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을 노래하는 낭만 최후의 피아니스트
글·이웅규(음악 칼럼니스트)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늘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다.” 한 피아니스트가 정치적인 이유로 꿈에도 그리던 모국을 60년만에 방문했다는 상징성을 차치하더라도, 왠지 과장되고 호들갑스러워 보이는 한 관람객의 이와 같은 탄성은 희대의 거장 호로비츠를 상기할 때마다 회자되곤 한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Horowitz in Moscow’라는 앨범으로 당시의 분위기와 호로비츠의 연주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고, 보다 생생하게-극히 연출의 효과가 있을지라도-이를 DG에서 영화화하여 그때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앨범을 접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그곳에 있었으면…’이라는 안타까움과 당시 청중들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연주자가 청중들을 고스란히 천상으로 이끌고 있는 듯한 흡사 천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나마 ‘천상’을 느끼고 그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니…. 아쉬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 한 연주자에게 소위 ‘거장’이라는 호칭을 붙일 때는 무언가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연주자가 의도한 바를 완전무결하게 이끌고 간다면야 그 연주자는 기껏 음악 해석자, 또는 기능공일 따름일 것이다. 문제는 의도한 바 그 이상을 자신도 모르게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연주자에게 우리는 ‘거장’이라는 권위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호로비츠가 까탈스러운 한 인간이었음은 분명했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의 초인적인 테크닉과 더불어 이토록 하늘과 소통하는 듯한 연주에 대한 일화는 그가 그저 범상한 연주자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거장 중의 거장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호로비츠는 신비하고 주술적 마력을 지닌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를 떠나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호로비츠는 1903년 키로프에서 태어났고 1925년 그곳에서 데뷔했다. 이러한 태생적 영향이 그의 피아니즘 형성에 중요한 단서가 되겠지만, 그의 일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건은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그리고 일생의 대부분을 생활했던 미국이라는 코드일 것이다.
우선 그의 유년시절을 보자면 호로비츠는 매우 유복하고 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특히 스크리아빈과도 친분이 있었던 음악학자인 삼촌의 도움으로 꽤 축복받은 조건에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단지 6살 때 안톤 루빈스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서 사사한 대 교육자 블루멘펠트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정통 러시아 음악의 적자로서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유복할 것만 같았던 가정환경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로 극도로 악화된 이후 미국에 망명하기까지, 러시아(소련)와 등지겠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 근간은 차이코프스키·라흐마니노프·스크리아빈 등의 러시아 음악에 상당한 강점을 보였다. 그의 기질 속에 녹아 있는 슬라브적인 우울한 정서, 끝없는 시베리아 들판과도 같은 장대한 스케일과 광채…. 아무리 정치적인 입장차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가 단연 러시아 음악의 계통을 잇는 피아니스트이었음을 아무도 부인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영역에서 대가가 된다거나 권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위에 결정적인 인물과의 조우가 필요하다. 호로비츠에게 있어서 토스카니니와의 만남은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음악계에서 그가 권력을 지니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호로비츠가 서방세계에서 어느 여류 피아니스트를 대신하여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으로 이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수많은 순회공연으로 그를 알릴 기회가 무수히 많았으며 그 여파로 미국 순회공연 일정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토스카니니가 누구인가? 그의 직선적인 연주스타일이 대변하듯, 타협이란 일체 없고 직선적이며 무자비할 정도의 추진력으로 당시 음악계를 평정 하던 무소불위의 파워, 그 자체 아니었겠는가. 게다가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의 결혼은 자칫, 타산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정략결혼처럼 비춰 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혐의는 장인과의 그 전설적인 레코딩, NBC 심포니와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RCA)으로 불식된다. 두 거장은 서로 독립적이고 예민하기 그지없었고, 완고한 고집이 있었다. 심상치 않은 템포감의 빛나는 서주를 필두로 토스카니니 특유의 초지일관과 그것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정한 페이스로 밀어붙이는 정력에 맞대응이라도 하듯이 호로비츠는 믿기지 않는 스피디한 손놀림과 크나큰 낙 폭의 패시지, 광폭하리만한 액센트로 응수하며 1악장을 단 19분만에 독파한다. 협주곡의 이상이 각 성부간의 ‘경쟁’에 있다면 실로 이만한 불꽃 튀는 접전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들 만한 연주일 것이다. 두 주술사의 이 경쟁은 탄탄한 구성을 보이며 마법 같은 조화를 일궈냄으로서 한 협주곡의 불가사의한 전설로서 지금까지 추앙되고 있다.
