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Carlos Kleiber & Concertgebouw Orchestra 1983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4/4박자, 도입부를 가지는 소나타형식
제 2악장 Allegretto 2/3박자, 론도형식
제 3악장 Presto 3/4박자, 트리오를 2번 낀 스케르초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2/4박자, 소나타 형식
작품개요 및 배경
이 곡은 1811년 가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완성되었다. 그 전 교향곡인 6번(1808년 완성) 작곡 이후 3년 이상 교향곡 작곡에서 멀어져 있던 셈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된다. 먼저 1809년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이 빈을 피해 도망을 가 베토벤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창작이 생각되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해 11월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 다시금 연금을 받을 수 있게되고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1809년 무렵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을 알게된다. 1810년 베토벤은 테레제를 위해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 하였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등으로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811년에 접어들어 베토벤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테프리츠로 간다. 이 곳에서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다음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은 테프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교향곡 7번 작곡에 반영되었다. 사실 1811-1812년의 작품은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밝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곡과 초연
베토벤의 스케치 북에 의하면 제 7번 교향곡은 늦어도 1811년에 착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12년에 들어와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제 2악장의 스케치는 이보다 앞선 1806년 현악사중주 작품 59-3의 작곡중에 발견된다는데 아마도 처음엔 이 현악사중주에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 곡의 완성은 1812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라고 적혀있는데 몇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리된다. 베토벤은 1813년 2월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비공개의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공개초연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빅토리아 회전과 웰링턴의 승리> op. 91과 교향곡 8번 op. 93도 같이 초연되었다.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향곡 7번보다 <전쟁 교향곡>이 더 큰 인기를 받긴 했지만 7번도 대호평이었으며 선율이 아름다운 제 2악장은 앙콜을 받기까지 했다.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7이 너무 인기가 높아서 결국 4일 뒤인 12월 12일에 재연되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때마다 제 2악장은 앙콜되었다고 한다. 초연부터 대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곡의 대중성을 그대로 들어내보이는 것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곧 익숙해지는 악상 (2악장)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넘치는 위트 (3악장)와 무엇보다도 광란에 넘치는 1악장과 4악장의 매력이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유명하지만
그중 교향곡 7번은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자극적이고 광란에 넘치며 흥분시키는 베토벤 교향곡 7번..
베토벤의 9개 교향곡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하겠지만 교향곡 7번은 베토벤 교향곡을 하나만 꼽으라는 설문조사에서 높은 득표를 보일 만큼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베토벤은 일찌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라고 했다하는데 그의 수많은 걸작중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그의 7번 교향곡이다. 정말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예외없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또한 술에 취했을 때마냥 용기에 넘치는 힘을 느끼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곡이다. 이곡의 1, 4악장을 가르켜 베토벤이 술에 취해서 작곡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훗날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비꼬았다고 하는 데 이는 '술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틀리듯이 어리석은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말을 돌리면 건강한 취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앞뒤로 꽉 막힌 분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리스트가 이곡을 가르켜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교향곡 7번에 대해 바그너는 [춤의 성화(聖化)]라고 하면서 밝고 명쾌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의 주장에 대한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교향곡 3번이 귓병에 대한 절망을 떨치고, 5번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작곡하였다면, 7번은 전쟁과 실연을 극복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구성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4/4박자, 도입부를 가지는 소나타형식
도입부 전체 관현악의 투티(f)로 시작되서 침착하게 pp로 상승하는 음계가 길게 이어지다 크리센도 되면서 최초의 관현악 폭발은 ff로 이뤄진다. 이어 오보에에 의한 노래이후 다시금 관현악은 ff로 폭발하고 이를 수반한 현의 상승은 관들의 sf로 장식되어진다. 뒤이어 비바체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제시부 - 제 1주제 플룻과 오보에에 의해 1악장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리듬이 제시되고 곧이어 플룻이 경쾌한 제 1주제를 노래한다 . 목관에서 바이올린으로 주제가 옮겨지면서 이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참여하여 호른과 바이올린은 제 1주제를 트럼펫과 팀파니및 저음현은 리듬을 노래한다 . 이후 미쳐서 날뛰는 듯한 양상이 되어 간다.
- 제 2주제 플룻과 제 1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제 2주제 역시 역동적인 것이다. 곧이어 겹8분 음표들로 구성된 리듬 부분을 거친후 클라리넷-바순-오보에-플룻으로 이어지는 크리센도후 ff로 종결부로 이어진다.
