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선동렬·박찬호, 누가 최고수일까?
최동원 선동렬 박찬호의 투수 삼국지 - 1편
05.12.06 08:24 ㅣ최종 업데이트 05.12.08 11:54 신명철 (smc6404)
<오마이뉴스>독자여러분안녕하십니까.1970년대후반에는주간스포츠를통해서,1985년이후에는스포츠서울오프라인과온라인에서스포츠팬여러분과만났던신명철입니다.

저는1980년대이후오랜기간교통방송,KBS등여러방송매체에서스포츠를사랑하는청취자(시청자)여러분과함께하기도했습니다.요즘도교통방송에서스포츠종합뉴스를전해드리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와함께일하는첫날인5일서울도곡동에있는야구회관에서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출전국가대표팀코칭스태프의첫모임이있어취재를갔다가선동렬투수코치(삼성감독)와반갑게만났습니다.

저는선수시절선감독과몇가지잊지못할일이있는데그가운데하나가1985년7월선감독에게'무등산폭격기'라는별명을지어준것입니다.그때20대중반의팔팔한청년이이제는40대중반이돼한국야구를이끌어가는지도자가됐습니다.

선감독을만난김에그동안제가여러매체에올렸던글가운데선감독과관련된기사등몇편을손질해게재하겠습니다.제기사를보신분들도요즘에맞게일부내용을바꿔정리했으니다시읽어보시기바랍니다.첫기사는선감독,최동원한화투수코치,지난달결혼한박찬호(샌디에이고파드리스)가주인공인'투수삼국지'입니다.고맙습니다. <편집자주>
최동원·선동렬·박찬호. 과연 누가 마운드의 최고수일까요?

같은 시대 인물은 아니지만 야구팬들사이에서는 영원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투수의 능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구속, 변화구, 컨트롤, 마운드에서의 위압감, 견제능력, 수비능력(제5의 내야수) 등.

구속은 투수의 기본 요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빠르면 좋지만 느리다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타이밍 빼앗기입니다. 빠른 공이 좋은 이유는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에서 이기는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일수록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는 구속의 변화를 꾀하게 됩니다. 시속 120㎞의 직구를 던지는 투수는 시속 100㎞의 변화구로 타자의 타격리듬을 깨뜨립니다.

1980년대 중반 국내무대에서 뛰었던 재일동포 김신부(청보 핀토스)가 그런 부류의 투수였습니다. 그의 커브는 시속 100㎞ 안팎이었습니다. 공위에 파리가 앉아서 날아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프로선수들에게는 매우 느린 속도지만 아마추어 야구를 하시는 분들 가운데에는 매우 빠른 직구 수준입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속도입니다.

최동원·선동렬·박찬호는 모두 시속 150㎞ 이상의 빠른 공을 지녔거나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강속구면 시속 152㎞든 155㎞든 그 차이가 없습니다. 일단 '빠르다'로 통하니까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메이저리그급 투수의 기본 스피드를 시속 90마일(약 144㎞)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 스피드면 구속의 변화만 제대로 할 줄 알면 메이저무대에서 살아남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속에 관한 첫째 일화입니다.

1981년 봄(5월? 6월? 직접 관계자인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처럼 최동원, 석원, 수원 3형제를 잘 키웠고, 그 가운데 큰 아들인 동원을 1970년~80년대 국내 최고의 투수로 만든 최윤식씨는 2003년 3월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막내인 수원은 현재 프로야구 심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 용산 미 8군 영내 야구장.

당시로서는 신기한 스피드건을 지닌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 제이스 구단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동원(당시 나이 23세)이 피칭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수는 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의 팀 동료인 최정기였습니다.

당시 토론토 구단 관계자로는 요즘 국내팬들에게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패트 길릭, 웨인 모건 등이 있었습니다. 직구 최고구속은 96마일(약 154.5㎞), 슬라이더는 89마일(약 143.2㎞), 커브는 84마일(약 135.2㎞) 안팎이었습니다. 놀라운 스피드였습니다. 그런데 토론토 관계자들이 더더욱 놀란 것은 흔히 말하는 공끝이었습니다. 최동원은 타자 앞에서 솟아 오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공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한창때의 박찬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구속과 구질을 갖고 있던 최동원은 그러나 메이저리그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병역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최동원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 우승으로 병역 특례대상자가 됐지만 당시 병역법 시행령은 전문분야(최동원의 경우 야구)에서 5년간 종사해야 병역이 면제됐습니다.

구속에 관한 둘째 일화입니다.

