Claudio Arrau [piano]
Philadelphia Orchestra/Riccardo Muti 1970
Ludwig van Beethoven-Piano Concerto No.4 in G major op.58 III Rondo: Vivace 11:09

David Oistrakh [violin], Mstislav Rostropovich [cello]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Kyrill Kondrashin 1965
Johannes Brahms - Concerto for Violin, Viloncello and Orchestra in a minor op.102
III Vivace non tropo 9:42

Alexis Weissenberg [piano]
Orchestre National de l'ORTF/Georges Pretre 1969
Johannes Brahms - Piano Concerto No.2 in Bb major op.83 II Allegro appassionato 8:55


Samson Fransois [piano]
Orchestre National de l'ORTF/Louis Fremaux 1967
Edvard Grieg - Piano Concerto in a minor op.16
III Allegro moderato molto e marcato - Quasi presto - Andante maestoso 10:48



<손열음의 미니콘서트>


Robert Schumann, Fantasiestuecke Op.120
1. Des Abends 2. Aufschwung 3. Warum? 4. Grillen
5. In der Nacht 6. Fabel 7. Traumes Wirren 8. Ende vom Lied




Michael Rabin [violin]
The Bell Telephone Hour Orchestra/Donald Voorhees 1960
Pyotr Tchaikovsky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III Finale : Allegro vivacissimo 8:46

Christian Ferras [violin]
Orchestre National de la l'ORTF/Zubin Metha 1965
Jean Sibelius -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III Allegro ma non tanto 7:06

Emil Gilels [piano]
Symphony Orchestra/Alfred Wallenstein 1969
Pytro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in Bb major op.23 III Allegro con fuoco 6:49


공학도의 겁 없는 도전…‘그래미’도 놀랐다
“비욘세와 티나 터너가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더군요. 랑랑과 허비 행콕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편곡해 함께 피아노를 치고요. 토니 베네트, 프린스가 무대에 등장해요….” 지난 1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제 50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상을 수상(문화일보 2월12일자 26면 참조), 문화일보 ‘금주의 인물’로 선정된 사운드미러 한국지사 황병준(41) 대표가 15일 문화일보를 방문했다. 14일 밤 귀국한 그는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은 듯 수상 당시를 회상하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70세가 다 된 티나 터너가 젊은 비욘세에게 전혀 뒤지지 않고 춤까지 추며 노래하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몇 년에 한 번 무대에서 보기도 어려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한 무대에서 보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미가 대단하기는 대단합니다.”

황 대표가 녹음한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그레챠니노프의 아카펠라 합창음악 앨범 ‘수난주간’(샨도스 레코드)은 올해 그래미상에서 클래식 최우수 음반상, 최우수 녹음기술상, 최우수 서라운드음향상, 클래식 올해의 프로듀서상, 최우수 합창연주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문화일보 1월30일자 35면 참조)

“솔직히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두세 개는 건질 줄 알았는데 최우수 녹음기술상 밖에 타지 못해 섭섭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친구들이 ‘후보에 많이 올라도 상 하나 타기가 힘들다’며 ‘하나만 타도 굉장한 것이고, 후보에 오른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해 좀 위로가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반을 제치고 수상한 앨범이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단체 ‘시르크 뒤 솔레이으’에서 제작한 비틀스 앨범 ‘러브’인데다가,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지휘한 ‘독일 레퀴엠’ 음반이 최우수 합창상을 탔으니 이들과 막판까지 경쟁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최고의 화제는 저희 팀이었습니다. 저희 음반이 호명됐을 때 합창단 50명, 녹음 스태프 10명 등이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질러 모두 놀랐지요. 보통 1개 앨범에 많아야 10명 정도 참석하는데 저희는 이례적이었거든요. 이날 미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가 최우수 낭독앨범상을 받은 것 이상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바마는 이날 빌 클린턴과 지미 카터와의 경쟁을 뚫고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오바마에게는 두 번째 그래미상 수상이라고 황 대표는 덧붙였다.

황 대표는 “사실 이 앨범은 자칫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고 비화를 털어놨다.

“요즘 앨범사가 녹음하자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비를 들여 녹음한 것을 가져오면 음악성을 검토하지요. 그런데 이 앨범을 사운드미러에 가져왔을 때 캔사스시티합창단이나 피닉스바흐 코랄이 유명한 합창단도 아닌 데다 레퍼토리도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가 아니잖아요. 이미 다른 합창단이 녹음한 같은 레퍼토리 앨범이 우리한테 있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것을 몇 개 녹음해봤는데 성적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내게 됐는데 5개 부문 후보에 오를 줄은 미처 몰랐지요.”

그는 이제 한국 최고의 녹음 엔지니어가 됐다. 서울대 전기공학과 학사, 석사를 마치고 27살에 미국 유학을 가 음악녹음으로 전공을 바꾸는 ‘도박’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부모님께는 좋은 기술을 배우겠다고만 했습니다. 음악인 줄은 모르셨어요.”

음악녹음은 음악도 알고 녹음과 관련된 공학도 알아야 한다. 공학은 되는 데 음악은 되지 않았던 그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고3 때, 재수할 때보다 10배는 더 했을 거예요. 대위법, 화성학, 청음에 연주까지 음대에서 하는 공부를 모두 해야 해요. 녹음 실습도 해야 하고, 녹음 아르바이트도 해야죠. 1주일을 통틀어 10시간도 못 잔 적도 있어요. 그래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였기 때문이죠.”

1주일간 피아노를 하루에 20시간 이상 친 적도 있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빠르게 건반을 치는 스케일링을 하루 종일 하도 열심히 해 팬티 양쪽이 닳아 구멍이 10여개나 뚫린 것을 나중에 발견,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웃은 적도 있다고 그는 회고했다.

“더 어려웠던 것은 실습이에요. 경력이 없으면 인정해주지 않거든요. 그런데 여기 전문가들이 한국 사람을 인정하기나 하나요. 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사운드미러에 갔는데 제가 좋아하던 앨범은 거의 모두 여기서 녹음됐더군요. 그저 쫓아내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돈도 필요 없고, 청소만 해도 좋다고 매달렸습니다. 제 정성이 갸륵했는지 받아는 줬는데 정말 한 달 동안 아는 척도 안 하더군요. 뭘 좀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인사도 안 받더라고요. 그래도 열심히 매달려 공부했습니다.”

한 달쯤 지난 뒤 녹음하는 데를 데려가 간단한 일을 시켰다. 그는 옆에서 보고 있다가 점심시간에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간 뒤 피아노의 위치와 마이크의 위치, 녹음기계의 기능을 꼼꼼히 노트, 화장실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복기하고 공부했다고 했다.

“머리 좋은 놈이 열심히 하는 놈 못 당하고, 열심히 하는 놈이 좋아서 하는 놈 못 당한다고 하잖아요. 제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그제야 저를 써줬고, 그렇게 열심히 배운 것이 지금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시작입니다. 한국의 음악, 소리를 가지고 그래미에 도전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상과 관련, “문화일보가 나의 그래미상 후보에서부터 수상까지 정말 따듯하게 소개해 요즘 방송과 신문, 잡지 등에서 인터뷰가 쇄도한다”며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 대표의 부인 전혜경씨는 서울대 외교학과와 매사추세츠공대(MIT) 정치학과를 나와 유럽유엔본부를 거쳐 현재 유니세프 도쿄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글 =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사진 = 곽성호기자 tray9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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