- 종결부 관악기와 팀파니에 의해 앞서 언급한 그 리듬을 ff로 계속 연주하다 제 1주제에 맞춰 신경질적으로 거듭되는 ff로 제시부를 맺는다. 이 제시부는 악보에는 반복표시되어있으나 70년대 이전 녹음들은 대부분 반복은 생략한다.
전개부 앞의 리듬을 철저히 되풀이하면서 발전되어나가다가 254째 마디에서 트럼펫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클라이막스를 만든후 현에 의해 추스러진다음 재현부로 이어진다.
재현부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충실히 재현한 후 다시 1악장의 리듬에 의한 강한 클라이막스를 ff로 만든 후 p로 음량을 갑자기 줄인 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주요 리듬과 제 1주제로 장쾌한 코다를 만든후 화려하고 통쾌하게 끝을 맺는다.
◆제 2악장 Allegretto 2/3박자, 론도형식
제 1 주제부 목관부가 2마디를 화음으로 울려 안정감을 준뒤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끌리는 듯한 주제를 제시한다. 곧 애수를 띈 이 주제 위에 비올라와 첼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한다 . 이후 이 두가지 흐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목관도 참가하야 크리센도 되다가 금관과 팀파니가 ff로 참가하고 클라이막스를 이룬 후 점점 여리게 잦아든다.
제 2주제부 클라리넷과 바순에 의한 온순한 선율이 제 2주제를 담당하고 현이 크리센도로 참가하면서 금관과 목관이 ff로 주고 받으면서 제 1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제 1주제부 (푸가에 의한 작은 전개부 붙임) 앞서의 제 1주제와 선율이 동시에 나타난다.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으로 푸가토풍으로 발전되며 수를 늘려가다 끝에 ff로 투티하고는 종결부로 들어간다.
제 2주제부 (재현) 종결부는 제 2주제부를 재현되다가 코다부분으로 발전된다.
제 1주제부 (최후 제시) 제 1주제를 최후로 들려주면서 마친다.
◆제 3악장 Presto 3/4박자, 트리오를 2번 낀 스케르초
스케르초 주제 갑자기 f로 떨쳐버리듯 거칠게 되풀이 되다가 p로 급변한 주제로 시작된다. 곧 크리센도 되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동시에 사분음표 9개의 리듬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시원한 분위기를 만든후 사분음표 3개의 리듬을 확인시키면서 트리오로 넘어간다. 스케르초를 반복하도록 지시되어있으나 역시 1악장의 제시부처럼 반복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트리오 트리오는 템포가 느려지면서 클라리넷이 노래하는 선율을 기초로하고 있다. 후반부의 큰 클라이막스 이후 다시 스케르초로 넘어간다가 다음과 같이 트리오를 거쳐 다시 스케르초로 돌아온다.
스케르초 주제-재현 트리오 재현-스케르초 주제 반복 후반부에는 프레스토로된 4마디의 ff부분이 종지의 화음을 4번 울린 후 이내 끝난다.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2/4박자, 소나타 형식
제시부 먼저 강하게 4악장의 주제 리듬을 제시해본 후 총휴지, 다시 이를 반복한 후 미친 듯한 제 1주제로 돌입한다. - 제 1주제 바이올린에 의한 제 1주제는 약박에 sf가 표시되어 있고 이와 함께 sf로 관악기들이 강하게 찔러준 다음 관에 의해 4악장 주제 리듬이 제시된다 . 이 리듬은 곧 금관과 팀파니를 위주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 제 2주제 f로 끝맺은 제 1주제부에 이어 단조로 전조된 제 2주제가 바이올린에 의해 제시된다.
- 종결부 ff로 모든 관악기들이 거침없이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가면서 4악장의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전개부로 넘어간다.
전개부 전개부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져 있고 역시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재현부로 넘어간다.
재현부 재현부에서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재현한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코다는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선율을 주고 받는 가운데 팀파니와 트럼펫이 f로 찔러주면서 점점 긴장을 고조시켜 나가다가 ff로 일단계 폭발이후 결국 fff로 최고조에 이른후 다시 크리센도를 거쳐 두번째 fff로 이어진다. 곧 ff로 모든 관현악의 투티로 장대하게 끝마친다.
2004년 7월 타계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우리에겐 낯설고 생소하지만 음악계에선 카라얀 이상으로 평가받는 지휘자다. 그가 죽자 음악계는 거장 지휘자의 세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평했다.