1993년 7월 17일 미국 뉴욕 주 버펄로시를 홈으로 하는 마이너리그 트리플A팀인 버펄로 바이슨스(최근 기아 출신의 최향남이 이 구단과 입단계약을 맺었습니다)의 파이롯 구장. 여름철 유니버시아드대회 야구 1, 2위 결정전 한국-쿠바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박찬호는 이날 5회에 구원 등판해 세계최강 쿠바 타선에 5이닝동안 4안타만 내주며 3실점(2자책점)해 메이저리그 구단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LA 다저스의 짐 스토클, 뉴욕 양키스의 딕 그로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윌리엄 클라크 등 6∼7개 메이저리그 구단 스카우트들의 관심은 박찬호의 투구 성적이 아니라 박찬호의 투구 스피드였습니다. 이들이 백스톱 뒤에 진을 치고 들이 민 스피드건에는 박찬호의 직구 구속이 시속 93∼95마일로 일정하게 찍히고 있었습니다. 스카우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동양에서 온 바짝 마른 투수가 저런 공을 던질 수 있다니!

감독이 올라올 때가 되었는데....ㅠㅠ 텍사스 레인저스의 선발 박찬호가 6-3으로 앞선 7회 초 마운드에서 벅 쇼월터 감독을 기다리고 있다.(달라스 알링턴구장 1루 사진취재석에서 2005. 4. 13)
ⓒ 배우근
박찬호는 직구에서는 그들에게서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직구 외 구종에서 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박찬호는 당시 주력 변화구로 슬라이더를 던지고 있었는데 변화의 각이 예리하지 못했고 컨트롤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찬호는 미국에 진출한 뒤 슬라이더를 버리고 커브를 자신의 주력 변화구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저스의 짐 스토클 스카우트는 한국대표팀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박찬호를 스카우트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물어 보는 등 타 구단 스카우트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습니다. 물론 타 구단 스카우트들과 만나서는 "공만 빨랐지, 컨트롤도 좋지 않고…"라며 능청을 떨었겠지만 말이죠. 결국 그해 연말 박찬호의 메이저리그행이 성사됩니다.

구속에 관한 셋째 일화입니다.

선동렬은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미국 뉴어크),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등을 통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그 무렵 그의 직구 구속은 시속 158㎞까지 측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13~14년여 뒤인 1995년 11월 11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인근 기후시의 나가라가와구장.

한일프로야구 슈퍼게임 5차전. 1-1로 팽팽히 맞선 9회 말 선동렬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첫 타자는 대타 다이호(주니치,1994년 센트럴리그 홈런왕)였습니다. 초구 직구 스트라이크.낮 경기임에도 외야 전광판 '只今 スピ-ド'(현재 스피드)란에 149㎞가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 선동렬 삼성 감독

ⓒ 삼성라이온즈

투구속도에서 팽팽하게 맞선 최동원 선동렬 박찬호는 변화구로 다시 한번 겨뤄 봅니다. 저마다 특화된 변화구로 무장했기에 두번째 겨루기도 첫 대결에 못지 않은 흥미진진한 승부가 펼쳐집니다. 물론 가상의 공간에서입니다.

세 투수가 같은 시대 인물은 아니지만 선동렬은 5년 선배인 최동원과는 1980년대 후반까지 활동시기가 겹치지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에서는 함께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고, 프로야구에서는 선동렬이 데뷔한 1985년부터 함께 그라운드를 누빕니다. 또 10년 후배인 박찬호와는 일본과 미국으로 갈라져 1990년대말까지 선수생활을 합니다.

먼저 최동원의 변화구 능력을 살펴봅니다.

최동원은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한데다 컨트롤이 정교했습니다. 커브, 슬라이더, 리버스 커브(reverse curve 속칭 슈트-일본식 영어 야구용어) 등 다양한 변화구를 던졌습니다. 커브는 각이 날카롭고 낙차가 컸습니다. 야구인들은 낙차가 큰 커브를 말할 때 한자(尺)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자면 약 30㎝. 큰 낙폭입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에 버금가는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최동원의 커브는 '한자급'이었습니다. 선배 야구인들은 낙차가 클 뿐만아니라 각이 예리하게 꺾이는 커브를 '도롭쁘(Drop)'라고 했습니다. 일본식 영어 야구용어인 게 분명하고 '뚝, 떨어진다'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커브 가운데에서도 완만한 곡선을 그리지 않고 직각(? 이 역시 선배 야구인들의 표현입니다)으로 떨어지는 커브를 특정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많은 야구인들은 상업은행~육군을 거치며 국가대표로 활약한 김설권씨를 '도롭쁘'의 대가로 꼽습니다. 박찬호의 커브는 선배 야구인들이 보기에는 '도롭쁘'가 아닙니다. 낙폭은 수준급이지만 각이 예리하지 못해서입니다. 최동원의 커브는 낙폭과 예리하게 꺾이는 맛이 있었습니다.

