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Carlos Kleiber & Concertgebouw Orchestra 1983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4/4박자, 도입부를 가지는 소나타형식

제 2악장 Allegretto 2/3박자, 론도형식

제 3악장 Presto 3/4박자, 트리오를 2번 낀 스케르초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2/4박자, 소나타 형식

작품개요 및 배경

이 곡은 1811년 가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완성되었다. 그 전 교향곡인 6번(1808년 완성) 작곡 이후 3년 이상 교향곡 작곡에서 멀어져 있던 셈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된다. 먼저 1809년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이 빈을 피해 도망을 가 베토벤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창작이 생각되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해 11월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 다시금 연금을 받을 수 있게되고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1809년 무렵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을 알게된다. 1810년 베토벤은 테레제를 위해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 하였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등으로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811년에 접어들어 베토벤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테프리츠로 간다. 이 곳에서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다음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은 테프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교향곡 7번 작곡에 반영되었다. 사실 1811-1812년의 작품은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밝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곡과 초연

베토벤의 스케치 북에 의하면 제 7번 교향곡은 늦어도 1811년에 착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12년에 들어와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제 2악장의 스케치는 이보다 앞선 1806년 현악사중주 작품 59-3의 작곡중에 발견된다는데 아마도 처음엔 이 현악사중주에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 곡의 완성은 1812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라고 적혀있는데 몇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리된다. 베토벤은 1813년 2월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비공개의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공개초연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빅토리아 회전과 웰링턴의 승리> op. 91과 교향곡 8번 op. 93도 같이 초연되었다.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향곡 7번보다 <전쟁 교향곡>이 더 큰 인기를 받긴 했지만 7번도 대호평이었으며 선율이 아름다운 제 2악장은 앙콜을 받기까지 했다.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7이 너무 인기가 높아서 결국 4일 뒤인 12월 12일에 재연되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때마다 제 2악장은 앙콜되었다고 한다. 초연부터 대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곡의 대중성을 그대로 들어내보이는 것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곧 익숙해지는 악상 (2악장)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넘치는 위트 (3악장)와 무엇보다도 광란에 넘치는 1악장과 4악장의 매력이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유명하지만

그중 교향곡 7번은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자극적이고 광란에 넘치며 흥분시키는 베토벤 교향곡 7번..

베토벤의 9개 교향곡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하겠지만 교향곡 7번은 베토벤 교향곡을 하나만 꼽으라는 설문조사에서 높은 득표를 보일 만큼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베토벤은 일찌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라고 했다하는데 그의 수많은 걸작중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그의 7번 교향곡이다. 정말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예외없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또한 술에 취했을 때마냥 용기에 넘치는 힘을 느끼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곡이다. 이곡의 1, 4악장을 가르켜 베토벤이 술에 취해서 작곡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훗날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비꼬았다고 하는 데 이는 '술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틀리듯이 어리석은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말을 돌리면 건강한 취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앞뒤로 꽉 막힌 분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리스트가 이곡을 가르켜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교향곡 7번에 대해 바그너는 [춤의 성화(聖化)]라고 하면서 밝고 명쾌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의 주장에 대한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교향곡 3번이 귓병에 대한 절망을 떨치고, 5번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작곡하였다면, 7번은 전쟁과 실연을 극복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구성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4/4박자, 도입부를 가지는 소나타형식
도입부 전체 관현악의 투티(f)로 시작되서 침착하게 pp로 상승하는 음계가 길게 이어지다 크리센도 되면서 최초의 관현악 폭발은 ff로 이뤄진다. 이어 오보에에 의한 노래이후 다시금 관현악은 ff로 폭발하고 이를 수반한 현의 상승은 관들의 sf로 장식되어진다. 뒤이어 비바체의 도입부 역할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제시부 - 제 1주제 플룻과 오보에에 의해 1악장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리듬이 제시되고 곧이어 플룻이 경쾌한 제 1주제를 노래한다 . 목관에서 바이올린으로 주제가 옮겨지면서 이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참여하여 호른과 바이올린은 제 1주제를 트럼펫과 팀파니및 저음현은 리듬을 노래한다 . 이후 미쳐서 날뛰는 듯한 양상이 되어 간다.
- 제 2주제 플룻과 제 1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제 2주제 역시 역동적인 것이다. 곧이어 겹8분 음표들로 구성된 리듬 부분을 거친후 클라리넷-바순-오보에-플룻으로 이어지는 크리센도후 ff로 종결부로 이어진다.
- 종결부 관악기와 팀파니에 의해 앞서 언급한 그 리듬을 ff로 계속 연주하다 제 1주제에 맞춰 신경질적으로 거듭되는 ff로 제시부를 맺는다. 이 제시부는 악보에는 반복표시되어있으나 70년대 이전 녹음들은 대부분 반복은 생략한다.

전개부 앞의 리듬을 철저히 되풀이하면서 발전되어나가다가 254째 마디에서 트럼펫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클라이막스를 만든후 현에 의해 추스러진다음 재현부로 이어진다.

재현부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충실히 재현한 후 다시 1악장의 리듬에 의한 강한 클라이막스를 ff로 만든 후 p로 음량을 갑자기 줄인 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주요 리듬과 제 1주제로 장쾌한 코다를 만든후 화려하고 통쾌하게 끝을 맺는다.

