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학부모였던 이희호 여사의 초대장을 받고...
이희호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에 부치는 객담

박도 (parkdo45)



▲ 이희호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회 초대장 겉그림
ⓒ 이희호이희호






횡성 안경집에 가다



그 언제부턴가 나는 돋보기안경이 없으면 한 줄의 글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그저께 내가 부주의한 탓으로 안경다리를 부러뜨렸다. 내가 사는 산골마을과 가까운 안흥 장터마을에는 안경집이 없는 탓으로, 외출차비를 하고 안경을 맞춘 횡성읍내에까지 가고자 버스를 탔다.



만일 부러진 안경다리를 고칠 수 없다면 이참에 하나를 살 셈으로 농협에 들러 빈 지갑을 채웠다. 횡성읍내 단골 안경사에게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꺼내놓자 그는 고칠 수 없다고 딱 잘랐다. 그래 값을 물었더니 새로 안경을 맞추려면 5만원이 든다고 하였다. 꼭 일 년 새 1만 5천원이 인상됐다.



애초에는 다시 맞춰 쓸 생각으로 안경점을 들렀지만 순간 물가가 너무 오른 게 내심 화가 났고, 그대로 버릴 안경알이 아까워 안경테만 바꿔달라고 했더니, 그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안경테를 바꾼 뒤 1만 5천원을 주고 안경점을 나오자 안흥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막 출발하여 다음 차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집에서 떠날 때는 돌아오는 길에 안흥장터에 내려 단골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기로 하였다. 그런데 차 시간이 한 시간이나 더 남아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그만 횡성에서 이발하기로 하였다. 안흥 단골 스마일이발관 이발사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언젠가 한번 머리를 손질한 적이 있는 횡성군청 앞 궁전이발관을 찾았다.이발사는 나를 용케 알아보고는 주말에 뭔 좋은 일이 있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냥 차 시간도 남고, 머리가 길어 자른다고 건성으로 대답해 버렸다. 사실은 오는 11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한 출판모임에 초대받았기에 미리 이발을 하는데, 그 사연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강원도 산골 노인이 별 실없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비칠 것 같아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내내 날씨와 올 가을 추수 이야기만 나눴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지난달 월말 버스 안에서 손 전화를 받았더니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자서전 출판준비위원이라는 분이 "이희호 여사가 정중히 우리 부부를 초대한다"며 초대장을 발송하려고 하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며칠 후 안흥 내 집으로 초대장이 왔다. 아내는 예상대로 참석치 않는 게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즈음에는 연탄불 가는 일에, 고양이 밥 주는 일 등, 어느 한 사람은 집을 지켜야 한다. 사실 그동안 숱한 학부모가 우리 부부를 점심이나 저녁에 초대했지만 동행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는 택시기사 학부모가 아들 대학합격에 감격해 내 집까지 차를 몰고 와 간청해도 끝내 사양했다.



내가 세상을 오래 산 탓인지 참 세상은 변화무쌍하고,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땔감이 없어 낫을 들고 구미 금오산 기슭으로 푸나무를 하러 가서 다 떨어진 고무신을 패대기치며 신세타령을 하던 어떤 아낙네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국무총리 장모에 대통령 형수가 되어 고래 등 같은 대저택에서 여러 하인들을 두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끗발 좋게 사는 것도 봤고, 사형수 아들이 대통령의 아들이 되고, 나는 새도 떨어트릴 대통령이 푸른 수의를 입은 일도 보았다.



그뿐인가. 잘 나가던 고관이 줄줄이 굴비두름에 묶이듯 묶여 교도소로 가는가 하면, 전현직 지자체 단체장도, 심지어 전직 대법원장까지도 한강에 투신했다는 보도도 봤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지위에 올랐다는 게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가 하면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중퇴한 가난한 제자가 많은 세월이 지난 뒤 내 앞에 왕자처럼 나타나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럽게 만든 적도 있었고, 낯선 LA 공항에 카메라를 메고 취재 나온 제자도, 일주일간 일본측의 초청 귀빈 여행에 안내자가 된 제자도 있었다.



사형수의 아들





▲ 이대부고 재직시절의 필자
ⓒ 박도박도



이희호 여사의 아들 김홍걸 군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3월로 그때 그의 아버지는 이름 석 자를 신문에 쓸 수 없었던 연금 정치인이었다. 곧 10 ·26 사태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여 유력한 대권 후보자로 반짝하더니 곧 사형수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머루빛 같은 눈망울만 초롱초롱할 뿐이었다. 그가 1-2반일 때 나는 1-3반 담임이었고, 내가 2-2반 담임일 때 그는 2-1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국어 교과를 지도했기에 단위수가 많아 거의 매일 수업시간에 그를 만났다. 내가 교과 이외 역사 이야기를 할 때는 그의 머루빛 눈망울이 더욱 반짝거렸다.



그가 2학년으로 진급할 때 1학년 때 내 반이던 '김대중' 학생이 하필이면 그의 반이 되었다. 그러자 그의 새 담임(고용우 선생)이 나에게 김대중 학생을 내 반으로 데려가고, 대신 다른 학생을 보내달라고 하여 개학 전에 두 학생의 반을 바꾼 적이 있었다.



그의 담임 고용우 선생은 생각이 참 깊었던 인격자로 지금은 보스턴 근교에서 호호 백발 노인으로 노후를 보내시고, 김대중 학생은 지금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때 나는 학교 교지 편집지도 교사였는데, 좋은 작품을 싣고자 1981년 가을에 교내 문예현상 모집을 했다. 공모 마감 전날 학교에 등교하자 내 자리에 흰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 봉투에는 대학노트를 찢어 거기다가 시를 두 편 써서 현상문예에 투고한 작품이 들어있었다.



여수(旅愁)



고2 김홍걸



영원의 역전에서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빈 가방을 들고 서성대는 마음은

미지의 이웃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저마다의 행로가 달라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영혼의 닮은 사람을 찾아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외면해버린다.



시간을 놓친 티켓처럼

인생이 쓸쓸해 웃는다.



가을



고2 김홍걸



무덤 뒤켠에 사는 시인은

거리에서 잔뜩 취하고는

곧잘 이곳을 지나간다.



그때마다 그는

들국화 따위를 짓밟고는

영원의 꿈에 젖고 싶었지만



그런 풍성한 가을은 이제

이 근처엔 없었다.



그 근처에 낯선 화가 하나가

맥 빠진 그림 같은 걸 그리고 있었다.



- <우리생활 17호> 1981. 2. 5



옛 스승의 당부





▲ 영부인 시절 친필로 보내온 연하장 겉봉투
ⓒ 박도박도


공모 마감 날 작품을 추려보니 시 부분에 20여 편이 응모했다. 그날 나는 퇴근을 미룬 채 교무실에서 그 작품들을 읽는데 사형수의 아들이 자꾸만 눈에 어렸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사형수로 언제 사형 집행이 될지 모를 명재경각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장원에 올려주는 게 사형수 아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를 구원하며, 어쩌면 장차 시인의 길로 인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원고 위에다 붉은 사인펜으로 '장원'이라고 큰 글씨를 쓰고는 퇴근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28년 전의 일이다.



세상의 어머니는 자식 일이라면 모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때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고, 그 부인이 영부인이 된 뒤, 나는 두 번 연하장과 감사장을 받았다. 하지만 한번도 만나 뵌 적도, 볼펜 한 자루 선물 받은 적도 없다.



이번 초대에 나는 일찌감치 머리를 깎고 차비를 차리고 있다. 학생 졸업 후 28년 만에 학부모로부터 저녁 한 끼 대접을 받는 것은 아마도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두보의 시구처럼 피차 꽃 지는 시절에 만나는 것은 낙조의 아름다움처럼 장엄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날 그 자리에서 옛 제자 김홍걸 군을 만나면, 나는 그가 이 땅의 시인으로나, 아니면 통일운동가로 남북을 오가면서 통일을 앞당기는 그런 일을 드러나지 않게 하거나, 현대사 특히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그런 학자가 되기를 권유하고 싶다.

그래서 이번에 내가 펴낸 구한말 의병 이야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와 지난번에 펴낸 중국대륙에 흩어진 선열들의 발자취 <항일유적답사기>를 초대에 대한 답례품으로 전할 예정이다.