일설로 토스카니니의 완고한 페이스와 신경증적 과민함에 호로비츠가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막상 장인과 연주에 몰입하면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닌 굶주려 독기 품은 범과도 같은 표독함을 지녔던 것이다. 분명, 호로비츠의 후기 음악관이 토스카니니의 즉물적 경향과 고전주의적 지향점과 차이가 있었다하지만, 토스카니니와의 관계에서 그는 분명 불굴의 의지와 강철과도 같은 단단한 피아니즘을 형성하게 되는 한 요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미국으로 완전 영주하다
호로비츠가 미국에 데뷔한 것은 1927년의 일이다. 이미 유럽에서 명성을 얻긴 했지만, 그의 미국 데뷔는 부풀리기 식, ‘노골적인’ 상업적 이해를 가진 소위 ‘미국적’ 토양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후폭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최고 흥행사였던 아서 짓슨과 연계되어 데뷔전을 치른 후, 카네기 홀에서 토머스 비첨과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는 미국에서의 ‘대중성’과 명성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442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89년 세상을 달리할 때까지 60여 년간을 미국에서 활동했던 미국 피아니스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의 정치적 혁명인 볼셰비키의 여파로 집안이 몰락하였다는 정서적 이유도 있었지만,-‘자유를 찾아’- 호로비츠는 노골적으로 미국적 이해타산을 적극 활용하고 그것에 용해된 어쩌면 전형적인 미국적 피아니스트였었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호로비츠가 부풀리기 좋아하는 미국적 토양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자신의 피아니즘을 원형 그대로 알리는 것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자신이 지향하는 음악적 코드가 우연히 미국에서의 영화를 보장했을지라도 그의 음악적 소양이나 음악관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이것은 호로비츠의 피아니즘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진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호로비츠에 대한 유명한(?) 비난의 역설은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듯하다.
“악기에 대한 이해와 재능이 음악성과 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유명한 미국 평론가 마이클 숀버그의 이 비난은 얼핏 최악의 비아냥일 수 있으나 최소한 호로비츠가 최고의 테크닉과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역설이 담겨있는 것이다.
‘악마적 기교주의자’. 두말할 것도 없이 호로비츠는 한 세기 몇 나올까 말까한 테크니션이다. 마치 악마의 사주라도 받은 듯한 그의 거침없는 기교의 향연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주술적인 제의를 연상하리만치 무시무시한 효과를 낳는다. 그가 1930~40년대의 젊은 시절 최 전성기였다지만, 팔순을 넘기고도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스크리아빈 등의 연주를 듣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악기에 대한 장악력이 대단했었는지 느끼게 해준다. 그가 연주하는 리스트 소나타 b단조가 커플링 된 메피스토 왈츠(RCA)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 온갖 지성(기교)을 장악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재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문제는 이 영악한 악마가 결코 다다를 수 없었던 정신(음악성)이었다. 숀버그가 그토록 비난했던 호로비츠의 음악성이란 과연 부재한 것일까. 숀버그에게 약간 미안한 감이 있지만, 그것은 호로비츠 피아니즘을 관통하는 기질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호로비츠는 낭만주의에 대한 완벽한 직감을 가진 이 시대 최후의 로맨티스트였다. 사람들을 잡아끄는 위압적이고 화려한 기교와 이야기하는 듯한 서사적이고 낭만적인 호로비츠의 어법은 미국적 토양에서 부추기기 좋아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은 필연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성이 의심될 만큼의 필연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호로비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음악성을 틀림없이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낭만주의 해석자-노래하는 피아니즘
고전주의 예술이 한정적인 것을 묘사하고, 낭만주의는 무한한 것을 암시한다는 하이네의 언급처럼 무한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추상적인 형식미를 추구하는 음악어법에 있어서 하나의 신화와도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으며 서서히 침잠해 가는 청중들의 소리 없는 흐느낌을 보자면 호로비츠가 그의 연주를 통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피아노를 칠 때 목표로 하는 것은 ‘피아노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슈베르트·모차르트·리스트의 음악이 가장 잘 노래하는 음악인 듯 합니다. 베토벤의 음악도 매우 아름답습니다만 좀 기악적인 음악이라 생각합니다.”