◆제 2악장 Allegretto 2/3박자, 론도형식
제 1 주제부 목관부가 2마디를 화음으로 울려 안정감을 준뒤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끌리는 듯한 주제를 제시한다. 곧 애수를 띈 이 주제 위에 비올라와 첼로가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한다 . 이후 이 두가지 흐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목관도 참가하야 크리센도 되다가 금관과 팀파니가 ff로 참가하고 클라이막스를 이룬 후 점점 여리게 잦아든다.
제 2주제부 클라리넷과 바순에 의한 온순한 선율이 제 2주제를 담당하고 현이 크리센도로 참가하면서 금관과 목관이 ff로 주고 받으면서 제 1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제 1주제부 (푸가에 의한 작은 전개부 붙임) 앞서의 제 1주제와 선율이 동시에 나타난다.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으로 푸가토풍으로 발전되며 수를 늘려가다 끝에 ff로 투티하고는 종결부로 들어간다.
제 2주제부 (재현) 종결부는 제 2주제부를 재현되다가 코다부분으로 발전된다.
제 1주제부 (최후 제시) 제 1주제를 최후로 들려주면서 마친다.

◆제 3악장 Presto 3/4박자, 트리오를 2번 낀 스케르초
스케르초 주제 갑자기 f로 떨쳐버리듯 거칠게 되풀이 되다가 p로 급변한 주제로 시작된다. 곧 크리센도 되어 ff로 금관과 팀파니가 동시에 사분음표 9개의 리듬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시원한 분위기를 만든후 사분음표 3개의 리듬을 확인시키면서 트리오로 넘어간다. 스케르초를 반복하도록 지시되어있으나 역시 1악장의 제시부처럼 반복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트리오 트리오는 템포가 느려지면서 클라리넷이 노래하는 선율을 기초로하고 있다. 후반부의 큰 클라이막스 이후 다시 스케르초로 넘어간다가 다음과 같이 트리오를 거쳐 다시 스케르초로 돌아온다.
스케르초 주제-재현 트리오 재현-스케르초 주제 반복 후반부에는 프레스토로된 4마디의 ff부분이 종지의 화음을 4번 울린 후 이내 끝난다.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2/4박자, 소나타 형식
제시부 먼저 강하게 4악장의 주제 리듬을 제시해본 후 총휴지, 다시 이를 반복한 후 미친 듯한 제 1주제로 돌입한다. - 제 1주제 바이올린에 의한 제 1주제는 약박에 sf가 표시되어 있고 이와 함께 sf로 관악기들이 강하게 찔러준 다음 관에 의해 4악장 주제 리듬이 제시된다 . 이 리듬은 곧 금관과 팀파니를 위주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 제 2주제 f로 끝맺은 제 1주제부에 이어 단조로 전조된 제 2주제가 바이올린에 의해 제시된다.
- 종결부 ff로 모든 관악기들이 거침없이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가면서 4악장의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전개부로 넘어간다.

전개부 전개부는 제 1주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져 있고 역시 주제 리듬을 강하게 반복하면서 재현부로 넘어간다.

재현부 재현부에서 제 1주제와 제 2주제를 재현한후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 코다는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선율을 주고 받는 가운데 팀파니와 트럼펫이 f로 찔러주면서 점점 긴장을 고조시켜 나가다가 ff로 일단계 폭발이후 결국 fff로 최고조에 이른후 다시 크리센도를 거쳐 두번째 fff로 이어진다. 곧 ff로 모든 관현악의 투티로 장대하게 끝마친다.