그가 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의 문사나 학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박도(parkdo45)


출처 : 한때 학부모였던 이희호 여사의 초대장을 받고...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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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즐겨 부르던 번안곡
01)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 - Anthony Quinn & Charlie
아빠의 말씀/최불암,정여진
02) L'immensita - Johnny Dorelli, Milva 눈물속에 피는 꽃/한경애
03) Living Next Door to Alice - Smokie그대 떠난 이밤에/옥슨 80
04) Lo Mucho Que Te Quiero - Rene & Rene더욱 더 사랑해/트윈폴리오
05) L'orphelin - Claude Jerome고아/윤연선,오세은
06) Luna Llena - Los Tres Diamantes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블루벨즈
07) Lost Love - Bobby Darin잃어 버린 사랑/트윈폴리오,최영희
08) Love Story - Nana Mouskouri사랑의 이야기/하남궁
09) Love Portion No.9 - The Searchers사랑의 향수 제9 번/이태신
10) Lullaby - Yosefa빗나간 사랑/김찬

11) Luna Rossa - Caetano Veloso루나 롯사/최양숙
12) Magia - Massimo Ranieri 내 생애 단 한번만/조영남
13) Mary Hamilton - Marie Laforet, Joan Baez 아름다운 것들/양희은
14) Me T'aspro Mou Mantili - Nana Mouskouri 하얀 손수건/트윈폴리오
15) Mi Casa Su Casa - Perry Como 너와 나의 집/뚜와 에 무와
16) Mon Coeur Est Fou - Dalida 첫사랑/펄씨스터즈
17) My Melody Of Love - Bobby Vinton 비개인 오후/윤복희
18) My Way - Frank Sinatra 마이 웨이/패티김,이현
19) Never on Sunday - Connie Francis 일요일은 참으세요/모니카유
20) Next Door To An Angel - Neil Sedaka 별 이야기/허림

21) Non Ho Leta - Gigliola Cinquetti 나이도 어린데/조애희
22) Non Ti Scordar Di Me - Gigliola Cinquetti 물망초/은희,최양숙
23) Oh, Rock My Soul - Peter, Paul & Mary 참 예쁘네요/현경과 영애
24) Okie from Muskogee - Merle Haggard철 날 때도 됐지/사월과 오월,서유석
25) One More Cup of Coffee - Bob Dylan 떠나지 말아요/양병집
26) One Way Ticket - Eruption 날 보러와요/방미
27) Over and over - Nana Mouskouri 사랑/송창식
28) Padam Padam Padam - Edith Piaf Padam Padam Padam/최양숙
29) Padre - George Baker Selectio 파드레/패티김
30) Paloma Blanca - George Baker Selection 비에젖은 비둘기/이승연

31) Papa - Paul Anka 아버지/이승연
32) Papa Aime Maman - Caterina Valente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
33) Parlez-moi D'amour - Juliette Greco 사랑한다고 말해 주어요/최양숙
34) Pearly Shells - Connie Francis진주 조개잡이/
박재란,정씨스터즈,화니씨스터즈
35) Petite Fleur - Charles Aznavour 귀여운 꽃/정씨스터즈
36) Pretty Blue Eyes - Steve Lawrence 푸른 눈동자/블루진
37) Pretty Little Baby - Connie Francis 귀여운 베이비/김계자
38) Playground In My Mind - Clint Holms 어린 시절/이용복
39) Plaisir D'Amour - Nana Mouskouti 사랑의 기쁨/트윈폴리오
40) Pokarekare Ana - Kiri Te Kanawa 연가/바블껌

41) Sans Toi M'amie - Adamo 쌍뚜아 마미/은희
42) Save Your Kisses For me - Brotherhood Of Man
사랑,그 아름답고 소중한 얘기들/송골매
43) Saved By The Bell - Bee Gees 구원의 종소리 / 김세환
44) Scarbrough Fair - Simon & Garfunkel 스카브로우의 추억/뚜아 에 무아
45) Scarlet Ribbons - Harry Belafonte 빨간 댕기/서유석
46) Seven Daffodils - Brothers Four 일곱송이 수선화/양희은
47) She Bop - Cyndi Lauper 오빠/왁스
48) Sheila - Tommy Roe 햇빛 쏟아지는 들판/장계현
49) Silver Threads Among The Gold - Foster & Allen 은발/은희
50) Sinno Me Moro - Alida Chelli 죽도록 사랑해서/최양숙

51) Snake - Al Wilson 최진사댁 셋째딸/조영남,이은하,나훈아
52) Sombre Dimanche - Damia 우울한 일요일/조영남
53) Somewhere My Love - Andy Williams 내 사랑 어디로/트윈폴리오
54) Sous Les Ponds De Paris - Juliette Greco 파리의 다리밑/최양숙
55) Stringiti Alla Mia Mano - Miranda Martino 고별/홍민
56) Stoney - Lobo 무뚝뚝한 사나이/김세환
57) Summer Wine - Nancy Sinatra & Lee Hazlewood 썸머와인/뚜아에무아
58) Sundown - Gordon Lightfoot 황혼/석찬
59) Sympathy - Rare Bird 연민의 정/하남석
60) Tell Her Bye - Bonnie Guitar 그대 안녕히/서유석

61) Tell Laura I Love Her - Ray Peterson 영아는 내사랑/한상일
62) Ten Guitars - Engelbert Humperdinck 춤 추는 첫사랑/이현
63) Tennesse Waltz - Patti Page 테네시 왈츠/현미
64) The Banks Of The Ohio - Olivia Newton John 내고향 충청도/조영남
65) The Last Farewell - Roger Whittaker 어느 사랑의 이야기/윤형주
66) The Last Thing On My Mind - Marianne Faithfull 마지막 남은 것/산이슬
67) The Music Played - Matt Monro 음악은 흐르는데/하남궁
68) The Palace Of Versailles - Al Stewart 사랑한 후에/전인권
69) The River In The Pines - Joan Baez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정미조
70) This World Today is a Mess - Morris Albert 사랑의 이야기/김씨네

71) Till - Tom Jones 사랑의 맹세/패티김
72) Time - Glen Campbel 세월/뚜아 에 무아
73) Tombe La Neige - Adamo 눈이 내린다/최양숙,김추자,이숙
74) Tomorrow Is a Long Time - Bob Dylan 참 사랑/이연실
75) Top Of The World - Carpenters 나의 소망 / 박인희
76) Trojan Horse - Luv 트로이 목마/이영화
77) Unchained Melody - Righteous Brothers 오! 진아/박일준
78) Unchain My Heart - Joe cocker 내마음을 풀어주오/이태신
79) Valse D'ete - Adamo 지난 여름의 왈츠/최양숙
80) Viens viens - Marie Laforet 비야 비야/박인희

81) Porque Te Vas - Jeanette 생각/김보연
82) Primo Bacio Che Daro - Gigliola Cinquetti 첫사랑의 눈물/김추자
83) Puppy Love - Paul Anka 철없는 사랑/임용재
84) Qui A Tue Grandmaman - Michel Polnareff 오월가/민중가요
85) Que Sera - Jose Feliciano 케 세라/트윈 폴리오
86) Quizas, Quizas, Quizas, - Trio Los Panchos 키사스 키사스/심수봉
87) Rivers Of Babylon - Boney M 강변의 추억/들고양이
88) Saddle the wind - Lou Christy 바람에 실려/하남석
89) Sad Movie - Sue Thompson 새드무비(슬픈 영화) / 정씨스터즈
90) Fransisco - Scott Mckenzie
샌프란시시코에 가 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펄씨스터즈

91) Volano Le Rondini - Gigliola Cinquetti 내 마음 제비처럼/물레방아
92) Volevo Un Gatto Nero - Vincenza Pastorelli 검은 고양이 네로/박혜령
93) Visions - Cliff Richard 그리운 그대 모습/정유경
94) Washington Square - The Ventures 워싱톤 광장/정씨스터즈
95) Wedding Cake - Connie Francis, Jeannie C. Riley 웨딩케익/트윈폴리오
96) Weep For Jamie - Peter Paul & Mary 잃어버린 전설/양병집
97) We'll Be One By Two Today - Lobo 우리함께/이용복
98) What Am I Living For - Animals 누구를 믿고 살란 말입니까/양미란
99) Ace Of Sorrow - Brown & Dana 슬픈 운명/트윈폴리오
100) White house (Casa bianca) - Vicky Leandros 하얀집/정훈희, 펄, 패티김

