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바꾸자!>
인류의 역사를 한편에서 보면 전쟁의 연속이다. 전쟁을 시작하고 살생과 파괴가 끝나면 임시평화가 온 것 같지만, 그 때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번영과 발전의 연속이다.
인류는 계속 번영하고 발전한다. 이 발전과정에서 더 큰 발전을 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끝나면 급속도로 발전하고 번영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보면 인류보다 성스러운 사랑을 연속적으로 대를 물리면서 한다. 사랑을 하다보면 번영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번영하고 발전하는 동안 그릇된 사랑이 나타나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이 끝나면 더 새로운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개인도 같다. 불행(전쟁), 행복(발전), 사랑(사랑)이 마치 사계절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어디다 초점을 맞추고 세상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불행을 만나는 그 순간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고, 행복한 그 순간에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시작하면 이미 이별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고, 이별을 한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랑이 싹트는 것이다. 이 역시, 사계절처럼 연속적으로 흐르는 숙명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삶은 조금 여유로워진다. 우리가 겨울을 즐기듯이 불행도 즐길 수 있고, 우리가 가을을 맞이하며 낭만에 젖듯이 이별을 맞이하며 즐길 수 있다. 문재른 사고에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넓은 가슴이 있어야 한다. 그 넓은 가슴은 아픈 체험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야 가능하다.
기쁘고 즐거운 것은 받아들이고 슬프고 화나는 일은 거부한다는 것은 봄, 가을만 있고 여름과 겨울은 없기를 바라는 것으로, 스스로 생명이길 거부하는 어리석음이다. 쓰레기에서 장미가 피었다면 그 쓰레기도 아름답게 보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기창조>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가는 순간이다. 또한 과거의 일을 보고 생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에게 미래가 현재라는 이름으로 와서 느끼는 모든 것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과거가 없다면 우리는 현재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미래를 알고 싶다면, 미래를 먼저 알려고 하지 말고 과거를 먼저 알아야 한다.
모든 생명의 구조는 과거를 알게 되어있을 뿐 미래에 대해서는 그저 짐작할 뿐이다. 예를 들어 내게 예기치 못한 불행한 일이 왔다면 반드시 그 불행을 부른 과거가 내게 있다는 것이다. 똥이 있어 구린내가 나고 그 구린내로 인해 똥파리가 오듯이, 또는 꽃이 있어 향이 있고 그 향이 있어 벌나비가 오듯이...
그러므로 내가 오늘 행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과거가 되고 그 과거가 미래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오늘 무엇을 하던 그것은 곧 과거가 되는 동시에 미래를 창조하는 원인인 것이다. 동시에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향기나는 일을 하면 내게 벌과 나비같은 생명이 와서 내가 되고, 내가 오늘 구린내나는 행위를 하면 똥파리같은 생명이 와서 내가 된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모두가 똥이 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일부는 피가 되고 살이되고 그밖에 꼭 필요한 것이 되듯이, 우리의 과거가 모두 잊혀지는 것이 아니고 내 정신으로, 내 마음으로, 나의 유전정보인 본능으로 남아서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벌과 파리는 비슷한 곤충이다. 그러나 그 둘이 좋아하는 것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 벌은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면 파리는 순전히 개인주의로 산다. 벌은 미래를 준비하고 살지만 파리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 벌은 이 세상에 자신보다 능력이 있는 존재에 대하여 조금은 알고 준비하고 있는데, 파리는 그런 감각이 둔하다. 벌은 생기인 '향기'를 좋아하는데 비해, 파리는 부패한 곳을 좋아한다. 벌은 자기 집을 짓고 사는데 파리는 자기 집이 없다.
이와같이 사람의 모습은 비슷하나 그 사는 방식이 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 판단은 현재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生氣를 좋아하며 매일매일 좋아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지, 死氣를 좋아하며 매일매일 타락하는 사람인지...
아주 가끔은 벌도 똥을 찾아갈 수 있고, 파리도 꽃을 찾아갈 수 있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살면서 다가오는 불행으로 내 안에 그 불행을 끌어 당기고 있는 원인을 찾아 제거하거나, 아니면 찾아온 불행으로 자기 성장을 할 것이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하여 현재에서 잔머리 쓰며 불행의 원인을 만들어 과거에 심고, 더 큰 불행을 부르기를 반복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불행한 일을 만든다는 것은 나의 작은 이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하는 각종 행위이다. 반대로 행복을 부르며 행복을 만드는 방법은 나와 남을 동시에 행복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전자는 '업'이라 했고, 후자는 '덕'이라 했던 것이다.
이 모두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또는 과거의 변이, 정신과 마음, 양심, 유전정보(본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큰 부작용이다.
따라서 정신이란 과거로 미래를 보는 능력이며, 마음과 양심이란 과거로 현재를 느끼는 능력이고, 유전정보적 본능은 나만의 과거가 아니라 내 모든 조상의 과거로, 현재와 미래를 느끼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의 행위는 정신과 양심, 그리고 마음과 본능을 활용하는 행위인 것이다.
과거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체도 죽음으로 사라진 것 같지만, 어떻 형태로든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유전정보가 되어 자식에게 영원히 남겨지는 것이다. '부전자전' , '피는 못 속여!' , '그 집안 내력'등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한 행위가 영원히 남는다는 생각으로 산다면, 오늘의 행위로 자기창조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생동감이 넘치고 여유가 생기고 지금보다는 신중하여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즉, 과거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남아서, 미래를 창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백석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