2004년 7월 타계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우리에겐 낯설고 생소하지만 음악계에선 카라얀 이상으로 평가받는 지휘자다. 그가 죽자 음악계는 거장 지휘자의 세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평했다.
클라이버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건 카라얀과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라얀은 상업적이고 미디어 지향적, 대중 지향적이었다. 돈이 되면 지휘봉 들고 흔드는 것쯤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라이버는 달랐다. 세상이나 자기 PR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기록이라는 명언처럼, 음반을 낸 적도 드물다.
카라얀이 비정하리만큼 차갑다면 클라이버는 가족을 위해서는 지휘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단원을 이끄는 방식도 독재적인 카라얀에 비해 클라이버는 민주적이고 예의가 넘쳤다. 그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은 평생에 만난 최고 지휘자로 평가했고 그의 음악을 들어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버는 어느 누구보다 리허설을 많이 했다. 악보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은 독보적이었고 음악에 대한 열정, 지식, 경험의 삼위일체에 모두 감탄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워낙 사생활을 드러내기를 꺼렸던 지라 한국 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현지에서도 그동안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작년에 독일에서는 알렉산더 베르너라는 저널리스트가 집필한 최초의 클라이버 전기가 출판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클라이버만을 다룬 최초의 단행본인 것은 아닙니다. 재작년에 뮌혠 대학교의 옌스 말테 피셔 교수가 얇은 비평적 성격의 책을 낸 이후로, 클라이버에 관한 단행본으로는 독일어권에서 2번째로 출판된 책이지요.)
베르너의 전기는 클라이버라는 인물의 음악 연주사적, 지휘사적 의미나 그의 음악 해석에 대해 나름의 비평적 시각에서 쓴 책은 아니라서 '평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동안 상당히 베일에 싸여 있던 그의 생애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고 사실관계를 자세히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어서,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독자들이 요구하는 것을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밑에 적는 글은 전적으로 이 책을 토대로 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려서,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제의를 거절했다"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카라얀 사후, 새로운 상임 지휘자 투표를 앞두고 대다수의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클라이버를 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의중을 떠본 결과 아무래도 거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되어, 하는 수 없이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투표 과정에서는 클라이버가 후보에서 "공식적으로는"배제되었지요.
그러나 그랬음에도 실제로 투표 과정에서는 클라이버에게 표를 던진 베를린 필 단원들이 많았습니다. 득표수만 놓고 보면, 클라이버가 압도적으로 1등이었지요.
그러나 클라이버의 표가 가장 많이 나온 선거 결과는 '무효'로 선언되었고, 그는 '선택'은 되었지만 '선출'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전기를 토대로 전후사정을 좀더 자세히 정리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카라얀이 죽고 새로운 상임 지휘자를 선출해야 했던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클라이버는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단원들의 심적인 분위기가 클라이버 쪽으로 흘러갔던 주된 이유는 독일 연방 대통령이 주최하는 자선 음악회에서 자신들을 지휘한 클라이버에게 엄청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햐르트 폰 바이쯔제커는 대통령이 주관하는 자선 음악회를 정례화시켰고, 이후 이 '자선 음악회'는 후임 독일 연방 대통령들이 주관하는 여러 행사들 가운데에서도가장 중요한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잡았지요. 저도 몇 년 전 당시의 대통령이던요하네스 라우가 주최하는 자선 음악회에서 래틀이 지휘하는 브루크너 9번 교향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그래서 당시 단원 대표였던 알렉산더 베도우와 클라우스 호이슬러는 클라이버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뮌혠에 있는 클라이버의 자택으로 찾아갔습니다.
이 전기의 집필자 알렉산더 베르너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 단원들과 관계자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전말을 재구성해놓았지요. 그중 당시 클라이버를 직접 찾아갔던 베도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호텔에서 그와 만나, 오페라 극장 근처에 있는 그의 단골 선술집으로 갔습니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클라이버가 결코 상임 지휘자 추대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우리 동료들은 그가 수락하리라고 믿고 있었지요. 클라이버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깊은 인상을 주어서, 심지어 그에게 음반 녹음 기피증이 있다는 것도 그를 추대하는 데 전혀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천재였고, 다른 시대에서 온 지휘자 같았습니다. . . . 그는 자기는 레파뚜아가 너무 좁아서 상임지휘자로는힘들다고 이유를 댔지요. 저는 그 후에도 클라이버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을 것입니다. . . .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공간은 클라이버에게는 너무 현대적이었고 객석은 단상에서 너무 가까웠습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제의를 거절했다"는 말에 대해"예, 아니오"로 대답하기 힘든 이유는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의 상임 지휘자 투표 절차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을 경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2사람으로 2차 투표를 벌이는 식의 복잡한 절차는 여러 나라의 공직자 선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는 예비 투표도 있었지요.

당시 베를린 필의 단장이었던 한스 게오르크 셰퍼는 이 예비 투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
모두가 자기가 좋아하는 지휘자를 순서대로 적어 내야 했지요. 그러면 그걸 가지고 비교를 하는 겁니다. 단원 대표가 클라이버는 가망이 없으니 논외로 하자고 분명히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클라이버를 1순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예비 투표가 무효가 되어버렸지요."

다음 글은 전기 집필자 베르너의 글을 직접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를린 랑크비츠 구에 있는 지멘스 빌라에서 정식 투표가 열렸다. 1차 투표에서도 적지 않은 단원들이 클라이버를 1순위로 적어냈고, 로린 마젤이 그 뒤를 이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도 순위에 들기는 했다. . . . 투표는 다시 무효로 선언되었다. 클라이버는 아직도 단원들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단원들은 토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른 주자 게르트 자이퍼트는 설사 클라이버가 추대를 수락하지 않더라도 자기는 클라이버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클라이버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니 그가 선출되었다고 하면, 다른 지휘자들도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 거고, 설사 클라이버가 추대를 거절해서 다음 순위의 득표자를 다시 추대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당사자는 역시 그리 기분 나빠 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악장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베를린 필 단원들 대다수가 처음부터 클라이버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지휘자들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클라이버를 놔두고 다른 사람을 선출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거기서 모욕감을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스타브라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클라이버를 선출하고 그가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면, 그런 일은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 전설적인 솔로 트롬본 주자 크리스트하르트 괴슬링 같은 이는 (이 사람은 지금은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의 학장이기도 합니다)당시 단원들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겪은 고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아주 격심한 오케스트라 세대 교체를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악단을 꾸준히 돌볼 지휘자가 필요합니다. 클라이버가 군계일학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면 악단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최소한 객원 지휘자로라도 부르려고 시도했었지요."
의견이 분분한 논의를 거쳐 결국 단원들은 다시 2차 투표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젤이 되리라는 예상을 깨고 아바도가 마젤을 득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앞서 선출된 것은 이 2차 투표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아바도가 음반사와 체결한 음반 취입 계약 건수가 마젤을 갑자기 월등하게 앞지르게 되었다는 점이 선출의 주된 이유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의 일들은 다들 아시는 내용일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클라이버는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직을 "공식적으로" 제의 받은 적은 없습니다."공식적으로는" 선출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거절"했다는 것은 내용상, 정황상 맞는 말로 보아야 하겠지요.
<출처: 고클래식, dahlemdorf님>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추억하는 헨리 포겔의 글
헨리 포겔|음악 평론가, 미국 오케스트라 연맹 CEO

