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 “영어 몰입교육은 사고력 부족한 반거충이 만들 뿐”
한글날 영문학자 도정일을 만나다
한겨레
영문학자인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 7일 그를 만나 모국어에 대한 철학과 최근의 영어교육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9일 한글날이 계기가 됐다. 영문학자와 웬 한국어? 얼핏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다. 우선 그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다른 한편으론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교육’ 파동으로 우리말을 둘러싼 논의 지형의 한가운데에 영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성장기에 필요한 건 ‘국어 몰입교육’
국어학계도 ‘우리 글 최고’라는 자만 버려야
“국어학 권위자들께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 교수는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 비상한 ‘국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하는 데 관할구역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을까. ‘영어로 초래된 지금의 혼미 상황에선 영문학자이면서도 모국어로 글을 써 문필가의 명성을 얻은 선생께서, 더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요청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영문학자인 자신에게 모국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서부터 그는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실현 행위 그 자체입니다. 40년 넘게 영문학을 해 왔지만 저에게 ‘제1의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체득했고 나이 들어 치매가 와도 망실되지 않을 언어가 한국어니까요. 언어가 ‘존재의집 ’이라면, ‘도정일의 집’은 한국어인 셈입니다.”
‘광풍’으로까지 불리는 영어교육 이상열기에 대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몰입교육 같은 섣부른 시도가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를 양산해낼 뿐이라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대학의 공통된 고민이 이른바 ‘국제화’ 한답시고 경쟁적으로 받아들인 특례 입학생들입니다. 어린 시절 외국에 건너가 살다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인데, 이들 상당수가 한국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에서도 실용 회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각하고 개념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성장기에 하나의 언어에 깊이 몰입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읽고, 쓰고, 사고하고, 표현하는 고등의 언어 활동이 취약한 게 당연하죠. 몰입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교육에 모든 교육자원을 집중시키는 초·중·고등학교의 풍토도 도마에 올랐다. 영어교육도 좋지만 모국어와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인문 교육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지금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육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존의 도서관이나 학생 자치공간에 영어학습 시설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도 없는 학교에 한 해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겠다는 겁니다. 통탄스런 일입니다.”
한국 유학생 상당수 실용회화 수준
사고하고 표현하는 언어 취약 당연
영어 광풍의 배후로 그는 지난 10여년 새 우리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시장전체주의’를 지목했다. 그가 볼 때 교육은 시장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 목적이 변질된 지 오래다. 학교에서 국어보다 영어가, 읽고 생각하는 영어보다 듣고 소통하는 실용 영어가 강조되는 것도 ‘시장의 언어’가 ‘삶의 언어’를 압도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면 깡통 차고 지하도에 나앉아야 할 것처럼 협박하는데, 이것을 견뎌낼 간 큰 국민이 얼마나 있겠어요. 공포에 나포된 국민들이 영어라는 ‘생존 복음’에 너 나 없이 매달리는 형국입니다.”
영어 문제에 대처하는 진보진영의 자세에도 일침을 놓았다. “1980년대 ‘반제투쟁’하듯” 해선 안 된다는 충고였다.
“영어가 지배적 언어가 된 데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영어 자체가 갖는 포용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필요한 법입니다. 영어를 인류의 소통을 가능케 한 공유자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의 ‘영어론’은 국어학계의 폐쇄성에 대한 지적으로 귀결됐다.
“우리말 우리글이 최고라는 자만은 버려야지요. 우리말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는 영어의 룩(look)이나 심(seem)처럼 ‘~인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사물의 거죽과 속알맹이가 같을 수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비가시적 본질을 구분하는 표현법이 불가피한데도, 이를 무조건 ‘영어식’이라 배척해선 곤란합니다.”
