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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Flamin'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Colors changing hue Morning field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soothed Beneath artist's loving hand Repeat *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And when no hope was left incide On that stary sta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But I could ha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Starry strray night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ingers that you've met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of a bloody rose Lik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And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별이 총총한 밤 파랑, 회색으로 팔레트를 물들이고 여름날, 내 영혼의 어두운 면을 궤뚫는 눈으로 밖을 바라봐요 언덕에 드리운 그림자,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하고 눈처럼 하얀 리넨 캔버스에 미풍과 겨울의 싸늘함을 색깔로 그려내요 * 당신이 뭘 말하려 했는지 난 이제 알 것 같아요 온전한 정신을 찾으려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죠 어떻게 듣는지도 몰랐죠 아마도 지금은 귀기울일 거에요 별이 총총한 밤 밝게 타오르는 듯 활짝 피어난 꽃과 보랏빛 안개속에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빈센트의 파아란 눈망울에 비쳐요 곡식이 익는 황금빛의 아침 들판으로 색은 바뀌고, 고통으로 주름진 지친 얼굴은 예술가의 사랑스런 솜씨로 위로 받아요 반복 * 그들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진실했죠 그리고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별이 총총한 밤 연인들이 그러듯이 당신도 목숨을 끊어 버렸어요 하지만 난 당신께 이렇게 말했어야 했어요 이 세상은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사람에게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는 걸... 별이 총총한 밤 텅빈 홀에 걸린 초상 이름 모를 벽에 걸린 채 세상을 바라보는 액자도 없는 초상들. 당신이 만난 누더기 옷에 초췌한 이방인처럼 잊을 수가 없어요 아무도 밟지 않는 눈 위에 짓이겨 뭉개진 빠알간 장미의 은빛 가시도... 이젠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뭘 말하려 했는지 온전한 정신을 갈구하며 얼마나 괴로워 했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죠 지금도 귀기울지 않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테죠. |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25>김대건 신부와 솔뫼·미리내 성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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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솔뫼성지(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5)는 김대건(1822∼1846) 신부가 출생한 곳이고,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는 그가 군문효수를 당해 절명한 후 묻혀 있는 곳이다. ‘소나무 산’이라는 솔뫼에는 200살이 넘는 재래 적송들이 상큼한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은하수 골짜기’란 뜻의 미리내는 계곡이 무척 아름답다. 두 곳 모두 곱디고운 우리말 땅이름이다. 김 신부(세례명 안드레아)의 증조부(진후·1814년), 종조부(한현·1816년), 부친(제준·1839년)은 천주교를 믿는다고 차례로 처형당했다. 아흔 아홉칸의 대갓집에 살던 김해 김씨 가문이 몰락하여 폐문지경에 이르렀고 정든 고향에 머물 수조차 없게 되었다. 7세때 어머니 고씨(우르술라)를 따라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하였다. 여기서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렇다면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출현한 당진 솔뫼 생가터는 어떤 자리일까. 22년 동안 4명의 고귀한 목숨이 희생됐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가족사다.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당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거봉 김혁규(한국풍수지리중앙회장) 선생과 이상호, 심순희, 신현웅(요셉), 심효보씨 등 문하생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당진 성당의 이춘옥(리디아), 신효철(데레사), 홍경자(루시아), 안영옥씨 등 여성 신자들이 합류하니 간산 순례길이 한층 활기를 띠며 즐거워졌다. 최근 들어 여성 풍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특히 양택 등 실용풍수 쪽으로 주부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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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시(法施) .재시 (財施). 무외시 (無畏施)를 들고 있습니다. 당연히 어떤 물질적인 것이 상정됩니다. 말합니다.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보시가 됩니다. 요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기고 극복해야할 경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첫눈에 강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대를 대합니다.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안시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흔히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 늘 싸우는 표정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성난 표정, 그리고 무심한 표정은 사회를 삭마가하게 하고 서로간에 말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우리는 늘 험악한 말들을 쉽게 합니다. 대화방 같은 곳에 가보면 정말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언쟁을 일으키고 분쟁에 휘말리게 합니다. 네개나 된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보시행입니다. 양보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광경을 자주 봅니다. 양보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무재시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집에 사람을 재워 준다고 했을 때 보시행입니다. 어쩌면 요즘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이같이 무재칠시가 오히려 더 의미있는 보시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
사람의 일생이 배움의 과정이라면 그 길은 대개 세 갈래쯤 된다. 하나는 독학으로 일관하여 어느 정도 내공을 쌓지만 곧 한계에 부딪힌 채 ‘우물안의 개구리’로 머무는 경우다. 보통의 경우는 제도권의 교육을 받으며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좀 특이한 경우는 혼자 수련하다 기인(奇人)같은 스승을 만나 도(道)를 터득하는 것이다. 이는 흔히 무협지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현실속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그가 바로 동부민요 명창 박수관(50·동부민요보존회 회장)이다. 그는 거의 묻힐 뻔한 동부민요를 되살렸을 뿐 아니라 미국 뉴욕의 카네기 메인홀 공연 등 200여회의 공연을 통해 국내·외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린 소리꾼이다.
1999년 국악계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무명’의 인물이 등장, 3월 제1회 상주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인 문화관광부 장관상, 같은해 5월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일반부 대상인 국무총리상, 10월에는 제7회 서울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것이다. 동부민요라는,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소리를 갖고 국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바로 박수관이다.