돌이켜봤을 때,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실제로 지휘하는 모습을 보려 했다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정작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지휘자, 그러나 부인할 수 없도록 세계 음악계에 우뚝 솟은 지휘자가 지난 7월 74세의 나이로 별세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20세기 음악계에서 가장 이상한 수수께끼의 주인공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지휘자가 거의 지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젊은 카를로스는 지휘자로서의 커리어 초창기부터 연주회 무대에 서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연주회는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매번 자신의 지휘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절대적인 완벽의 사운드, 그에 걸맞는 해석을 이루지 못하면 지휘대 위에 설 가치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카를로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를 부친인 위대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탓으로 돌린다. 지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성격의 그는 아들의 지휘에 대해 아버지다운 뒷바라지가 부족했고, 그로 인해 카를로스의 불안정한 성격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에는 카를로스가 지휘하기에 앞서 구토를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85년, 내가 시카고 심포니의 행정수석으로 부임했을 때 클라이버는 이미 1980년대 초반을 통틀어 가장 볼만했던 두 주 동안의 예약제 콘서트(Subscription Concert)에서 지휘하고 떠난 뒤였다. 시카고 심포니의 청중들과 위원회 회원들, 행정 관리들, 그리고 연주에 직접 참여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로부터 그 콘서트가 얼마나 격조 높고 훌륭했던지 듣고 또 들었다.
음반으로 만들어져 살아남은 하루분의 연주를 제외하고는 이 당시의 연주를 직접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시카고 심포니에 다시 초청한다면 소문의 명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시카고에서의 연주(1978·1983년)는 카를로스가 미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유일한 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카를로스는 연주에 만족했고 많은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생의 20년 동안 그는 은둔하면서 세상의 모든 초대를 거부하며 살았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존재를 유일무이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의 아버지보다도 더욱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인은 그의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가 음악의 거인들이 군웅할거하던 시대에 지휘했다는 점일 것이다. 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멩겔베르크·클렘페러·발터· 비첨·몽퇴·스토코프스키·미트로풀로스·쿠셰비츠키·크라우스·크나퍼츠부쉬 등등, 당시 세계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자들로 가득했었다. 대놓고 할 수는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즘은 그 시대와는 다르다. 약 40년 전쯤부터 지금까지 거장 부재의 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됐다는 분석이다.
몇 가지 경우 그의 음악적인 접근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나 또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해석할 때 그가 사용하는 베버식의 접근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거기에 참되고 설득력 있는 음악적 개성이 존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카를로스는 음악계로 비교적 서서히 진입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자란(나치를 피해 이주한 부모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공부했지만 1949년 취리히로 가서 화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50년 남미로 돌아와 음악을 공부한다. 1951년 21세의 카를로스는 독일 오페라하우스의 코치가 됐고, 1954년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이런 그의 전력과 ‘클라이버’라는 이름의 상충된 감정은 그가 데뷔할 때의 가명인 카를 켈러(Karl Keller)에서 잘 드러난다.
1950년대 후반쯤부터 카를로스는 드디어 자신의 이름으로 지휘했고, 1960년대부터는 그의 명성이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오페라극장에서 유명해졌다. 1970년대 중반, 카를로스는 바이로이트의 스타로서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로덕션을 지휘했다. 이 당시의 실황은 해적 음반으로 보존됐는데, 나중에 그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지나치게 공들인 듯한 스튜디오 레코딩보다도 훨씬 선동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해석이다.
1970년대에 클라이버의 명성은 교향악 분야에서도 드높아졌다. 그 명성은 위대한 지휘자로서, 그리고 괴벽스러운 지휘자로서, 두 가지 모두를 의미했다. 그는 장시간의 리허설을 요구했고 느닷없이 잇달아 계약을 취소하곤 했다. 그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결코 예상치 못했던 것까지 다양했다.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연주에 대해 언론의 혹평이 나오자 그는 런던에서는 다시 지휘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 뒤로는 정말로 런던에서 지휘하는 카를로스를 볼 수 없었다.