이 호로비츠의 언급은 그의 피아니즘의 핵심을 담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즉, 기교와 텍스처, 그리고 표현내용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가 베토벤 음악에 취약했던(아니 어쩌면 피했던) 것은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낭만주의적 서사어법에 경도되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고, 그 끝을 추구하려는 완벽주의 성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동경을 노래하는 것이었고(슈만), 천상을 노래하는 것이었다(모차르트).
몇 번의 은퇴와 복귀의 반복, 복귀할 때마다 쏟아지는 라이브의 열광, 전속 정수기사까지 대동하는 까탈스러운 결벽증, 수많은 화제와 비난, 그 비난만큼이나 과장스러운 찬사, 이 모든 것이 호로비츠를 상기할 때 떠오르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호로비츠-최후의 로맨틱’이라는 앨범의 타이틀처럼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로맨티스트로서 기억될 것이다. 호로비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 그토록 사랑받는 것을 보면 장 자크 루소의 ‘낭만주의’ 정의를 연상케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즉, 낭만주의의 무한한 이야기의 끝은 ‘동심’인 것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
비슷한 정서, 그러나 이질적인 예술관의 두 비르투오조
글·김범수(음악평론가)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로서 비르투오조라는 격찬이 스스럼없이 보내지는 연주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신화의 창조자들이다. 그들이 섰던 무대에 남아있는 열광,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 그들이 가꾸어온 숱한 화제는, 신화를 외면하는 과학 문명의 시대에 다시금 낭만적인 상상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이 라이벌로 불리는 것은 평론가들의 관심일 뿐
연주가들이 선택한 곡목이 개성을 알려준다면 그들의 연주 해석은 저마다의 인생체험에 따른 조형미의 변화를 들려준다. 1923년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19세의 호로비츠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1882-1951)은 “호로비츠는 나에게서 레슨받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완성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작곡을 할 수 있는지를 그에게 물었었는데, 그는 수줍어하면서 네, 라고 대답했다. 이 무렵 그는 영웅처럼 환영받고 있었다. 호로비츠의 지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러시아를 떠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전했는데, 훗날 그가 나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을 무척 즐겁게 생각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키에프의 음악원에서 호로비츠는 19세기 후반에 리스트와 맞먹는 명성을 누리며 러시아의 피아노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안톤 루빈스타인의 직계 제자인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한 뒤 17세에 졸업했다. 음악원 재학 시절만 해도 작곡가의 꿈을 지녔던 호로비츠였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핍박받는 환경 속에 피아니스트로 전향했다. 슈나벨이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었을 때, 이미 호로비츠의 기교는 독자적인 개성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30년 호로비츠의 시카고 순회 연주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파데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호로비츠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독학으로 터득한 연주자인데, 특히 그의 리듬과 음감이 그걸 설명해 준다. 만일 그가 음악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지금의 연주력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상당한 경지에 오를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호로비츠는 요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음악도이다.”
20세기 전반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폴란드의 애국자로서 독립된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기도 했던 파데레프스키는 루빈스타인을 가르치기도 했었던 스승이다. 그런 파데레프스키가 호로비츠에게 보낸 찬사를 루빈스타인이 마음 편하게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들 두 피아니스트가 라이벌 입장이라고 운위되는 것은 평론가들의 관심일 뿐이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이 즐겨 연주하는 음악 영역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까. 의식적인 대립 감정 없이 그들은 자신의 음악을 즐겼다.
침묵을 통해 예술적 성찰의 시간 가져
호로비트의 최초의 침묵은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한 후인 1936년에서 39년 사이이다. 스위스에 있었던 이때의 그에게는, 그가 심각한 수술을 받았다거나 신경병증세로 치료를 받는다는 따위의 헛소문까지 나돌았었지만, 호로비츠는 홀연히 연주 무대로 돌아와 그전과 같이 다이내믹한 터치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호로비츠의 복귀는 루체른 축제에서 장인인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면서였다.
1953년 호로비츠는 다시 침묵의 은둔생활을 한다. 그것도 12년이라는 참으로 오랜 세월의 칩거였었는데, 훗날 이때의 심경을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이러한 말을 남기고 있다.
“연주여행을 갈 때마다 나는 기차를 타곤 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잘 먹지도 못했으니, 기차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한 주일에 4회의 연주회를 치러야 할 정도였으니까 너무 힘든 시기여서, 갑자기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조용히 평화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싶어졌던 것이다.”