클라이버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건 카라얀과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라얀은 상업적이고 미디어 지향적, 대중 지향적이었다. 돈이 되면 지휘봉 들고 흔드는 것쯤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라이버는 달랐다. 세상이나 자기 PR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기록이라는 명언처럼, 음반을 낸 적도 드물다.
카라얀이 비정하리만큼 차갑다면 클라이버는 가족을 위해서는 지휘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단원을 이끄는 방식도 독재적인 카라얀에 비해 클라이버는 민주적이고 예의가 넘쳤다. 그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은 평생에 만난 최고 지휘자로 평가했고 그의 음악을 들어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버는 어느 누구보다 리허설을 많이 했다. 악보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은 독보적이었고 음악에 대한 열정, 지식, 경험의 삼위일체에 모두 감탄한다.
그래서 당시 단원 대표였던 알렉산더 베도우와 클라우스 호이슬러는 클라이버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뮌혠에 있는 클라이버의 자택으로 찾아갔습니다.
이 전기의 집필자 알렉산더 베르너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 단원들과 관계자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전말을 재구성해놓았지요. 그중 당시 클라이버를 직접 찾아갔던 베도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호텔에서 그와 만나, 오페라 극장 근처에 있는 그의 단골 선술집으로 갔습니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클라이버가 결코 상임 지휘자 추대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우리 동료들은 그가 수락하리라고 믿고 있었지요. 클라이버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깊은 인상을 주어서, 심지어 그에게 음반 녹음 기피증이 있다는 것도 그를 추대하는 데 전혀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천재였고, 다른 시대에서 온 지휘자 같았습니다. . . . 그는 자기는 레파뚜아가 너무 좁아서 상임지휘자로는힘들다고 이유를 댔지요. 저는 그 후에도 클라이버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을 것입니다. . . .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공간은 클라이버에게는 너무 현대적이었고 객석은 단상에서 너무 가까웠습니다."
당시 베를린 필의 단장이었던 한스 게오르크 셰퍼는 이 예비 투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두가 자기가 좋아하는 지휘자를 순서대로 적어 내야 했지요. 그러면 그걸 가지고 비교를 하는 겁니다. 단원 대표가 클라이버는 가망이 없으니 논외로 하자고 분명히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클라이버를 1순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예비 투표가 무효가 되어버렸지요."
정리하자면, 클라이버는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직을 "공식적으로" 제의 받은 적은 없습니다."공식적으로는" 선출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거절"했다는 것은 내용상, 정황상 맞는 말로 보아야 하겠지요.<출처: 고클래식, dahlemdorf님>
돌이켜봤을 때,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실제로 지휘하는 모습을 보려 했다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정작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지휘자, 그러나 부인할 수 없도록 세계 음악계에 우뚝 솟은 지휘자가 지난 7월 74세의 나이로 별세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20세기 음악계에서 가장 이상한 수수께끼의 주인공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지휘자가 거의 지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1980년대에 그는 레퍼토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손에 꼽을 정도로까지 연주곡목을 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에로이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소한 그가 유명해지고 난 뒤 전성기 때 그것을 들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런 기벽과 함께 사람들로부터 달아난 것일까. 그리고 왜 세상이 그에게 지휘를 간청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의 도입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카를로스가 지휘하던 시대, 지휘자들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몰개성의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 단조로운 음악의 장에 개성적이면서 압도적인 힘과 통찰력을 지닌 음악가 클라이버가 등장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베토벤 CD 외에도 카를로스의 재능의 전모를 드러내는 레코딩을 약간 더 찾아볼 수 있다. 골든 멜로드람 레이블에서 발매된 4장으로 구성된 세트(GM 4.0043)에는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실황이 수록돼 있는데 슈베르트 교향곡 3번, 버터워스의 ‘영국 목가’ 1번, 그리고 뜨거운 베토벤 교향곡 5번이 담겨 있다. 이 세트에는 또한 슈투트가르트·쾰른 ·빈 등에서의 연주도 들어 있는데, 보로딘 교향곡 2번, 하이든 교향곡 94번,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이 그것이다. DG의 베토벤 5·7번과 함께 클라이버 지휘의 관현악곡을 섭렵하는 데 필수적인 음반이다.