1980년대에 그는 레퍼토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손에 꼽을 정도로까지 연주곡목을 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에로이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소한 그가 유명해지고 난 뒤 전성기 때 그것을 들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그는 베토벤을 매우 제한적으로 연주했다. 교향곡 4번, 5번, 7번 정도. 다른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버가 조금이라도 연주를 했다면 그 작곡가는 행운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런 기벽과 함께 사람들로부터 달아난 것일까. 그리고 왜 세상이 그에게 지휘를 간청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의 도입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카를로스가 지휘하던 시대, 지휘자들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몰개성의 연주를 보여 주었다. 그 단조로운 음악의 장에 개성적이면서 압도적인 힘과 통찰력을 지닌 음악가 클라이버가 등장한 것이다.
세계인들은 1975년에 그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도이치 그라모폰이 그의 고전이랄 수 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발매한 것이다(빈 필과 1974년에 레코딩했다). 모든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레코딩이었다. 나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뉴욕의 시라큐스에 위치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국의 오너이자 PD로 재직 중이었다. DG에서 온 LP의 포장을 처음 뜯을 때 나는 비아냥거렸었다 “오, 우리가 원하던 그것이군. 또 하나의 베토벤 5번이라니!” 그리고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었다.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때 이 음반의 첫 감상은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레코딩은 여전히 동곡의 스테레오 녹음 중에서 최고 명반 중 하나이다(역시 굉장한 연주인 베토벤 교향곡 7번과 함께 커플링된 CD DG 447 400-2로 구할 수 있다).
이 레코딩이 특별한 이유를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악기 간 밸런스의 디테일, 화음의 조율을 향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집중력과 명료한 텍스처, 완벽한 템포, 상쾌한 어택음과 프레이징의 호흡 등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양상들과 더불어 거기엔 악기들의 질주나 강렬함 같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단원들이 그들의 인생을 건 듯한 연주다. 현은 부지런히 활을 긋고 있으며 목관은 불타는 듯 격렬하게 음을 내고 있다. 금관은 다른 악기들이 궤도를 잃지 않게끔 배려하면서 파워풀하게 포효한다. 이 음반을 들으면 베토벤이 작곡했을 당시 초연됐을 때 청중이 받았을 충격을 함께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클라이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에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단원들은 세부까지 놓치지 않고 듣는 카를로스의 놀라운 귀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악 주자들은 무대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더라도 카를로스는 그들이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똑똑히 듣고 있었음을 확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카를로스가 현악 주자들에게 ‘자유로운 보잉’을 권했는데, 그것은 디테일을 강조하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측면이었다고 한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지휘할 때 쓴 바 있는 ‘자유로운 보잉’이란 말 그대로 활을 쓰는 방식을 연주자들 각자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그 대신 활을 올릴 때와 내릴 때 방향을 일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스토코프스키는 한꺼번에 활을 바꾸면 음악적인 흐름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클라이버는 스토코프스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보잉을 모두 계산해서 적어 두었다. 다시 말해 청중들에게는 활을 올려 긋고 내려 긋는 것이 단원들의 자유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실은 클라이버가 각각의 스트링 파트에 서로 다른 보잉을 명시해 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정되고 정확한 디테일을 끄집어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프랭크 밀러는 이에 강력히 반발해서 악보 사서들은 첼로 파트 악보를 그로부터 지켜야 했다. 걸핏하면 클라이버의 보잉 지시를 삭제하고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을 적어 놓곤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클라이버는 즉시 시카고를 떠났다고 한다.
지난 50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모든 객원 지휘자들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의 악단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을 보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클라이버다.

위에 언급한 대로 베토벤 CD 외에도 카를로스의 재능의 전모를 드러내는 레코딩을 약간 더 찾아볼 수 있다. 골든 멜로드람 레이블에서 발매된 4장으로 구성된 세트(GM 4.0043)에는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실황이 수록돼 있는데 슈베르트 교향곡 3번, 버터워스의 ‘영국 목가’ 1번, 그리고 뜨거운 베토벤 교향곡 5번이 담겨 있다. 이 세트에는 또한 슈투트가르트·쾰른 ·빈 등에서의 연주도 들어 있는데, 보로딘 교향곡 2번, 하이든 교향곡 94번,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이 그것이다. DG의 베토벤 5·7번과 함께 클라이버 지휘의 관현악곡을 섭렵하는 데 필수적인 음반이다.
그는 DG에서 몇 편의 뛰어난 오페라 음반을 녹음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두 편의 오페라는 모두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1970년대 라이브 레코딩이다.

첫 번째는 플라시도 도밍고·미렐라 프레니·피에로 카푸칠리의 ‘오텔로’(1976)이다. 도입부의 폭풍우 장면부터 불을 뿜는 연주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저변에 깔린 운명과 비극을 의식하고 그 불가피성의 관성으로 오텔로의 죽음 장면에까지 몰고 간다. 이 연주는 뮤직 앤 아츠 등 여러 레이블에서 발매됐다(내가 가진 것은 Exclusive EX92T 08/09이다). 이보다 더 인상적인 음반은 푸치니의 ‘라 보엠’이다. 이 연주 역시 몇몇 레이블에서 발매됐다(역시 Exclusive 음반으로 가지고 있는 EX92T 01/02). 이 1979년 연주에는 파바로티·코트루바스· 카푸칠리 등이 노래했으며, 무제타 역에는 루치아 폽이 분하고 있다. 내가 들었던 연주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캐스팅이다. 당신이 ‘라 보엠’에서 원하던 모든 것들이 여기 있다. 다정함, 유머, 깊이 있는 열정, 비탄, 고통, 모두가 있다. 라 스칼라 필은 무엇에 홀린 듯이 연주하고 있고, 클라이버는 스타 가수들을 녹여 하나의 앙상블로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서 파바로티는 배역을 노래하는 파바로티가 아니다. 처음으로 자신이 로돌포 자체가 되고 있다. 그의 미미와 또 다른 등장인물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파바로티는 진정으로 배역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클라이버는 이 같은 분위기를 소중하게 유지시키며 파바로티를 향한 찬사를 대신하고 있다.
향년 74세.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죽음은 모든 음악 애호가들의 슬픔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너무나도 드문 진정한 거인을 잃었다. 더욱 슬픈 것은 지난 20년 동안 그의 무대가 너무나 드물었고, 그로 인해 그가 남긴 유산의 폭과 범위가 더욱 축소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천재가 남긴 음악을 길이 향유할 수 있음을.
브라보!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마이뉴스 정윤수 기자]'헤이리 음악 소풍' 때문에 베토벤의 음반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번 주말 예정인데, 실은 사회학자 김종엽 선생에게 '모짜르트 소풍'을 부탁하였으나 원고 사정으로 연기되고 내가 대신 맡은 것이다. 이 일도 원래는 음악평론가 강헌 선생의 몫이었으나 그는 지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다.
대책없이 떠맡고 나서 베토벤 음반을 정리하던 중인데, 아뿔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6일, 모친의 고향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한 그는 역시 슬로베니아 출신인 아내의 묘지 옆에 지난 10일 안장됐다고 한다. 향년 74세.
그리하여 몇 자 적는다.