101) When The Rain Begins To Fall - Jermaine jackson 이제는/서울 훼밀리
102) Woords - Bee Gees 그리움/김세환,박지영/하고 싶은 말
103) Yesterday Once More - Carpenters 그 옛날처럼/이성애
104) 1943년4월3일생 - Lucio Dalla 1943년4월3일생/이용복
105) You Are My Destiny - Paul Anka 그대는 나의 운명/임용재
106) Zwei Kleine Sterne - Heintje 두 개의 작은 별/트윈 폴리오
107) Million Red Roses - 백만송이장미 김광숙/북한
108) Pretty Little Girl from Omagh - Daniel O'donnell 이종용/고엽
109) YMCA - Village People YMCA/조경수
110) All for the Love of a Girl - Johney Horton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김세환
이필원과 뚜아에무아 팬카페: http://cafe.daum.net/Endkdpahdk




Ace of Sorrow - Brown and Dana

Brown and DanaBrown and Dana의 Ace of Sorrow는 아름답고 슬픈 노래의 대명사로 Melanie Safka의 Saddest Thing과 쌍벽을 이루면서 방송국이나 음악 감상실, 음악다방에서 쉴새없이 리퀘스트된 유명한 곡이었죠. Philadelphia 출신 Garett Brown과 코네티컷주 출신 Al Dana는 Tufts 대학에서 50년대 후반에 만나, 학비보조를 위하여 음악활동을 하게 되는데, 졸업때 쯤인 '61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학교는 중단했습니다.대학교 행사와, Folk 음악공연이 열리는 New York, Philadelphia, Boston 등지로 공연을 하며 모습을 선보이는데, 이때 만든 It was a very good year 라는 album 속에 이 곡이 수록되었답니다.가사중에 queen of hearts 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원래는 이 제목을 가진, 17세기 영국 민요라는 군요.커피 한잔 앞에 놓고 듣고싶은 노래입니다..Ace of Sorrow - Brown and Dana To the queen of hearts he's the ace of sorrowHe's here today, he's gone tomorrowYoung men are plenty but sweethearts fewIf my love leave me what shall I do?하트 여왕 패를 가진 내게 그분은 슬픔의 에이스오늘은 함께 있지만 내일이면 떠나간답니다젊은이들 많이 있지만 사랑할만한 사람은 없으니내 사랑이여 나를 떠나가면 난 어떡해야 하나요?Had I the store in yonder mountainWhere gold and silver is there for countingI could not count for thought of theeMy eyes so full I could not see금과 은으로 가득한 저 산을살수 있는 재산이 내겐 있지만그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가려 그럴 여유가그럴 여유가 내겐 없답니다My father left me both house and landAnd servants many at my commandAt my commandment they ne'er shall beI'll forsake them all and go with thee아버지는 내게 집과 땅을 남겨주시고수많은 하인 부리도록 해주셨지만결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렵니다이 모든 걸 다 버리고 그대와 함께 떠나렵니다I love my father, I love my motherI love my sister, I love my brotherI love my friends and relations tooI'll leave them all and go with you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누이와 동생도 사랑하며친구와 이웃들도 사랑하지만그들과 헤어지고 그대와 함께 떠나렵니다(음악정원 펌)
          The Saddest Thing / Melanie Safka And the saddest thing Under the sun aboveIs to say goodbye To the ones you love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을 고하는 일이예요All the things that I have knownBe came my life my very own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모두 내 인생이고 내 자신의 것이예요But before you know you say goodbyeOh good time, goodbye It`s time to cry그러나 당신은 안녕이라 말했지요아, 행복했던 시절이여안녕이란 말은 나를 울게 하지만 But I will not weep nor make a sceneJust say "thank you, life for having been"그렇지만 난 울지도 않고 연극처럼 꾸미지도 않겠어요'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겠어요And the hardest thing Under the sun aboveIs to say goodbye to the ones you love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랑하는 이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예요No I will not weep nor make a sceneI m gonna say "thank you, life for having been"And the loudest cryUnder the sun above Is to silent goodbyeFrom the ones you love 아니예요, 난 울지도 않고 연극처럼 꾸미지도 않겠어요난 말하겠어요 오 그동안 고마웠어요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울음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용히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이예요

         
                          Melanie Safka 힛트15곡01. The Saddest Thing02. Rain Dance03. Photograph04. Ruby Tuesday05. Dream Seller06. Carolina In My Mind07. Stop, I dont want to hear it anymore08. Purple haze09. Yankee Man10. Long Long Time111. If You Go Your Way12. Nickel Song13. Knock on Wood14. As Tears Go By15. Unchained Mel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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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에 젖은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 멜라니 사프카는 포크의 마지막 주자로 등장해 주옥같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국내에서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Saddest Thing"으로 유명세를 확고히 하고 있다. 1947년 2월 3일 뉴욕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그녀는 무명그룹의 연주인이었던 아버지와 블루스 앤 재즈 가수인 어머니로부터 일찍이 음악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6세 때부터 카페나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녀는 한동안 연극을 공부하기도 했다. 우연히 레코드 프로듀서인 피터세커릭의 눈에 띄며 음악계에 발을 디뎠다. 69년 부다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곧 데뷔앨범「Born To Be」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은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다시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앨범 제작에 충실하도록 했다. 남편 피터의 끊임없는 사랑과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드디어 베스트 셀링을 기록하는 Lay Down (Candles In The Rain)으로 나타났다. 이 곡은 69년에 발표한 앨범 Candles In The Rain에 수록되어 있으며, 계속해서 호소력 진한 무드의 곡 Peace Will Come을 비롯한 Ruby Tuesday가 히트하였다. 인기 상승 궤도에 오른 그녀는 더욱 왕성한 활동의욕을 보이며 앨범「Affetionately Melanie」(70년),를 비롯해「Leftover Wine」(71년),「All The Right Noises」(71),「The Good Book」(72년),「Ga-ther Me」(72년),등을 계속 내놓았다. 이 시기에 Brand New Key와 Nickel Song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75년에 그녀의 남편이 설립한 네이버후드 레코드사로 이적하여 앨범「Photograph」를 발표하였다.멜라니 사프카는 국내에서 꾸준히 애청되는 "THE SADDEST THING"으로 사랑을 받는 가수이다. 이 노래는 1973년도에 발표된 후로, 예전에 다운 타운에서 꾸준히 신청되어졌던 올 타임 리퀘스트 뮤직으로서 역시 올드 팝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멜라니는 뉴욕 브룩클린에서 무명그룹의 연주자였던 아버지와 브루스 재즈 가수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음악적인 환경이 이미 조성되어진 상황에서 10대 때 이미 카페나 클럽에서 노래를 하였다고 한다. 본토에서는 "LAY DOWN CANDLES IN THE WIND"가 1970년에 사랑을 받았고, 이어서 71년에 소개 된 "BRAND NEW KEY" 역시 인기를 얻었지만 국내에서는 나나무스꾸리에 의해서 불려지기도 했던 "NICKEL SONG"이라는 재미있는 노래로 인기를 얻은바있고 또한 롤링 스톤즈의 "RUBY TUESDAY"와 "WHAT HAVE DON'T TO MY SONG MA"라는 곡도 음악 다방의 단골 신청곡이었다. 하지만 뉴욕 뒷 골목의 어두운 그림자와 도시의 고독을 노래하는 듯한 멜라니의 슬픈 음성은 역시 "THE SADDEST THING"으로 대표 될 수 있기에 지금도 방송이나 음악이 준비되는 곳에서는 멜라니하면 이 노래를 떠올릴수가 있다.
        (뮤직가든 펌)

        한나라당 후보가 결정되었습니다. 축하를 보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제 국민의 눈은 민주신당의 후보가 누가 될 것인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민주신당의 후보들의 면면은 아직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민단체, 민주당 대통합세력,000 후보와 선진 평화 연대세력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합하여 만든 대통합 민주신당의 내용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제 143명의 국회의원은 당의 중심을 지켜야할 당직자 및 핵심인사를 제외하곤 모두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와 결합하여 열심히 우리 후보를 당원과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알려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후보가 결정된 다음 결합하자는 것은 너무 시간이 늦습니다. 민주신당의 후보들은 1등하는 후보조차 10% 지지를 넘지 못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입니다. 이런 취약한 후보진영에 가담하는 것이 눈도장 찍고 권력에 줄서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들 적극 참여하여 선거인단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 국민의 관심을 모아야 합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근대 일본을 만들기 위해 막부체제하의 도사번을 탈번 하였듯이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습니다. 손학규 후보는 독자신당의 길을 포기하고 대통합에 참여하여 민주신당 창당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당내에서 누구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편가르기식의 구태정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당을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뺄셈정치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흠결 없는 지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저마다의 장점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발전을 위하여 어떤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느냐 입니다.