누구보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정평이 난 그였지만, 우리말의 문장구조에 한계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들을 수 있었다. 한때 영어의 관계대명사가 가능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논법 구조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나 작가 등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말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고민해야지요. 이웃 언어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자기갱신하는 노력을 방기하는 것도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날 도 교수는 책읽기 운동을 위한 협약 체결 문제로 경남 김해를 방문했다 막 상경한 터였다. (그는 독서 활성화와 공공도서관 확충운동을 벌이는 ‘책읽는 사회 만들기’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출장의 피로가 덜 풀렸을 법한데도 한마디 한마디 공들여 풀어놓는 말을 옮기니 곧 글이 되었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기사등록 : 2008-10-09 오후 01:53:53기사수정 : 2008-10-09 오후 02:04:25
한글날 영문학자 도정일을 만나다
한겨레
영문학자인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 7일 그를 만나 모국어에 대한 철학과 최근의 영어교육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9일 한글날이 계기가 됐다. 영문학자와 웬 한국어? 얼핏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다. 우선 그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다른 한편으론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교육’ 파동으로 우리말을 둘러싼 논의 지형의 한가운데에 영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성장기에 필요한 건 ‘국어 몰입교육’
국어학계도 ‘우리 글 최고’라는 자만 버려야
“국어학 권위자들께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 교수는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 비상한 ‘국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하는 데 관할구역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을까. ‘영어로 초래된 지금의 혼미 상황에선 영문학자이면서도 모국어로 글을 써 문필가의 명성을 얻은 선생께서, 더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요청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영문학자인 자신에게 모국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서부터 그는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실현 행위 그 자체입니다. 40년 넘게 영문학을 해 왔지만 저에게 ‘제1의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체득했고 나이 들어 치매가 와도 망실되지 않을 언어가 한국어니까요. 언어가 ‘존재의집 ’이라면, ‘도정일의 집’은 한국어인 셈입니다.”
‘광풍’으로까지 불리는 영어교육 이상열기에 대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몰입교육 같은 섣부른 시도가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를 양산해낼 뿐이라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대학의 공통된 고민이 이른바 ‘국제화’ 한답시고 경쟁적으로 받아들인 특례 입학생들입니다. 어린 시절 외국에 건너가 살다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인데, 이들 상당수가 한국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에서도 실용 회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각하고 개념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성장기에 하나의 언어에 깊이 몰입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읽고, 쓰고, 사고하고, 표현하는 고등의 언어 활동이 취약한 게 당연하죠. 몰입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교육에 모든 교육자원을 집중시키는 초·중·고등학교의 풍토도 도마에 올랐다. 영어교육도 좋지만 모국어와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인문 교육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지금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육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존의 도서관이나 학생 자치공간에 영어학습 시설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도 없는 학교에 한 해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겠다는 겁니다. 통탄스런 일입니다.”
한국 유학생 상당수 실용회화 수준
사고하고 표현하는 언어 취약 당연
영어 광풍의 배후로 그는 지난 10여년 새 우리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시장전체주의’를 지목했다. 그가 볼 때 교육은 시장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 목적이 변질된 지 오래다. 학교에서 국어보다 영어가, 읽고 생각하는 영어보다 듣고 소통하는 실용 영어가 강조되는 것도 ‘시장의 언어’가 ‘삶의 언어’를 압도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면 깡통 차고 지하도에 나앉아야 할 것처럼 협박하는데, 이것을 견뎌낼 간 큰 국민이 얼마나 있겠어요. 공포에 나포된 국민들이 영어라는 ‘생존 복음’에 너 나 없이 매달리는 형국입니다.”
영어 문제에 대처하는 진보진영의 자세에도 일침을 놓았다. “1980년대 ‘반제투쟁’하듯” 해선 안 된다는 충고였다.
“영어가 지배적 언어가 된 데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영어 자체가 갖는 포용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필요한 법입니다. 영어를 인류의 소통을 가능케 한 공유자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의 ‘영어론’은 국어학계의 폐쇄성에 대한 지적으로 귀결됐다.
“우리말 우리글이 최고라는 자만은 버려야지요. 우리말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는 영어의 룩(look)이나 심(seem)처럼 ‘~인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사물의 거죽과 속알맹이가 같을 수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비가시적 본질을 구분하는 표현법이 불가피한데도, 이를 무조건 ‘영어식’이라 배척해선 곤란합니다.”
누구보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정평이 난 그였지만, 우리말의 문장구조에 한계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들을 수 있었다. 한때 영어의 관계대명사가 가능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논법 구조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나 작가 등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말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고민해야지요. 이웃 언어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자기갱신하는 노력을 방기하는 것도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날 도 교수는 책읽기 운동을 위한 협약 체결 문제로 경남 김해를 방문했다 막 상경한 터였다. (그는 독서 활성화와 공공도서관 확충운동을 벌이는 ‘책읽는 사회 만들기’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출장의 피로가 덜 풀렸을 법한데도 한마디 한마디 공들여 풀어놓는 말을 옮기니 곧 글이 되었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기사등록 : 2008-10-09 오후 01:53:53기사수정 : 2008-10-09 오후 0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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