클라이버를 위하여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대척점에 있던 카라얀이다. 20세기 후반의 클래식에 있어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만한 카라얀의 생애는 확실히 은둔자 클라이버와 거리가 있다.
카라얀은 클래식이 20세기 전반기의 '실황 연주'에서 세련된 녹음과 '스타 마케팅'으로 옮겨가는 지점을 절묘하게 파악했으며 이를 그 누구보다 최상의 수준에서 활용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자신의 지휘하는 장면을 녹화했으며 최첨단의 스튜디오에서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수십차례 녹음했다. '클래식=카라얀'이라는 음반 마케팅의 공식을 그는 입증하였다.
반면에 클라이버는 스튜디오 녹음 대신 연주회장의 라이브를 절대적으로 존중하였다. 그의 음반은 손을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라이브를 녹음한 것이다. 감상자에게는 불과 대여섯 장만 구입해도 되는 뜻밖의 기쁨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조금이라도 빈 틈이 보이면 녹음은 물론 실황 연주마저 취소했으며 음반 산업자와 언론의 관심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두 번째 인물,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카라얀에 비해서도 음악사적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는 멩겔베르크나 푸르트뱅글러처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시대의 지휘자로 현재 들을 수 있는 그의 음반은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히틀러의 전성 시대. 모차르트 오페라에 있어 불멸의 유산을 남긴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러나 히틀러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예술가에 대한 탄압에 절정에 이른 1935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 '칼'의 이름을 아버지는 남미식으로 '카를로스'라고 바꿔버렸다. 파시즘에 대한 뼛 속 깊은 저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대신 카라얀의 시대가 열렸다. 푸르트뱅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 파시즘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독일 음악의 유산'이 카라얀에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인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등장한다. 독일 음악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인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남았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중에야 몇몇 기록과 증언에 의하여 복권되지만 그가 베를린 필에 다시 서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스튜디오 녹음이 서서히 대세를 확보해가는 시절에 푸르트뱅글러는 오로지 '라이브'을 고집하였으며 복권 후 몇 해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적 제사장으로 최후의 명연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의 운명은 카라얀 쪽으로 기울었다. 1933년에 나치에 입당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빈 국립오페라극장, 베를린 필 등을 독점하다시피 한 카라얀은 그러나 놀랍게도 47년에 해금되었으며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전성기를 열었다. 클래식이 '레코딩' 산업과 판촉 활동을 겸한 연주회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월터 레그는 레코딩 전문악단 필하모니아를 설립해 카라얀에게 맡겼고 이후 카라얀은 스튜디오 시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죽고 말았다. 푸르트뱅글러는 한사코 '히틀러 군악대장'에게 독일 음악의 유산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도 카라얀과 대척에 섰으나 그마저도 56년에 사망하고 만다. 남은 사람은 브루노 발터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콜럼비아 교향악단으로 명연을 남기고는 역시 노환을 이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5년에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직까지 맡아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그 무렵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1974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통해 뒤늦게야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그는 단 한번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을 2년 쯤 맡은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상임이나 무슨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뮌헨, 빈, 류블랴냐 등의 교향악단과 연주를 했지만 전속은 맺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휘자였고 음악가였다. 89년에 카라얀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정작 클라이버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세상 밖에 머물렀다.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 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클라이버의 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대신 카메라, 마이크, 음향 설비를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을 그는 기피했다.
어쩌면 카라얀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말일 수도 있다. 뛰어난 지휘자이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연출자이자 20세기 음반산업의 마케팅 팀장이기도 했던 카라얀에 비하여 어쩌면 클라이버는 19세기에 형성된 서구 클래식의 마지막 정통파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악의 주술적 요소를 존숭했다는 점. '라이브'가 갖는 일회적인 엄숙성, 피날레가 끝나면 박수에 묻혀 영원 속으로 저장되는 '실황 연주'의 숙명에 대하여 클라이버는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에 불려가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지휘해야만 했던 푸르트뱅글러가 일체의 스튜디오 녹음을 거절한 것처럼 클라이버는 적어도 베토벤에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의 현장성과 일회성, 요컨대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영원히 소멸하고 마는, 그러나 단순히 '공기의 흔들림'으로 그치지 않고 부채꼴의 연주자와 말굽형의 관객들 사이의 한 정점에 서서, '영원 속으로 소멸'하는 음악적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그는 맡았던 것이다.
클라이버의 불가피한 선택은 틀림없이 음악 산업이라는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음악적 가치와 명성은 높아졌으며 은둔할수록 세상은 더욱 그를 원했다. 관습적인 데뷔, 상투적인 레코딩,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연주회 등으로 오늘날 클래식 산업은 오히려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는데 그 화려한 패잔병들 틈에 끼지 않고 클라이버는 은둔과 사색의 만년을 선택했던 것이다.
몇 장의 음반만 남기고 그는 떠났다. 당연히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음반이 아니라 세속을 거절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예술가'로 버틴 그의 생애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이채롭게도 제작사인 '오르페오'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제 듣게 될 4악장의 마지막 대목과 열렬한 박수는 고인이 된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이 세속 도시의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장송이 될 것이다. 정윤수 기자