        첫째, 17대 대통령의 임무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차별을 줄이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대 타협을 이뤄낼 수 있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부동산투기 거품경제로 일시적 경기호황을 만들어내는 리더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간투자를 이끌어내고 외자를 유치하여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부 혁신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키고 질 좋은 일자리를 국민들에 제공해야 합니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인들의 도전정신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대통령을 믿고 신나게 투자하고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낡은 재벌경제를 뚫고 새로운 혁신창조의 경제그룹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저는 손학규 후보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 숨결을 느껴보고자 3일전 경기도 파주 LG-필립스 LCD공장에 다녀왔습니다. 140여만 평에 약 100억 달러 투자를 유치하여 직접고용 2만 5천명에 관련 산업 총 10만 명의 고용을 달성해 가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열정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파주공장 기공식에서 노무현대통령이 손학규 지사에게 “이거 해달라고 그렇게 떼를 쓰시더니 이제 만족합니까?” 라고 노무현식 덕담을 했습니다.

        해외 첨단기업 114개의 투자, 141억 달러 외자유치와 74여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 그의 열정과 추진력이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것이라 확신합니다.

        둘째, 글로벌경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한미 FTA 협정체결과 한 EU FTA 체결을 통해 세계 최대 시장을 동시에 접근하는 FTA 허브국가 대한민국. 해가 지지 않는 선진강국 코리아를 만들 수 있는 후보가 손학규입니다.

        선진통상국가의 꿈을 모두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마인드를 가지고 세계를 뛸 세일즈맨 대통령 후보가 손학규가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 한-EU FTA 추진할 때 다른 후보들이 눈치를 보고 주저하는 시기에도 야당이면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지지하여왔습니다.

        셋째, 남북화해협력과 한미동맹, 4대 강국 관계를 조정해 나갈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손학규 후보는 한나라당의 수구냉전적 분위기속에서도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지지하여 왔습니다. 지지만 아니라 직접 북의 모내기 지원과 같은 남북교류사업을 실천해왔습니다. 남북화해협력의 지속적 실천과 한미동맹의 유지 관리를 비롯한 4대강국을 관리하는 외교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자기 개인재산증식을 위해 일하는 건설업체 사장과는 다른 품격 있는 외교역량을 가진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넷째, 과거개발 독재의 불도저 경제를 넘어서 상생의 경제, 미래의 경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명박 후보의 경부운하 공약추진은 한반도 대재앙이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을 손상시켜 일부 건설업체만 돈벌고 국토가 황폐화되고 물이 오염될 것입니다. 이 대재앙을 막아내고 20조가 넘는 공사비로 노동자, 서민들의 자녀교육에 투자하여 사교육비 문제부터 해결해 내야 합니다.

        다섯째, 70~80년대 추상적 이념논쟁을 벗어난 실사구시의 실천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리더십은 낡은 구 정치사회체제를 변화시켰습니다.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를 만들고 각 권력기관의 독립적 기능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국민적 공감을 얻는 겸손한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오만과 독선, 아집으로 민심과 멀어졌습니다. 일은 열심히 해놓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열린우리당 역시 함부로 행동하고 중구난방으로 떠들면서 말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많은 국민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경제 양극화로 인한 고통도 배려 받지 못한 채 관료들이 만들어준 통계숫자 속에 가려졌습니다.

        무엇보다도 570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근로자와 33만 명의 청년실업자가 쓸만한 일자리 부족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손학규 후보 역시 한나라당에서 변화와 개혁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하고 좌절하였습니다. 이제 서로의 실패를 반성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하나로 모였습니다.

        국민들은 말로만 하는 개혁에 신물이 나있습니다. 선명성 경쟁, 알리바이용 개혁이 아니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변화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낡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의 품질경쟁이 필요합니다.

        개혁은 수구세력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87년의 이념적 틀에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합니다. 국민들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사구시의 실천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이명박 후보의 청계천사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가 많았음에도 손학규 후보의 업적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명박 후보는 콜라 같은 탄산음료 리더십입니다. 천문학적 광고로 맛있게 보여 소비자를 현혹시키지만 몸에는 이롭지 않습니다. 이가 삭을 수 있습니다. 거짓은 드러납니다. 가면은 벗겨집니다. 목마른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일시적 갈증에 영합하는 탄산음료가 아닙니다.

        생수 같은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찌는 듯한 폭염에 시원한 생수가 필요하듯이 경제양극화의 어려움 속에는 손학규의 일자리 정책이 필요합니다. 손학규는 늘 변하지 않고 국민 속에 스며드는 생수의 리더십입니다. 이제는 부동산투기의 삽질경제와 새로운 성장동력의 일자리창출 경제가 비교될 것입니다.

        세계로 뻗어나가고 세계를 끌어들여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후보, 한미동맹과 남북화해협력을 병행 지속시킬 수 있는 마인드와 정책을 가진 지도자, 한미 FTA를 찬성하면서도 모든 농업경영인대회에 참석하여 농민과 직접 부대끼면서 우리농업의 미래를 고민하며 신뢰를 얻어가는 사람, 선진통상국가, 경제선진화를 꾀하면서도 소외된 민중과 함께 땀 흘리면서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바로 000입니다.

        아무리 솔로몬의 지혜를 이야기할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공허하게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국민들을 갈라치고 분열시키고 대립시켜서 얻는 개혁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분노와 적개심에 기초한 개혁은 국민의 공감을 받기 어렵습니다. 개혁대상과 개혁주체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혁하고 변화 혁신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현재 국민의 50% 이상이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비전과 진정성 성실함으로 국민의 마음을 다시 되돌려야 합니다. 한나라당에 있다가 탈당한 사람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이것은 한나라당을 지지하였던 국민들의 변화와 회귀를 차단하는 편협함입니다.

        학생운동·빈민운동·용접공·1년에 걸친 옥살이·김지하 시인 양심선언 인쇄배포·2년간 수배생활 등 민주화운동, 그 후 영국유학, 교수를 거쳐 3번에 걸친 국회의원, 보건복지부장관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국정운영능력을 쌓았습니다

        손학규 후보는 이명박 후보처럼 재벌 건설회사에 들어가 개인재산을 수백억 불리지는 못했지만 경기도지사시절 집 한 칸 재산으로 살면서도 경기도 경제성장률을 서울의 3배로 만들어냈습니다.

        손학규 후보는 군문제 의혹이 제기된 이명박 후보처럼 군대를 면제받은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으로 1년동안 감옥에서 보냈으면서도 국방의무 이행을 위해 해병대에 지원해서 평발이라 떨어지고 육군에 입대하여 병장으로 35개월 만기제대한 대한민국의 성실한 국민입니다.

        말 못하는 정치인 찾기 어렵습니다. 모두들 좋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실천적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손학규는 74만개 일자리 창출의 성과가 있습니다.

        손학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겸손한 지도자입니다. 한사람을 만나도 정성껏 만나는 성실한 지도자입니다. 삶에 지친 국민들을 따뜻이 위로하고 격려하여 갈라진 동서와 노사 분열된 사회 남북을 대통합시킬 융화동진 후보 손학규 함께 열심히 뛰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함께 꿈을 꾸면 꿈이 현실이 됩니다.
        해가 지지 않는 선진강국 코리아 8천만 겨레의 힘이 뻗어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꿈을000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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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chmaninov -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 Piano :Vladimir Horowitz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cond. ZUBIN METHA (1978)

        제1악장 Allegro ma non tanto

        제2악장 Intermezzo - Adagio

        제3악장 Finale - Alla breve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확고한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라흐마니노프가 충분한 여력으로 완성시킨 곡이며 세련된 수법과 전체에 감도는 감미로운 분위기와 러시아적인 정서, 그리고 피아노의 묘미는 이곡의 매력으로 꼽힌다.