최동원은 커브 외에 슬라이더 리버스 커브(역회전공)도 즐겨 던졌습니다. 투수가 던질 수 있는 변화구는 거의 모두 던졌습니다. 변화구 컨트롤도 빼어났습니다. 팔꿈치를 바깥쪽으로 비틀어 던지기 때문에 부상 가능성이 높아 요즘 투수들은 거의 던지지 않는 역회전 공도 승부처다 싶으면 던졌습니다.

다음은 선동렬의 변화구입니다.

선동렬은 천하가 인정하는 슬라이더의 왕자입니다. 커브가 가운데 손가락을 실밥에 걸어 공을 감아 돌리고 엄지로 튕겨 주듯 던지는데 비해 슬라이더는 중지로 실밥을 걸고 수도(手刀)로 내려치듯이 던집니다. 그래서 커브는 각이 큰 반면 슬라이더는 각이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또 커브는 종(從)으로 변하는 게 기본이고 슬라이더는 횡(橫)으로 변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변화구의 위력을 단순 비교한다면 슬라이더보다는 커브를 위로 봅니다.

그러나 선동렬은 커브에 못지않은 각을 지닌 슬라이더를 구사했습니다. 선동렬의 전성기 때 저는 '무등산 폭격기'의 슬라이더가 한 뼘이 휜다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한자급' 수준의 부풀린 표현이었음을 이제 와서 인정하지만 실제로 포수 바로 뒤에서 그가 던진 슬라이더를 보면 그런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2005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투수로 나선 선동렬 감독
ⓒ 삼성 라이온즈
투수들이 피칭연습을 하는 동안 옆에 서있으면 공이 회전하면서 내는 소리-쉬시시식? 쉬리리릭?-와 함께 무서움마저 느낄 정도로 빠르게 공이 지나갑니다. 그런 분위기가 가장 확실하게 느껴지는 게 선동렬이었습니다.

그런데 '타고 난 투수' 선동렬은 왜 커브는 거의 던지지 않고 슬라이더를 주력 변화구로 택했을까요. 그의 손가락은 큰 몸집에 견줘 짧은 편입니다. 저는 작은 키-선동렬의 어깨 정도?-인데 그와 악수하면 손을 맞잡습니다. 변화구는 기본적으로 손가락 장난입니다. 손가락으로 감아 던지는 커브는 선동렬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등산 폭격기'는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최고의 변화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야구를 한창 배우던 고등학교 때 훈련을 마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구일기를 쓰며 노력한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달 장가를 들고 6일 귀국한 박찬호입니다.

박찬호는 체인지업에 눈을 뜨면서 1990년대 중후반 10승 대 투수로 성장했습니다. 박찬호가 변화구로 커브 서클체인지업 등을 던지는 사실은 인터뷰나 신문 사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미국 현지 취재기자들이 박찬호에게 SF볼(Split fingered Fastball)을 던지느냐고 물어 보면 박찬호는 이에 대해 똑 떨어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구종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투수의 본능적인 대응이었습니다.

SF볼은 포크볼보다는 다소 좁게 검지와 중지를 벌려 잡는데 공을 쥐는 형태(그립)가 직구와 포크볼의 중간쯤이라고 보면 됩니다. 뒤에 박찬호가 가끔 SF볼을 던지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박찬호는 아마추어 시절 주력 변화구가 슬라이더였습니다. 미국 진출 초기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각이 예리하지 못하고 컨트롤도 들쭉날쭉이어서 버트 후튼 등 마이너리그 투수코치들의 조언을 받아 주력 변화구를 커브로 바꿨습니다. 빠른 공과 커브가 박찬호의 주무기지만 사실 이 두 구종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버텨내기는 힘듭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찬호는 직구의 또 다른 형태인 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의 일종인 서클체인지업(일명 OK볼) 등을 계속해서 익혀 나갔습니다.