내가 접했던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연주
우리와 호흡하며 살아 있었던 전설
교 미츠토시|음악 평론가, 게이오대학 부교수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초연한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였다.
젊은 카를로스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부친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카를로스는 유명한 취리히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음악도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그 몇 년 뒤 그는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보수도 없이 일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포츠담·뒤셀도르프·취리히·슈투트가르트 등지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이따금 그는 가명으로 오페레타를 지휘해야 했다. 부친이 알면 격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972년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둔다. 이 작은 바그너 마을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3년 동안 지휘했다. 그의 ‘트리스탄’은 이 사랑의 드라마를 극도로 열정적이고 뜨겁게 만든 연주였다.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의 멤버들과 청중들에게 이 훌륭한 연주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1970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푸치니 ‘라 보엠’,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오텔로’ 등을 지휘했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 기사’는 특히 명망이 높았다. 이 작품들은 카를로스의 장기 레퍼토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런던과 밀라노에서도 이렇게 세심하게 선택한 레퍼토리만을 공연했다.
클라이버는 1980년 이래 가장 센세이셔널하고 전설적인 지휘자일 것이다. 그는 단지 손으로 헤아릴 만큼 적은 수의 몇 가지 작품들, 즉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오페라들과 몇 가지 교향곡들(베토벤 교향곡 4번과 7번, 브람스 교향곡 2번과 4번, 모차르트 교향곡 34번 등)만을 지휘했다. 그는 뮌헨이든 베를린이든 빈이든 시카고든 도쿄든 그 어디에서나 이 레퍼토리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연주했다. 가끔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다른 작품들을 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베토벤 ‘전원’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등등. 그는 간혹 드물게 이들 작품을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 레퍼토리들은 연주를 준비했다 하더라도 콘서트 직전 혹은 리허설 중에 연주를 취소하기 일쑤였다. 그가 왜 그렇게 수줍음을 탔는지, 자신감이 없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위대한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로부터의 심리적인 압박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카를로스는 잦은 공연 취소로 매우 유명해졌다. 그는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본 투어나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 등 큰 프로젝트 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그는 다른 음악가들을 잘 주도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했다고 한다.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모두가 그를 초청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클라이버의 답변은 언제나 아주 비관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휘할 악단을 선택하게 됐는데,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이 그것이었다.
빈 필하모닉의 단원들에게 클라이버는 경모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빈 필을 지휘할 때 안절부절못했다. 베를린 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시카고 심포니 등 명문 관현악단들도 몇 차례 지휘를 해 본 뒤로는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했다.
죽음 예견한 사르데냐 라스트 콘서트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다른 지휘자들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콘서트홀이나 오페라하우스에서 들어 봤다면 그 차이는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를로스의 음악은 언제나 극도로 뜨겁지만 난폭하거나 거칠지 않았다. 몹시도 예민하지만 엄격하지는 않았다. 자유롭고 유동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자연스러웠다. 거기엔 언제나 두드러진 감성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는 레코딩보다는 훨씬 많은 작품들을 지휘했지만, 그는 레퍼토리의 협소성 면에서 볼 때 유일무이한 지휘자다. 가령 그는 말러의 교향곡에 매료됐었고 복잡한 스코어를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 빈 예술 주간 때 지휘한 ‘대지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말러 교향곡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점차로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잃어 갔던 것이 아닐까. 모든 단원들과 청중들이 그토록 그를 사랑했건만 1980년대 후반, 그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를 떠났다(그는 나중에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지만 뮌헨에서는 아니었다). 이후, 그가 어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베를린에서, 한 번은 인골슈타트(뮌헨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본사가 그곳에 있다)에서, 한 번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빈에서 몇 번 지휘를 하곤 했다. 그가 연주 횟수를 줄일수록 그가 벌어들이는 액수는 커져 갔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를 아주 희귀한 보석들과 동일시했다.
커리어 말기인 1998년과 1999년에 카를로스는 카나리아 제도와 사르데냐 섬에 나타났다. 둘 다 작렬하는 태양과 푸른 바다가 있는 전형적인 유럽 남쪽 지방의 섬이다. 이 두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카를로스의 모든 공연 계획은 전면 취소됐다.
1983년부터 1999년까지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콘서트와 오페라들을 다수 관람했다. 그는 내게 가장 중요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내가 음악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카를로스 클라이버 때문이다. 18세 때 뮌헨에서 그의 ‘장미 기사’를 관람했을 때였다. 얼마나 섬세하고 정력적이며 화려하고 도취적인 연주였던지. 마치 꿈을 꾸는 듯 느껴졌었다.
이후 나는 카를로스에 심취했고, 열광했다. 그러나 그건 단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음악 애호가들, 심지어는 전문가들조차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열중했던 것이다. 가령 현재 가장 저명한 지휘자 중 하나이며 원전연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프란스 브뤼헨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유일한 음악가”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궁금하다면 베버 ‘마탄의 사수’의 서곡과 그 이후의 음악 전개를 들어 보라. 아마도 당장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드라마틱한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연주를 들어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푸르트뱅글러에 비견하곤 한다.
사르데냐에서 카를로스의 라스트 콘서트를 참관했을 때, 그는 늙고 지쳐 보였다. 음악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인상적이지 못했다. 들으면서 내내 ‘카를로스는 이제 스스로 은퇴하겠구나 혹은 운명에 의해 사라지겠구나’ 하고 예감했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정말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클라이버의 연주가 담긴 방송 녹음들과 CD 제작자들이 많이 존재하리란 점이다. 카를로스는 이 녹음들의 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첼리비다케가 그러했듯이 이 녹음들은 곧 음반 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더불어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음악가였다. 동시대를 호흡하며 전설의 반열에 오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류태형 기자(mozart@)

|?음반으로 남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유산
레코딩 완벽주의자가 남긴 진정한 명품
이영진|음악 칼럼니스트