        이 협주곡은 1909년 그가 모스크바의 러시아 음악협회 부회장겸 교향악 연주회의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을 무렵 완성한것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이작품은 미국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하며 이작품의 완성을 서둘러 뉴욕에서 초연할려고 마음먹고 1909년 가을에 미국으로 가서 그해 1월 28일 뉴욕에서 자신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하였다.
        이곡은 그의 4개의 협주곡 중에서도 내용이 가장 충실하고 작곡 기요에 완벽을 기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널리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3번중 1악장은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의 인생을 그린 영화 "Shine"에서 실제 연주됨으로서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 그야말로 유명한 곡이다.

        영화 제목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명 피아니스트, 특별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즐겨 연주했던 사람, 바로 그가 호로비츠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그 엄청난 난이도로 인해서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좌절로 몰아갔던 곡이기도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샤인'에서 데이빗 헬프갓이 연주하다가 미쳐갔던 것도 바로 이 곡을 연주하면서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생전에 호로비츠의 연주를 보고 "호로비츠가 이곡을 아주 통째로 말아먹었군..." 이라며 감탄을 표했다고 한다

        <호로비츠를 기억하며> - 이 책은 1989년 세상을 떠난 호로비츠를 추억하며 1993년에 묶은 책이다. 피아니스트 125명이 호로비츠에 대한 헌사를 적었는데, 마우리치오 폴리니, 얼 와일드, 슈라 체르카스키, 토마스 바사리, 엠마뉴엘 엑스, 알리시아 데 라로차, 레온 플라이셔, 라자르 베르만, 반 클라이번, 로잘린 투렉 등 쟁쟁한 이름들이 보인다.

        데이비드 듀발은 서문에서 낭만주의 시대 피아니스트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리스트가 슈만의 작품을 연주하였을 때 슈만은 자기도 미처 생각치 못한 작품의 새로운 면모에 흥분하였고 쇼팽은 리스트가 자신의 에튀드를 연주하는 방식을 훔쳐오고 싶다고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해석이 강조되었던 낭만주의 시대의 황혼기인 1904년 태어났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25년 소련을 떠나 미국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누리게 된다. 토스카니니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미국으로 귀화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세 번에 걸쳐 연주활동을 은퇴하고 수 년이 지나서 화려한 복귀를 하면서 자신의 연주 인생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최말년에 이르러 1986년 그의 모스크바 귀환 공연은 피아노 위의 사자로 표효했던 '전설'의 마지막을 도돌이표로 완성해주고 있다.

        Lesile Howard 의 기억
        그에 대해 비평하는 것은 수플레를 삽으로 파는 것과 같다.

        Peter Frankle, Tomas Vasary (토마스 바사리) 의 기억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은 한결같이 호로비츠의 부다페스트 공연을 떠올리고 있다. 도시의 전설로 기록된 호로비츠의 1926년 데뷔 리사이틀은 아직 그가 무명이었기에 관객이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연주를 시작하자 관객들은 복도로 나가 친구들에게 어서 빨리 와보라고 전화를 하였으며 인터미션 내내 박수가 끊이지 않아 결국 호로비츠는 곧바로 2부 연주를 시작하여만 하였다. 그리고 공연이 끝났을 때에는 어느덧 '빠른' 소문을 듣고 몰려온 관객들로 객석은 가득 차 있었다.

        Leonid Hambro의 기억
        호로비츠의 집을 지나가다가 리스트의 에튀드에서 따온 옥타브를 쉼없이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다음 날 그를 만나 물어보았다. "한 패시지를 99번이나 연습하고 그 하나 하나가 모두 훌륭했었는데 그토록 완벽하게 잘 하는 것을 그렇게나 연습하는 것은 시간낭비 아닌가요?" 그러자 그가 말하길,
        "나는 연주 전에는 정말로 긴장되기 때문에 잠이 들어도, 집에 불이 나도 연주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네. 그래서 내 머리가 없어도 내 손가락은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하는거지."
        며칠 후에 또다시 그의 집 창문을 통하여 그가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습하는 것을 들었다. 포르티시모로 지시된 두번째 주제부에서 그는 매번 강박의 앞에서 너무 끌어서 멜로디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지고 있었다. 그에게 왜 그렇게 리듬을 왜곡시켰냐고 묻자 그는 "아주 '크은' 저음을 원해서"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멜로디의 리듬감이 없어졌잖아요."
        내가 절대 잊을 수 없는 그의 대답은 "뭐, 언제나 뭔가는 희생해야지." 였었다.

        Jeffey Siegel의 기억
        호로비츠가 줄리아드 학교에 피아노 학생을 만나서 가르쳐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는 그의 집에 가보게 되었다. 내가 잔뜩 긴장해있는 것을 눈치 챈 그는 나를 음악실에 홀로 두고 혼자 연습도 하고 방 분위기에 익숙해지라고 해주었다. 그의 방에는 그 유명한 피카소의 <곡예사> 그림이 있엇고 라흐마니노프와 토스카니니의 사인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전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호로비츠는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 앞에서 연주할 때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네.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피아노 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거든."

        Earl Wild (얼 와일드)의 기억
        그는 내가 싸인을 받은 유일한 피아니스트이다.
        (얼 와일드는 상당한 독설가로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한 마디도 같은 박자로 연주하지 못한다고, 랑랑은 클래식계의 제이로(제니퍼 로페즈)라고 폄하한 것으로 유명하다.)

        Christoph Eschenbach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의 기억
        1969년 미국에서 투어를 마치고 2주간의 휴식을 취하던 중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호로비츠를 소개해 주겠다는. 나는 2주간 연습을 하지 않았기에 그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었다. 그러자 호로비츠는 예의 그 씨익 웃음을 지어보이며 '물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나는 어느새 슈베르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썩 잘 치지는 않았지만 내 등 뒤에서 나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호로비츠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무적이었다.

        그의 방에는 호프만이 쓴 슈만의 비평서, 로베르트 슈만의 일기, 클라라와의 편지 등의 책들이 여러 군데 놓여있었다. 그는 새끼 손가락에 손 거스러미가 생겨서 화장실에서 밴드를 붙여오고는 피아노에서 손을 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첫 소절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 작품을 연주해나가기 시작하였고 문득 그 방은 호프만, 클라라, 로베르트의 것이 되었다. 호로비츠가 바로 슈만이었다.

        Lydia Artymiw 의 기억
        1976년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열린 호로비츠의 연주회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늘 그렇듯이 일요일 오후 4시에 연주회를 열었고 홀은 이미 터져나가고 있었다. 모든 좌석은 가득 메어졌고 어느 누구도 감히 늦게 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막 연주회가 시작하려는 순간 모든 관객들의 눈은 무대 왼쪽에 고정되어 그가 어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엇다. 우리는 계속하여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마에스트로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하였던 것이다. 모든 관객들이 놀라서 숨이 막히고서는 킬킬대었다. 호로비츠가 한 수 위였던 것이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고 그의 색채감과 다이나믹, 놀라운 테크닉들로 공연장을 마법과 같은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가장 여린 패시지도 3000석 홀의 가장 먼 좌석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나는 그가 리스트의 <위안>을 연주하면서 만들어낸 그 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녹음도 그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한다.

        Vladimir Viardo 의 기억
        1986년 초 나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대화의 중간에 리히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이번에 연주를 하러 온다고 들었네." 테이블에 앉아있던 모두가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 세계 최고인지 알지요." 리히터를 보면서 말이다.
        모스크바 연주회에서 관료들이 일종의 뇌물로 사람들에게 초대권을 뿌렸고 학생들은 말 그대로 천장에서라도 그 연주를 보기 위해 지붕에 올라가고 있었다. 거의 광란에 가까웠으며 몇몇은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전세계로 방영되었던 그 연주회는 정말이지 믿기 힘들었다. 나는 리히터의 아내인 니나와 함께 앉았다. 리히터는 오지 않았고 그녀가 가족의 '스파이'로 왔었다. 모차르트를 연주하던 호로비츠는 우리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배웠던 모든 것에 정확히 반대로만 치고 있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쳐다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나타의 중간쯤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는 것도 잊어버렸다. 연주가 끝나자 니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의 연주는 그렇게나 설득력이 있었다.

        Yury Boukoff 의 기억
        호로비츠의 소리는 너무도 독특하여 첫 음만 듣고도 그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는 곡에 숨겨진 목소리를 놀랍게 부각시키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부분에서 다성음악을 만들어냈었다.
        에밀 길렐스는 내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에게는 항상 호로비츠가 세계 최고이다."