1965년 호로비츠는 카네기 홀에서 역사적인 재기 연주회를 가진다. 이때 순식간에 입장권이 매진되어 웃돈을 주며 표가 거래될 정도였다. 그후 70년대에 잠시 연주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또 그의 딸 소니아가 타계하자 상심하여 연주를 멈춘 적이 있기도 하다.
한편 루빈스타인의 연주 생애에서도 침묵은 더 높은 경지로 비상하는 발전의 단계였다. 첫 미국 연주 여행 결과에 적이 실망한 그는 4년 동안 혼자만의 사색과 연습시간을 갖게 된다. 그 사이 1908년 겨울 날, 외로움과 허기짐 속에 사랑마저 실패한 루빈스타인은 베를린의 호텔방에서 자살을 기도했지만, 벽에 매어 놓았던 줄이 끊어지면서 바닥에 나동그라져버린 일을 겪는다. 이 찰나에 그가 체험한 행복한 삶의 비밀은 ‘그것이 좋던 나쁘던간에 무조건으로 인생을 사랑하자’는 것이었다고 그 뒤 술회한다.
다시 연주를 재개한 루빈스타인은 1914년 폴란드의 독립 운동을 원조하는 한편, 바이올리니스트 유젠느 이자이와 듀오가 되어 연합군을 위한 위문 연주회도 활발히 가졌다. 외향적인 기질의 루빈스타인의 침묵은 호로비츠처럼 장기간의 간격이 아니었다.
루빈스타인의 침묵은 어찌 보면 주위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열병처럼 스스로 앓고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음악은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스케일이 크면서 화려하고 강한 표현력으로 모든 음악을 그의 개성으로 물들여 놓았다는 비평을 스스로 절감한 듯, 1960년을 전후로 그의 연주 풍모는 변한다. 젊은 시절의 흠없이 명확한 터치에 의한 음의 명료성에 세월의 풍화를 겪은 예풍이 깃들게 된 것이다. 강렬하고 충동적이던 음의 연속에 어느 사이에 내성적인 아름다움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쇠퇴기에 이를 70세 무렵의 나이에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쌓아가는 루빈스타인이었다.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두 대가의 피아니즘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간 호로비츠의 연주 기교는, 그런 그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인 절제를 갖는 서정성에서 돋보인다. 호로비츠가 레퍼토리로 자주 선택하는 협주곡의 예는,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다. 이 협주곡들에서 호로비츠는 다른 연주자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다이나미즘의 광채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낭만적인 판타지가 위축되어 버린 듯싶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세분해서 나누어 들으면 정서적인 변화는 곧 시적인 낭만으로 떠오른다.
이것은 어쩌면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해석하는 호로비츠만이 간직할 수 있는 내밀한 향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호로비츠의 특성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나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에서 섬세한 색체감을 들려준다.
호로비츠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이 협주곡들에는 루빈스타인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패시지의 기교적인 처리에서는 유사한 점이 보이기도 하다. 형식미에서 밝은 여운을 주는 루빈스타인과 시종 음악적인 긴장감을 견지하는 호로비츠의 개성이 다른 표현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루빈스타인이 대표적으로 손꼽는 쇼팽의 연주에서는 호로비츠도 발라드나 폴로네이즈·마주르카를 그의 개성에 맞게 선택하고 있다. 루빈스타인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를 스스로 편곡한 곡이나 빌라 로보스가 그에게 헌정한 ‘루데 포에마’(야만적인 시)를 스페인의 피아노 음악과 함께 연주할 때, 호로비츠는 자신의 작곡인 ‘카르멘 환상곡’이나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하면서 또 도메니크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독특한 묘미로 들려주어 투르 드 포스(tour de force : 대단한 솜씨)를 자랑한다.
19세기 후반의 80년대 동년배 피아니스트들인 슈나벨·박하우스·피셔가 베토벤을 중심으로 하는 연주가였다면, 루빈스타인은 96세의 장수를 누리며 낭만주의 음악의 즐거움 속에 생을 마칠 수 있었다. 20세기에 활약을 보였던 카자드쉬·기제킹·켐프·브라일로프스키·솔로몬·아라우·미켈란젤리 그리고 제르킨과 같은 세대이면서도 유독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피아니스트가 호로비츠이다.
지난 19세기의 음악 정서를 물려받았던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는 이제 다음 세대의 음악가들에게만 평가받을 수 있는 음악으로 아직 우리들의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뮤직가든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