그가 3개 상을 휩쓸었을 때 국악계 안팎에선 말이 많았다. 정보기술(IT)분야 설비제작업체의 대표이자 최고의 공학기술자에게 주는 대한민국 명장이기도 한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기계기술자이자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사장이 소리를 한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하다. 명창이나, 대한민국 명장이나 한 분야만 해도 보통사람이 이루기엔 너무 높은 ‘고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리는 정직한 것이었다. 그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늘어나면서 ‘뒷말’은 자연히 잦아들었다.
“공학을 전공한 것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소리는 어릴 적부터 제 핏속에 흐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야를 동시에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니 집중력이 대단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산만한 편이라고 했다. 그는 일을 여러 가지 펼쳐놓고 동시에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병렬형 인간’이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동부민요를 널리 알리기 위해 93년부터 21회의 개인발표회와 200여회의 공연 등 세계 각국에서 공연활동을 해왔다. 놀라운 것은 그 모두가 초청공연이라는 점이다. 그의 소리에 나라 바깥에서 더 감탄하고 경이롭게 여긴 것이다. 그는 “몸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는 문화가 다른 사람들도 감동시킨다”고 강조했다.
2000년 6월 미국 카네기 메인홀 초청공연을 비롯해 링컨센터, 케네디센터 콘서트홀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 독일에서도 소리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호기심이 아니라 감동의 박수가 10여분이나 이어졌다. 이탈리아 로마 공연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스승 주제페 타테이는 “내 평생 이렇게 훌륭한 소리는 처음 들었다”며 놀라워 했다고 한다. 2003년 10월16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본부 총회 초청공연 무대에 섰을 땐 185개국의 대통령과 대사, 장관들이 “이렇게 훌륭한 한국의 전통음악이 존재하는 줄 몰랐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러시아 3대 국립음대 중 하나인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에서는 2000년 2월 그에게 명예음악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명예교수로 위촉했다. 2001년 11월 9·11 세계무역센터 참사 추모음악회에 초청된 박수관은 링컨센터에서 경상도의 상여소리를 불러 그 자리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애절한 상여소리가 ‘파란눈’들에게도 통했던 것이다.
박수관은 해외에서 더 알아준다고 할 정도로 굵직한 상을 잇달아 받았다. 2001년부터 매년 뉴욕에서 미주 한국 국악경연대회를 개최, 한·미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올 1월 미국 대통령상 금상을 받았다. 또 지난달 3~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퍼시픽 디자인센터에서 열린 ‘러시아인 밤의 축제’에서 제3회 타워상을 받았다.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영화배우 밀라 요보비치 등이 그와 함께 상을 받았다. 역대 수상자로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샤론 스톤, 더스틴 호프만,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이 포함된 걸 보면 상의 권위를 짐작할 만하다.
올해 초 프랑스의 현대음악정보자료연구소가 발간한 세계 전통음악가 인명사전에 한국인 음악가론 최초로 등재되기도 했다.
소리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다.
경남 김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박수관은 동네 상여꾼들의 구성진 가락과 각설이패의 장단을 들으며 소리와 친해졌다. 학교에 갈 때나 집으로 돌아올 때도 각설이패를 따라다니면서 막대기를 두드리며 소리를 익혔다. 보다못한 부모는 “공부나 하라”며 초등학교 6학년때 부산으로 전학을 보냈다. 한번 인이 박힌 게 쉽게 빠지랴. 박수관은 부산진역 광장을 연습장 삼아 소리를 계속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완전히 미친 놈’이었다. 그때 부산진역 광장에서 떠돌이 소리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동부민요의 달인 김로인(金路人)이다.
“제 딴엔 한 6년 정도 소리를 닦아 좀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웬 거지같은 노인이 다가와 ‘소리 가르쳐줄까’ 하는 겁니다. 속으로 ‘할배(할아버지)가 소리를 뭐 안다고…’ 했는데 막상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소리가 있었나’ 싶더군요.”
그 길로 박수관은 김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소리를 배웠다. 악보는 당연히 없는 도제식 가르침이었다. 스승은 ‘자연에 가깝도록 소리하고 가슴으로 소리해야 한다’ ‘창법을 완전히 익히기 전에 남들 앞에서 소리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국악계에 알려진 바도 없는 김로인은 동부민요 중 가장 어렵다는 전쟁가, 백발가 등을 전수해 주었다.
박수관은 소리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소리의 학술적인 체계를 다듬고 문하생들에게 전수를 하고 있다. 98년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국제민속학술대회에서 ‘한국 부전(不傳)민요 연구’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도 한다. 작년 11월 백두대간 소리 ‘박수관 동부민요’ CD 음반을 제작, 해외판매 수익금은 전액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을 위한 비상구호기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그가 공연을 하고, 논문을 발표하고, CD 음반을 내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맥이 끊어질 뻔한 동부민요를 제대로 보존, 전승하고 널리 알리고자 함이다.
“민요란 우리 민족의 정서가 녹아있는 정신적 자산이자 세계에 내세울 문화유산입니다. 과거 자료로 보관할 게 아니라 생활속에서 흥얼댈 수 있어야 음(音)이 생명력을 갖게 되지요.”
그는 지금도 출퇴근길 차안에서, 옛날 학교 등하교길에서 불렀던 것처럼 목청을 돋워 소리를 갈고 닦는다.
〈이동형 여론독자부장 s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