        Stephen Hough 의 기억
        나는 호로비츠의 라이브를 단 한 번 들었다. 베토벤의 소나타는 연주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잇다. 라흐마니노프의 올림 사단조 전주곡을 들었을 때 나는 눈부신 색깔의 무지개를 쳐다보는 노아와도 같은 심정이엇다. 한낱의 뉘앙스라도 놓칠까 무서워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Claude Frank 의 기억
        호로비츠를 방문하여 그를 위해 연주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르투르 슈나벨에게 오래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자 호로비츠는 이렇게 말하였다. "슈나벨의 아다지오는 매우 훌륭하지만, 그는 알레그로도 음악이라는 것을 종종 까먹는 것 같다." 나는 뭔가 불공평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슈나벨은 나에게 호로비츠에 대해서 "그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피아노다." 라고 말하였었기 때문이다. 슈나벨과 호로비츠는 너무도 달랐기에 나는 호로비츠를 찾아 온 것에 대하여 일종의 배신과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연주하였을 때 그 모든 감정은 사라졌다.

        Daniel Pollack 의 기억
        그가 은퇴한 후 다시 콘서트에 복귀를 발표한 1965년 5월 나는 임신 6개월의 아내와 티켓을 사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다렸다. 새벽이 되자 그의 아내 완다 호로비츠가 커피와 도너츠를 천여명의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책에는 엄청난 인파의 줄을 담은 사진도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이 공연에 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1000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카네기 홀의 수용인원은 2800명.)

        John Browning (존 브라우닝) 의 기억
        에이버리 피셔 홀에서 열렸던 알리시아 데 라로차의 리사이틀이 끝나고 나와 호로비츠,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그녀의 분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그녀가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우리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호로비츠의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는 그의 양 손에 키스를 했다.

        Shura Cherkassky(슈라 체르카스키)의 기억
        내가 처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들은 것은 1928년이었다. 나는 십대 소년이었고 엄마와 함께 공연장에 갔다. 첫번째의 곡은 스카를라티의 곡. 제일 첫번째 음(B)이 울리는 순간 바로 나는 홀려버렸다. 나는 그 기분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호로비츠 생애

        한 세기를 울린 피아노의 시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지난 세기는 피아노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20세기의 초반부터 종반을 관통하며 압도적인 기량과 출중한 음악성으로 환영받았던 인물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우리는 단번에 다음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그들은 때로 라이벌처럼 부각되었었고, 함께 무대에서 연주를 한 적은 없지만 이들 연주는 애호가들의 취향을 자극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호로비츠의 탄생이 올해로 100주년이 된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본명이 고로비츠(Gorowitz, 1925년 베를린 데뷔 때부터 지금의 호로비츠라는 이름을 사용한다)였으며, 부유하고 지적인 부모 아래서 서적과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6세에 이미 첫 연주회를 가진 루빈스타인에 비한다면 출발은 늦었지만, 호로비츠는 같은 나이에 당대의 교육자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아래에서 정식 음악교육을 받는다. 처음에는 작곡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집안이 완전몰락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아노 연주 활동을 하게 된 것이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 계기가 된다.

        블루멘펠트가 피아노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했을 만큼 탁월했기에 호로비츠의 연주는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 1924년부터 25년의 경우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못한 당시로서는 놀라운 약 80회의 연주회를 갖는다. 그리고 1925년에 서방 음악계에 화려한 신고식을 갖는데, 이때 베를린과 더불어 이듬해 함부르크와 런던 연주 여행은 그의 이름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일생동안 네 번의 침묵 기간 가져

        1927년 호로비츠는 흥행사 아서 짓슨의 권유로 미국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때 데뷔 첫 연주는 평단과 청중들에게 굉장한 선풍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루빈스타인의 연주가 청중들의 열띤 반응과는 달리 평단의 냉담한 평가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되는 점이다. 또 1932년에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조우라 할 수 있는 토스카니니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훗날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의 결혼으로 귀결될 줄은 호로비츠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1936년부터 39년은 그가 첫 공백 기간을 가진 시기이다. 언제나 그침 없이 많은 연주 활동을 펼쳤던 그가 심한 피로감과 고통을 호소하며 일생동안 네 번에 걸쳐,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무려 12년 동안 침묵 기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52년 3월 25일부터 있었던 만 12년간의 공백기인데, 1965년 그의 카네기 홀 복귀 연주회 때는 대다수의 신문에서 ‘연예 지면을 가득 채우던 헐리웃 배우가 뒷 페이지로 밀려난’ 초유의 뉴스로 기록된다.

        이 복귀 연주회 외에 기억에 남는 것으로 1978년에 있었던 호로비츠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 연주회를 들 수 있다. 이날 연주회에는 당시 금액으로 168,000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니, 굳이 화폐가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근 내한 연주회를 가지는 초일류 피아니스트의 연주회 개런티가 그 반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해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후 호로비츠는 1986년 그와 음악 평생을 함께 했던 레이블인 RCA(BMG)·소니 클래시컬(CBS)과 결별하고 새로이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계약을 맺는다. 이 소식을 접한 애호가들로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그는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듯, 이제까지와는 차별된 음악에 대한 자세와 사상이 담긴, 그만의 시로 가득한 세계를 펼쳐 놓는다. 특히 198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모스크바 귀환 연주회(Horowitz in Moscow)는 음반과 영상물을 통해 보아도 단순히 음악 이외에 당시의 감격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어 지금도 감동에 젖게 한다.

        1989년 10월 25일 호로비츠는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E장조와 쇼팽·리스트의 편곡 작품을 녹음하게 된다. 마치 곧 다가올 죽음의 전조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가 장기로 다루었던 리스트의 작품에서 생전 들어볼 수 없었던 농축성과 성숙함으로 충만한 연주를 한다. 그리고 11월 5일, 막바지 녹음 편집 작업을 하던 도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한다. 차가운 병상 위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의 딱딱한 의자에서였다.

        이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타계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종말이었다. 더구나 그가 생존함으로써 유구한 낭만주의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었기에, 그의 사망으로 인한 심각한 부재는 한동안 음악계가 평정심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계기가 된다.


        대중성 결합한 낭만 최후의 피아니스트

        ‘타고난 미남으로 저절로 여자들이 따르는 듯한 카리스마와, 청중들을 흥분시킬 의도에다 실제로 또 흥분시키는 요소를 지닌 연주자’(평론가 버질 톰슨).

        위의 말은 호로비츠가 가지는 이미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바로 청중의 기호와 결합한 대중성, 그리고 이를 뛰어넘는 지극히 명쾌한 피아니즘이 일치하는 점이다.

        ‘피아노가 노래가 아닌 타악기로서의 리듬을 울리거나, 혹은 딱딱한 타격음을 내는 목적, 즉 두들겨대는 것이라면 그 순간부터 나는 두 번 다시 피아노에 손을 대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작품처럼 피아노의 타악기화가 유행처럼 퍼져 나가던 현대 작곡가들의 경향에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던 호로비츠. 그는 ‘벨칸토는 피아노 연주의 미학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자의 반 타의 반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전통을 고수하는 일선의 상징적인 인물로 비추어졌다.