첫 번째는 플라시도 도밍고·미렐라 프레니·피에로 카푸칠리의 ‘오텔로’(1976)이다. 도입부의 폭풍우 장면부터 불을 뿜는 연주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저변에 깔린 운명과 비극을 의식하고 그 불가피성의 관성으로 오텔로의 죽음 장면에까지 몰고 간다. 이 연주는 뮤직 앤 아츠 등 여러 레이블에서 발매됐다(내가 가진 것은 Exclusive EX92T 08/09이다). 이보다 더 인상적인 음반은 푸치니의 ‘라 보엠’이다. 이 연주 역시 몇몇 레이블에서 발매됐다(역시 Exclusive 음반으로 가지고 있는 EX92T 01/02). 이 1979년 연주에는 파바로티·코트루바스· 카푸칠리 등이 노래했으며, 무제타 역에는 루치아 폽이 분하고 있다. 내가 들었던 연주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캐스팅이다. 당신이 ‘라 보엠’에서 원하던 모든 것들이 여기 있다. 다정함, 유머, 깊이 있는 열정, 비탄, 고통, 모두가 있다. 라 스칼라 필은 무엇에 홀린 듯이 연주하고 있고, 클라이버는 스타 가수들을 녹여 하나의 앙상블로 만들어 내고 있다.
향년 74세.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죽음은 모든 음악 애호가들의 슬픔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너무나도 드문 진정한 거인을 잃었다. 더욱 슬픈 것은 지난 20년 동안 그의 무대가 너무나 드물었고, 그로 인해 그가 남긴 유산의 폭과 범위가 더욱 축소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천재가 남긴 음악을 길이 향유할 수 있음을.
[오마이뉴스 정윤수 기자]'헤이리 음악 소풍' 때문에 베토벤의 음반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번 주말 예정인데, 실은 사회학자 김종엽 선생에게 '모짜르트 소풍'을 부탁하였으나 원고 사정으로 연기되고 내가 대신 맡은 것이다. 이 일도 원래는 음악평론가 강헌 선생의 몫이었으나 그는 지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다.
클라이버를 위하여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대척점에 있던 카라얀이다. 20세기 후반의 클래식에 있어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만한 카라얀의 생애는 확실히 은둔자 클라이버와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클라이버의 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대신 카메라, 마이크, 음향 설비를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을 그는 기피했다.
몇 장의 음반만 남기고 그는 떠났다. 당연히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음반이 아니라 세속을 거절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예술가'로 버틴 그의 생애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이채롭게도 제작사인 '오르페오'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제 듣게 될 4악장의 마지막 대목과 열렬한 박수는 고인이 된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이 세속 도시의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장송이 될 것이다. 정윤수 기자
내가 접했던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연주
우리와 호흡하며 살아 있었던 전설
교 미츠토시|음악 평론가, 게이오대학 부교수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초연한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였다.
젊은 카를로스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친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카를로스는 유명한 취리히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음악도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그 몇 년 뒤 그는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보수도 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포츠담·뒤셀도르프·취리히·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이따금 그는 가명으로 오페레타를 지휘해야 했다. 부친이 알면 격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972년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둔다. 이 작은 바그너 마을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3년 동안 지휘했다. 그의 ‘트리스탄’은 이 사랑의 드라마를 극도로 열정적이고 뜨겁게 만든 연주였다.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의 멤버들과 청중들에게 이 훌륭한 연주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1970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푸치니 ‘라 보엠’,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오텔로’ 등을 지휘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는 특히 명망이 높았다. 이 작품들은 카를로스의 장기 레퍼토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런던과 밀라노에서도 이렇게 세심하게 선택한 레퍼토리만을 공연했다.
클라이버는 1980년 이래 가장 센세이셔널하고 전설적인 지휘자일 것이다. 그는 단지 손으로 헤아릴 만큼 적은 수의 몇 가지 작품들, 즉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오페라들과 몇 가지 교향곡들(베토벤 교향곡 4번과 7번, 브람스 교향곡 2번과 4번, 모차르트 교향곡 34번 등)만을 지휘했다. 그는 뮌헨이든 베를린이든 빈이든 시카고든 도쿄든 그 어디에서나 이 레퍼토리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연주했다. 가끔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다른 작품들을 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베토벤 ‘전원’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등등. 그는 간혹 드물게 이들 작품을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 레퍼토리들은 연주를 준비했다 하더라도 콘서트 직전 혹은 리허설 중에 연주를 취소하기 일쑤였다. 그가 왜 그렇게 수줍음을 탔는지, 자신감이 없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위대한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로부터의 심리적인 압박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카를로스는 잦은 공연 취소로 매우 유명해졌다. 그는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본 투어나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 등 큰 프로젝트 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그는 다른 음악가들을 잘 주도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했다고 한다.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모두가 그를 초청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클라이버의 답변은 언제나 아주 비관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휘할 악단을 선택하게 됐는데,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이 그것이었다.