“나에게 있어 녹음 발매를 허락하는 것은 일종의 공포감을 수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라 고백했듯 클라이버는 평생토록 레코딩 기피증에 시달렸다. 음악적 완벽주의에 신경과민증 성격이 더해져 기인한 것이리라. 그래도 스튜디오반과 영상물, 몇 종의 비정규 앨범을 합치면 거장이 지휘했던 레퍼토리 대부분을 섭렵할 수 있다. 먼저 관현악 장르. 제일 중요한 작곡가는 베토벤으로 교향곡 4·5·6·7번을 연주했다. 1974년에서 1976년 사이 빈 필과 녹음한 ‘운명’ 및 7번(DG)이 상쾌한 스피드감으로 장전된 명반. 1982년 카를 뵘 추도 콘서트 라이브인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4번(Orfeo)도 다이내믹하고 폭발적인 열연이다. 1983년 로열 콘서트헤보를 지휘한 4·7번 영상(Philips)에서는 신명 나게 바통을 휘두르는 클라이버의 춤추는 듯한 자태를 볼 수 있다. 반면에 작년 말 발매된 1983년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6번 실황(Orfeo)은 좋지 못한 음질로 논란이 됐다.
1980년 빈 필을 지휘한 브람스 교향곡 4번(DG)은 대담한 강약의 콘트라스트와 극적 추진력으로 작품에 신선한 비전을 부여한 역작이다. 같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슈베르트 3번 및 ‘미완성’(DG)에서도 관습의 찌꺼기가 철저히 씻겨져 있다. 스타일리시한 모차르트 ‘린츠’와 생기발랄한 브람스 2번이 커플링된 1991년 빈 필 라이브 영상(Philips) 또한 출중하다. 빈 필을 지휘한 연주라면 1989년과 1992년의 신년 음악회(Sony)를 잊을 수 없다. 유려한 프레이징, 용수철 같은 비트가 발군이다. 해석상 논쟁으로 취소될 뻔했던 1989년보단 1992년 쪽이 더 자연스럽다. 보로딘 2번·말러 ‘대지의 노래’는 부틀렉(Golden Melodram)으로만 들을 수 있는 작품. 1969년 ‘박쥐’ 서곡 및 1970년 ‘마탄의 사수’ 서곡의 리허설과 실연을 수록한 DVD(Pioneer)는 스코어의 세부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클라이버의 진지한 모습을 포착한 귀한 자료이다.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이 파트너이다. 협주곡 녹음은 단 하나. 리히테르를 반주한 드보르자크 피아노 협주곡(EMI)이 그것이다.
오페라 분야에서 인기 높은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1975년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의 스튜디오반(DG), 1986년 뮌헨 국립극장 실황 영상(DG),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양자 공히 약동하는 리듬과 흥청망청한 축제 분위기, 호화로운 배역진으로 꾸며져 있으나, 이 곡은 DVD로 시청하는 편이 재미있다. ‘천둥과 번개’ 폴카에 맞춰 대소동이 벌어지는 2막 피날레가 관람자를 포복절도하게 한다. 클라이버의 데뷔 레코딩인 베버 ‘마탄의 사수’(DG)도 전설적인 음반이다. 관록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자존심 드센 독일계 보컬들을 맘대로 주무르고 있다. 연주 내내 관통되는 긴장감이 특필할 만하다. 슈트라우스 ‘장미 기사’는 영상물로만 두 편 존재한다. 1979년 바이에른 국립극장 실황(DG)과 1994년 빈 국립오페라 라이브(DG)가 그들로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대단히 우미하고 화려하다. 프라이스가 주연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DG)에선 로맨틱한 관능성을 탐닉하기보다는 모던한 미감 표출에 주력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튜디오 레코딩으론 1976년에서 1977년 사이 바이에른 국립관현악단과 연주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DG)가 있다. 일레아나 코트루바스를 비롯한 캐스팅 전원이 쟁쟁하지만, 무엇보다 의표를 찌르는 듯 자극적인 클라이버의 리드가 일품이다. ‘오텔로’는 비공식 음원으로만 네 종 유통된다. 애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절찬하는 연주가 1976년 라 스칼라 극장 라이브(Music&Arts). 도밍고·프레니·카푸칠리 등 당대 최고의 명가수들이 거장이 설치해 놓은 치밀한 복선을 따라 질투와 파멸의 드라마를 처절하게 연기해 낸다. 푸치니 ‘라 보엠’ 역시 비정규 녹음이 5편. 1979년 라 스칼라에서 상연된 3월 22일 실황(Exclusive)과 30일 실황(Golden Melo- dram)이 막상막하라 전해진다.
이제 클라이버가 작고했으니 레코딩 허가의 끈을 조금은 늦출 필요가 있다. 1979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비제 ‘카르멘’, 소니에서 LD로 나올 예정이었다가 지휘자의 거부권 행사로 취소된 1993년 빈 필과의 모차르트 교향곡 33번 및 R.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등은 반드시 정식 발매되어야 할 것이다. DG 측에서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브람스 4번·슈베르트 ‘미완성’·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 일부를 디스크 한 장에 집합한 앨범을 급거 출시했다. 앞으로도 거장이 남겨 놓은 명품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출처] 객석 : 클라이버의 추억 음악정원 jo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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