        오늘날 그의 부재가 한없이 큰 공백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런 낭만적 전통을 계승하여 들려주는 피아니스트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새로이 등장하는 신예들 중에 유독 ‘호로비츠의 재래’ 라는 타이틀로 데뷔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은 것으로 보면, 그의 영향력과 생명력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유효함을 일깨워 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재는 단순히 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사라졌다는 것을 넘어서 화려하게 빛나던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글·이종철 기자

        피아니즘

        천상을 노래하는 낭만 최후의 피아니스트

        글·이웅규(음악 칼럼니스트)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늘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다.” 한 피아니스트가 정치적인 이유로 꿈에도 그리던 모국을 60년만에 방문했다는 상징성을 차치하더라도, 왠지 과장되고 호들갑스러워 보이는 한 관람객의 이와 같은 탄성은 희대의 거장 호로비츠를 상기할 때마다 회자되곤 한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Horowitz in Moscow’라는 앨범으로 당시의 분위기와 호로비츠의 연주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고, 보다 생생하게-극히 연출의 효과가 있을지라도-이를 DG에서 영화화하여 그때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앨범을 접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그곳에 있었으면…’이라는 안타까움과 당시 청중들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연주자가 청중들을 고스란히 천상으로 이끌고 있는 듯한 흡사 천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나마 ‘천상’을 느끼고 그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니…. 아쉬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 한 연주자에게 소위 ‘거장’이라는 호칭을 붙일 때는 무언가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연주자가 의도한 바를 완전무결하게 이끌고 간다면야 그 연주자는 기껏 음악 해석자, 또는 기능공일 따름일 것이다. 문제는 의도한 바 그 이상을 자신도 모르게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연주자에게 우리는 ‘거장’이라는 권위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호로비츠가 까탈스러운 한 인간이었음은 분명했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의 초인적인 테크닉과 더불어 이토록 하늘과 소통하는 듯한 연주에 대한 일화는 그가 그저 범상한 연주자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거장 중의 거장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호로비츠는 신비하고 주술적 마력을 지닌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를 떠나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호로비츠는 1903년 키로프에서 태어났고 1925년 그곳에서 데뷔했다. 이러한 태생적 영향이 그의 피아니즘 형성에 중요한 단서가 되겠지만, 그의 일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건은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그리고 일생의 대부분을 생활했던 미국이라는 코드일 것이다.

        우선 그의 유년시절을 보자면 호로비츠는 매우 유복하고 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특히 스크리아빈과도 친분이 있었던 음악학자인 삼촌의 도움으로 꽤 축복받은 조건에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단지 6살 때 안톤 루빈스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서 사사한 대 교육자 블루멘펠트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정통 러시아 음악의 적자로서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유복할 것만 같았던 가정환경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로 극도로 악화된 이후 미국에 망명하기까지, 러시아(소련)와 등지겠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 근간은 차이코프스키·라흐마니노프·스크리아빈 등의 러시아 음악에 상당한 강점을 보였다. 그의 기질 속에 녹아 있는 슬라브적인 우울한 정서, 끝없는 시베리아 들판과도 같은 장대한 스케일과 광채…. 아무리 정치적인 입장차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가 단연 러시아 음악의 계통을 잇는 피아니스트이었음을 아무도 부인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영역에서 대가가 된다거나 권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위에 결정적인 인물과의 조우가 필요하다. 호로비츠에게 있어서 토스카니니와의 만남은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음악계에서 그가 권력을 지니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호로비츠가 서방세계에서 어느 여류 피아니스트를 대신하여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으로 이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수많은 순회공연으로 그를 알릴 기회가 무수히 많았으며 그 여파로 미국 순회공연 일정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토스카니니가 누구인가? 그의 직선적인 연주스타일이 대변하듯, 타협이란 일체 없고 직선적이며 무자비할 정도의 추진력으로 당시 음악계를 평정 하던 무소불위의 파워, 그 자체 아니었겠는가. 게다가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의 결혼은 자칫, 타산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정략결혼처럼 비춰 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혐의는 장인과의 그 전설적인 레코딩, NBC 심포니와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RCA)으로 불식된다. 두 거장은 서로 독립적이고 예민하기 그지없었고, 완고한 고집이 있었다. 심상치 않은 템포감의 빛나는 서주를 필두로 토스카니니 특유의 초지일관과 그것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정한 페이스로 밀어붙이는 정력에 맞대응이라도 하듯이 호로비츠는 믿기지 않는 스피디한 손놀림과 크나큰 낙 폭의 패시지, 광폭하리만한 액센트로 응수하며 1악장을 단 19분만에 독파한다. 협주곡의 이상이 각 성부간의 ‘경쟁’에 있다면 실로 이만한 불꽃 튀는 접전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들 만한 연주일 것이다. 두 주술사의 이 경쟁은 탄탄한 구성을 보이며 마법 같은 조화를 일궈냄으로서 한 협주곡의 불가사의한 전설로서 지금까지 추앙되고 있다.

        일설로 토스카니니의 완고한 페이스와 신경증적 과민함에 호로비츠가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막상 장인과 연주에 몰입하면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닌 굶주려 독기 품은 범과도 같은 표독함을 지녔던 것이다. 분명, 호로비츠의 후기 음악관이 토스카니니의 즉물적 경향과 고전주의적 지향점과 차이가 있었다하지만, 토스카니니와의 관계에서 그는 분명 불굴의 의지와 강철과도 같은 단단한 피아니즘을 형성하게 되는 한 요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미국으로 완전 영주하다

        호로비츠가 미국에 데뷔한 것은 1927년의 일이다. 이미 유럽에서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의 미국 데뷔는 부풀리기 식, ‘노골적인’ 상업적 이해를 가진 소위 ‘미국적’ 토양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후폭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최고 흥행사였던 아서 짓슨과 연계되어 데뷔전을 치른 후, 카네기 홀에서 토머스 비첨과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는 미국에서의 ‘대중성’과 명성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442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89년 세상을 달리할 때까지 60여 년간을 미국에서 활동했던 미국 피아니스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의 정치적 혁명인 볼셰비키의 여파로 집안이 몰락하였다는 정서적 이유도 있었지만,-‘자유를 찾아’- 호로비츠는 노골적으로 미국적 이해타산을 적극 활용하고 그것에 용해된 어쩌면 전형적인 미국적 피아니스트였었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호로비츠가 부풀리기 좋아하는 미국적 토양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자신의 피아니즘을 원형 그대로 알리는 것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자신이 지향하는 음악적 코드가 우연히 미국에서의 영화를 보장했을지라도 그의 음악적 소양이나 음악관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이것은 호로비츠의 피아니즘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진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호로비츠에 대한 유명한(?) 비난의 역설은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듯하다.


        “악기에 대한 이해와 재능이 음악성과 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유명한 미국 평론가 마이클 숀버그의 이 비난은 얼핏 최악의 비아냥일 수 있으나 최소한 호로비츠가 최고의 테크닉과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역설이 담겨있는 것이다.

        ‘악마적 기교주의자’. 두말할 것도 없이 호로비츠는 한 세기 몇 나올까 말까한 테크니션이다. 마치 악마의 사주라도 받은 듯한 그의 거침없는 기교의 향연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주술적인 제의를 연상하리만치 무시무시한 효과를 낳는다. 그가 1930~40년대의 젊은 시절 최 전성기였다지만, 팔순을 넘기고도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스크리아빈 등의 연주를 듣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악기에 대한 장악력이 대단했었는지 느끼게 해준다. 그가 연주하는 리스트 소나타 b단조가 커플링 된 메피스토 왈츠(RCA)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 온갖 지성(기교)을 장악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재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문제는 이 영악한 악마가 결코 다다를 수 없었던 정신(음악성)이었다. 숀버그가 그토록 비난했던 호로비츠의 음악성이란 과연 부재한 것일까. 숀버그에게 약간 미안한 감이 있지만, 그것은 호로비츠 피아니즘을 관통하는 기질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호로비츠는 낭만주의에 대한 완벽한 직감을 가진 이 시대 최후의 로맨티스트였다. 사람들을 잡아끄는 위압적이고 화려한 기교와 이야기하는 듯한 서사적이고 낭만적인 호로비츠의 어법은 미국적 토양에서 부추기기 좋아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은 필연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성이 의심될 만큼의 필연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호로비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음악성을 틀림없이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낭만주의 해석자-노래하는 피아니즘

        고전주의 예술이 한정적인 것을 묘사하고, 낭만주의는 무한한 것을 암시한다는 하이네의 언급처럼 무한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추상적인 형식미를 추구하는 음악어법에 있어서 하나의 신화와도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으며 서서히 침잠해 가는 청중들의 소리 없는 흐느낌을 보자면 호로비츠가 그의 연주를 통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피아노를 칠 때 목표로 하는 것은 ‘피아노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슈베르트·모차르트·리스트의 음악이 가장 잘 노래하는 음악인 듯 합니다. 베토벤의 음악도 매우 아름답습니다만 좀 기악적인 음악이라 생각합니다.”

        이 호로비츠의 언급은 그의 피아니즘의 핵심을 담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즉, 기교와 텍스처, 그리고 표현내용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가 베토벤 음악에 취약했던(아니 어쩌면 피했던) 것은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낭만주의적 서사어법에 경도되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고, 그 끝을 추구하려는 완벽주의 성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동경을 노래하는 것이었고(슈만), 천상을 노래하는 것이었다(모차르트).