빈 필하모닉의 단원들에게 클라이버는 경모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빈 필을 지휘할 때 안절부절못했다. 베를린 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시카고 심포니 등 명문 관현악단들도 몇 차례 지휘를 해 본 뒤로는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했다.
죽음 예견한 사르데냐 라스트 콘서트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다른 지휘자들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콘서트홀이나 오페라하우스에서 들어 봤다면 그 차이는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를로스의 음악은 언제나 극도로 뜨겁지만 난폭하거나 거칠지 않았다. 몹시도 예민하지만 엄격하지는 않았다. 자유롭고 유동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자연스러웠다. 거기엔 언제나 두드러진 감성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는 레코딩보다는 훨씬 많은 작품들을 지휘했지만, 그는 레퍼토리의 협소성 면에서 볼 때 유일무이한 지휘자다. 가령 그는 말러의 교향곡에 매료됐었고 복잡한 스코어를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 빈 예술 주간 때 지휘한 ‘대지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말러 교향곡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점차로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잃어 갔던 것이 아닐까. 모든 단원들과 청중들이 그토록 그를 사랑했건만 1980년대 후반,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를 떠났다(그는 나중에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지만 뮌헨에서는 아니었다). 이후, 그가 어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베를린에서, 한 번은 인골슈타트(뮌헨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본사가 그곳에 있다)에서, 한 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빈에서 몇 번 지휘를 하곤 했다. 그가 연주 횟수를 줄일수록 그가 벌어들이는 액수는 커져 갔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를 아주 희귀한 보석들과 동일시했다.
커리어 말기인 1998년과 1999년에 카를로스는 카나리아 제도와 사르데냐 섬에 나타났다. 둘 다 작렬하는 태양과 푸른 바다가 있는 전형적인 유럽 남쪽 지방의 섬이다. 이 두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카를로스의 모든 공연 계획은 전면 취소됐다.
1983년부터 1999년까지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와 오페라들을 다수 관람했다. 그는 내게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내가 음악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카를로스 클라이버 때문이다. 18세 때 뮌헨에서 그의 ‘장미의 기사’를 관람했을 때였다. 얼마나 섬세하고 정력적이며 화려하고 도취적인 연주였던지. 마치 꿈을 꾸는 듯 느껴졌었다.
이후 나는 카를로스에 심취했고, 열광했다. 그러나 그건 단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 심지어는 전문가들조차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열중했던 것이다. 가령 현재 가장 저명한 지휘자 중 하나이며 원전연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프란스 브뤼헨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유일한 음악가”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궁금하다면 베버 ‘마탄의 사수’의 서곡과 그 이후의 음악 전개를 들어 보라. 아마도 당장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드라마틱한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연주를 들어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푸르트뱅글러에 비견하곤 한다.
사르데냐에서 카를로스의 라스트 콘서트를 참관했을 때, 그는 늙고 지쳐 보였다. 음악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상적이지 못했다. 들으면서 내내 ‘카를로스는 이제 스스로 은퇴하겠구나 혹은 운명에 의해 사라지겠구나’ 하고 예감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정말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클라이버의 연주가 담긴 방송 녹음들과 CD 제작자들이 많이 존재하리란 점이다. 카를로스는 이 녹음들의 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첼리비다케가 그러했듯이 이 녹음들은 곧 음반 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더불어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음악가였다. 동시대를 호흡하며 전설의 반열에 오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류태형 기자(mozart@)
|?음반으로 남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유산
레코딩 완벽주의자가 남긴 진정한 명품
이영진|음악 칼럼니스트
“나에게 있어 녹음 발매를 허락하는 것은 일종의 공포감을 수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라 고백했듯 클라이버는 평생토록 레코딩 기피증에 시달렸다. 음악적 완벽주의에 신경과민증 성격이 더해져 기인한 것이리라. 그래도 스튜디오반과 영상물, 몇 종의 비정규 앨범을 합치면 거장이 지휘했던 레퍼토리 대부분을 섭렵할 수 있다. 먼저 관현악 장르. 제일 중요한 작곡가는 베토벤으로 교향곡 4·5·6·7번을 연주했다. 1974년에서 1976년 사이 빈 필과 녹음한 ‘운명’ 및 7번(DG)이 상쾌한 스피드감으로 장전된 명반. 1982년 카를 뵘 추도 콘서트 라이브인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4번(Orfeo)도 다이내믹하고 폭발적인 열연이다. 1983년 로열 콘서트헤보를 지휘한 4·7번 영상(Philips)에서는 신명 나게 바통을 휘두르는 클라이버의 춤추는 듯한 자태를 볼 수 있다. 반면에 작년 말 발매된 1983년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6번 실황(Orfeo)은 좋지 못한 음질로 논란이 됐다.