        몇 번의 은퇴와 복귀의 반복, 복귀할 때마다 쏟아지는 라이브의 열광, 전속 정수기사까지 대동하는 까탈스러운 결벽증, 수많은 화제와 비난, 그 비난만큼이나 과장스러운 찬사, 이 모든 것이 호로비츠를 상기할 때 떠오르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호로비츠-최후의 로맨틱’이라는 앨범의 타이틀처럼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로맨티스트로서 기억될 것이다. 호로비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 그토록 사랑받는 것을 보면 장 자크 루소의 ‘낭만주의’ 정의를 연상케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즉, 낭만주의의 무한한 이야기의 끝은 ‘동심’인 것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

        비슷한 정서, 그러나 이질적인 예술관의 두 비르투오조

        글·김범수(음악평론가)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로서 비르투오조라는 격찬이 스스럼없이 보내지는 연주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신화의 창조자들이다. 그들이 섰던 무대에 남아있는 열광,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 그들이 가꾸어온 숱한 화제는, 신화를 외면하는 과학 문명의 시대에 다시금 낭만적인 상상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이 라이벌로 불리는 것은 평론가들의 관심일 뿐

        연주가들이 선택한 곡목이 개성을 알려준다면 그들의 연주 해석은 저마다의 인생체험에 따른 조형미의 변화를 들려준다. 1923년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19세의 호로비츠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1882-1951)은 “호로비츠는 나에게서 레슨받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완성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작곡을 할 수 있는지를 그에게 물었었는데, 그는 수줍어하면서 네, 라고 대답했다. 이 무렵 그는 영웅처럼 환영받고 있었다. 호로비츠의 지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러시아를 떠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전했는데, 훗날 그가 나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을 무척 즐겁게 생각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키에프의 음악원에서 호로비츠는 19세기 후반에 리스트와 맞먹는 명성을 누리며 러시아의 피아노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안톤 루빈스타인의 직계 제자인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한 뒤 17세에 졸업했다. 음악원 재학 시절만 해도 작곡가의 꿈을 지녔던 호로비츠였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핍박받는 환경 속에 피아니스트로 전향했다. 슈나벨이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었을 때, 이미 호로비츠의 기교는 독자적인 개성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30년 호로비츠의 시카고 순회 연주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파데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호로비츠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독학으로 터득한 연주자인데, 특히 그의 리듬과 음감이 그걸 설명해 준다. 만일 그가 음악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지금의 연주력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상당한 경지에 오를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호로비츠는 요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음악도이다.”

        20세기 전반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폴란드의 애국자로서 독립된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기도 했던 파데레프스키는 루빈스타인을 가르치기도 했었던 스승이다. 그런 파데레프스키가 호로비츠에게 보낸 찬사를 루빈스타인이 마음 편하게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들 두 피아니스트가 라이벌 입장이라고 운위되는 것은 평론가들의 관심일 뿐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이 즐겨 연주하는 음악 영역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까. 의식적인 대립 감정 없이 그들은 자신의 음악을 즐겼다.


        침묵을 통해 예술적 성찰의 시간 가져

        호로비트의 최초의 침묵은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한 후인 1936년에서 39년 사이이다. 스위스에 있었던 이때의 그에게는, 그가 심각한 수술을 받았다거나 신경병증세로 치료를 받는다는 따위의 헛소문까지 나돌았었지만, 호로비츠는 홀연히 연주 무대로 돌아와 그전과 같이 다이내믹한 터치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호로비츠의 복귀는 루체른 축제에서 장인인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면서였다.

        1953년 호로비츠는 다시 침묵의 은둔생활을 한다. 그것도 12년이라는 참으로 오랜 세월의 칩거였었는데, 훗날 이때의 심경을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이러한 말을 남기고 있다.

        “연주여행을 갈 때마다 나는 기차를 타곤 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잘 먹지도 못했으니, 기차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한 주일에 4회의 연주회를 치러야 할 정도였으니까 너무 힘든 시기여서, 갑자기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조용히 평화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싶어졌던 것이다.”

        1965년 호로비츠는 카네기 홀에서 역사적인 재기 연주회를 가진다. 이때 순식간에 입장권이 매진되어 웃돈을 주며 표가 거래될 정도였다. 그후 70년대에 잠시 연주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또 그의 딸 소니아가 타계하자 상심하여 연주를 멈춘 적이 있기도 하다.

        한편 루빈스타인의 연주 생애에서도 침묵은 더 높은 경지로 비상하는 발전의 단계였다. 첫 미국 연주 여행 결과에 적이 실망한 그는 4년 동안 혼자만의 사색과 연습시간을 갖게 된다. 그 사이 1908년 겨울 날, 외로움과 허기짐 속에 사랑마저 실패한 루빈스타인은 베를린의 호텔방에서 자살을 기도했지만, 벽에 매어 놓았던 줄이 끊어지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져버린 일을 겪는다. 이 찰나에 그가 체험한 행복한 삶의 비밀은 ‘그것이 좋던 나쁘던간에 무조건으로 인생을 사랑하자’는 것이었다고 그 뒤 술회한다.

        다시 연주를 재개한 루빈스타인은 1914년 폴란드의 독립 운동을 원조하는 한편, 바이올리니스트 유젠느 이자이와 듀오가 되어 연합군을 위한 위문 연주회도 활발히 가졌다. 외향적인 기질의 루빈스타인의 침묵은 호로비츠처럼 장기간의 간격이 아니었다.

        루빈스타인의 침묵은 어찌 보면 주위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열병처럼 스스로 앓고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음악은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스케일이 크면서 화려하고 강한 표현력으로 모든 음악을 그의 개성으로 물들여 놓았다는 비평을 스스로 절감한 듯, 1960년을 전후로 그의 연주 풍모는 변한다. 젊은 시절의 흠없이 명확한 터치에 의한 음의 명료성에 세월의 풍화를 겪은 예풍이 깃들게 된 것이다. 강렬하고 충동적이던 음의 연속에 어느 사이에 내성적인 아름다움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쇠퇴기에 이를 70세 무렵의 나이에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쌓아가는 루빈스타인이었다.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두 대가의 피아니즘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간 호로비츠의 연주 기교는, 그런 그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인 절제를 갖는 서정성에서 돋보인다. 호로비츠가 레퍼토리로 자주 선택하는 협주곡의 예는,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다. 이 협주곡들에서 호로비츠는 다른 연주자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다이나미즘의 광채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낭만적인 판타지가 위축되어 버린 듯싶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세분해서 나누어 들으면 정서적인 변화는 곧 시적인 낭만으로 떠오른다.

        이것은 어쩌면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해석하는 호로비츠만이 간직할 수 있는 내밀한 향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호로비츠의 특성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나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에서 섬세한 색체감을 들려준다.

        호로비츠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이 협주곡들에는 루빈스타인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패시지의 기교적인 처리에서는 유사한 점이 보이기도 하다. 형식미에서 밝은 여운을 주는 루빈스타인과 시종 음악적인 긴장감을 견지하는 호로비츠의 개성이 다른 표현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루빈스타인이 대표적으로 손꼽는 쇼팽의 연주에서는 호로비츠도 발라드나 폴로네이즈·마주르카를 그의 개성에 맞게 선택하고 있다. 루빈스타인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를 스스로 편곡한 곡이나 빌라 로보스가 그에게 헌정한 ‘루데 포에마’(야만적인 시)를 스페인의 피아노 음악과 함께 연주할 때, 호로비츠는 자신의 작곡인 ‘카르멘 환상곡’이나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하면서 또 도메니크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독특한 묘미로 들려주어 투르 드 포스(tour de force : 대단한 솜씨)를 자랑한다.

        19세기 후반의 80년대 동년배 피아니스트들인 슈나벨·박하우스·피셔가 베토벤을 중심으로 하는 연주가였다면, 루빈스타인은 96세의 장수를 누리며 낭만주의 음악의 즐거움 속에 생을 마칠 수 있었다. 20세기에 활약을 보였던 카자드쉬·기제킹·켐프·브라일로프스키·솔로몬·아라우·미켈란젤리 그리고 제르킨과 같은 세대이면서도 유독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피아니스트가 호로비츠이다.

        지난 19세기의 음악 정서를 물려받았던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는 이제 다음 세대의 음악가들에게만 평가받을 수 있는 음악으로 아직 우리들의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뮤직가든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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