1980년 빈 필을 지휘한 브람스 교향곡 4번(DG)은 대담한 강약의 콘트라스트와 극적 추진력으로 작품에 신선한 비전을 부여한 역작이다. 같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슈베르트 3번 및 ‘미완성’(DG)에서도 관습의 찌꺼기가 철저히 씻겨져 있다. 스타일리시한 모차르트 ‘린츠’와 생기발랄한 브람스 2번이 커플링된 1991년 빈 필 라이브 영상(Philips) 또한 출중하다. 빈 필을 지휘한 연주라면 1989년과 1992년의 신년 음악회(Sony)를 잊을 수 없다. 유려한 프레이징, 용수철 같은 비트가 발군이다. 해석상 논쟁으로 취소될 뻔했던 1989년보단 1992년 쪽이 더 자연스럽다. 보로딘 2번·말러 ‘대지의 노래’는 부틀렉(Golden Melodram)으로만 들을 수 있는 작품. 1969년 ‘박쥐’ 서곡 및 1970년 ‘마탄의 사수’ 서곡의 리허설과 실연을 수록한 DVD(Pioneer)는 스코어의 세부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클라이버의 진지한 모습을 포착한 귀한 자료이다.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이 파트너이다. 협주곡 녹음은 단 하나. 리히테르를 반주한 드보르자크 피아노 협주곡(EMI)이 그것이다.
오페라 분야에서 인기 높은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1975년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스튜디오반(DG), 1986년 뮌헨 국립극장 실황 영상(DG),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양자 공히 약동하는 리듬과 흥청망청한 축제 분위기, 호화로운 배역진으로 꾸며져 있으나, 이 곡은 DVD로 시청하는 편이 재미있다. ‘천둥과 번개’ 폴카에 맞춰 대소동이 벌어지는 2막 피날레가 관람자를 포복절도하게 한다. 클라이버의 데뷔 레코딩인 베버 ‘마탄의 사수’(DG)도 전설적인 음반이다. 관록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자존심 드센 독일계 보컬들을 맘대로 주무르고 있다. 연주 내내 관통되는 긴장감이 특필할 만하다.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는 영상물로만 두 편 존재한다. 1979년 바이에른 국립극장 실황(DG)과 1994년 빈 국립오페라 라이브(DG)가 그들로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대단히 우미하고 화려하다. 프라이스가 주연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DG)에선 로맨틱한 관능성을 탐닉하기보다는 모던한 미감 표출에 주력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튜디오 레코딩으론 1976년에서 1977년 사이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 연주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DG)가 있다. 일레아나 코트루바스를 비롯한 캐스팅 전원이 쟁쟁하지만, 무엇보다 의표를 찌르는 듯 자극적인 클라이버의 리드가 일품이다. ‘오텔로’는 비공식 음원으로만 네 종 유통된다. 애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절찬하는 연주가 1976년 라 스칼라 극장 라이브(Music&Arts). 도밍고·프레니·카푸칠리 등 당대 최고의 명가수들이 거장이 설치해 놓은 치밀한 복선을 따라 질투와 파멸의 드라마를 처절하게 연기해 낸다. 푸치니 ‘라 보엠’ 역시 비정규 녹음이 5편. 1979년 라 스칼라에서 상연된 3월 22일 실황(Exclusive)과 30일 실황(Golden Melo- dram)이 막상막하라 전해진다.
이제 클라이버가 작고했으니 레코딩 허가의 끈을 조금은 늦출 필요가 있다. 1979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비제 ‘카르멘’, 소니에서 LD로 나올 예정이었다가 지휘자의 거부권 행사로 취소된 1993년 빈 필과의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및 R.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등은 반드시 정식 발매되어야 할 것이다. DG 측에서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브람스 4번·슈베르트 ‘미완성’·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 일부를 디스크 한 장에 집합한 앨범을 급거 출시했다. 앞으로도 거장이 남겨 놓은 명품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출처] 객석 : 클라이버의 추억 음악정원 jo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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