▲ 박찬호 투수
ⓒ 배우근
1편에서 나왔듯이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타이밍 빼앗기입니다. 커브나 슬라이더 등과 같이 공의 궤적을 종횡(從橫)으로 변화시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같은 직구라도 시속 150㎞짜리와 시속 130㎞짜리를 잇따라 던져 타자의 헛스윙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이 경우 느린 직구도 넓은 의미의 체인지업이 됩니다. 즉, 구속의 변화(감속)를 일으키는 구질을 모두 이른다고 보면 됩니다. 궤적의 변화가 기본인 커브도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대 중반 국내에서 활동한 재일동포 김일융은 같은 커브면서도 구속이 서로 다른 그리고 변화각이 서로 다른 커브를 구사했습니다.

검지와 중지에 공을 찍듯이 끼어서 던지면 '포크볼',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으고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공을 감싸 던지면 서클 체인지업, 다섯 손가락을 모두 이용해 포환 잡듯이 감싸 던지면 '팜볼', 검지 중지 무명지의 둘째 마디를 구부려 세 손가락의 손톱부위로 공의 중심부를 누르거나 찍은 뒤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공의 바깥쪽을 감아 던지면 '너클볼'입니다. 이 모든 구종이 구속의 변화(감속)를 위해 개발됐습니다.

체인지업은 기본적으로 빠른 공 다음에 구사합니다. 시속 150㎞의 불같은 강속구를 던진 다음 시속 130㎞가 될까말까 한 체인지업을 스트라이크존 아래로 던지면 천하의 내로라하는 타자도 헛방망이질하게 마련입니다. 박찬호는 이와 같은 체인지업을 적절히 던지면서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세 투수 모두 자신의 특화된 변화구를 던지면서 구속에 이어 팽팽한 대결을 이어갑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야구팬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컨트롤은 단순히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투수라면, 리틀야구 투수라 할지라도 타석을 비워 놓은 채 던지면 100개 가운데 실수로 한두 개 정도 빠지는 것을 빼고는 모두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컨트롤이라고 표현하는 투수의 능력을 미국에서 사용하는 야구용어인 'LOCATION'으로 바꿔 보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폴 딕슨의 야구용어사전에서는 'LOCATION'을 "A pitcher's ability to place the ball where he wants it"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던지고 싶은 곳에 던질 수 있는 능력이라는 얘기겠죠.

어깨(스피드)는 타고 나지만 컨트롤은 후천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게 야구계의 정설입니다. 어떻게 하면 컨트롤을 좋게 할 수 있을까. 일단 많이 던져야 합니다. 물론 온 힘을 다해 많이 던지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많이 던지되 먼저 해결해 놓아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안정된 투구 자세입니다. 좋은 투구자세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야구 농구 골프 등 모든 운동에서 자세가 좋으면 기량 향상은 뒤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최동원 선동렬 박찬호의 컨트롤 싸움에서는 누가 앞설까요.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컨트롤과 관련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역대 심판원들이 꼽는 국내프로야구 컨트롤 우수투수 1, 2위를 다투는 임호균(은퇴, 삼미-롯데-청보), 이상군(은퇴, 빙그레)은 스프링캠프 때면 자신의 훈련 외에 남의 훈련을 돕는 시범조교가 돼야 했습니다. 심판원들도 해마다 스프링캠프 때면 강도높은 훈련으로 판정의 질적 향상을 꾀합니다. 심심하면(?) 바뀌는 스트라이크존의 통일 작업도 이때 하게 됩니다.

전지훈련캠프에서 심판원들은 투-포수를 제대로 앉혀 놓고 스트라이크 볼 판정을 합니다. 이때 임호균과 이상군은 스트라이크존에 살짝 걸치는 공을 던져 심판원들의 판정수준을 높이는 도우미가 됩니다. 이 정도라면 어느 투수라도 도우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구사항의 수준이 높아지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공을 (스트라이크존 밖으로)반개만 빼 봐, 아니 한 개만 빼 봐."

아니 이게 될 법이나 할 일인가요. 투-포수 간 거리는 60피트 6인치(약 18.44m). 홈플레이트의 투수를 보는 면, 즉 가로는 17인치(약 43.2㎝). 야구선수가 아니라면 20m가까이 떨어진 곳에서 두 뼘 정도 되는 홈플레이트 위를 통과시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공을 스트라이크존 바깥쪽 라인위로 던지고 이어서 공지름의 절반, 다시 이어서 공지름만큼 옆으로 빼라니. 그러나 두 시범조교는 심판원들의 요구사항을 잘 따랐습니다. 그들은 컨트롤의 귀재였던 것입니다.

최동원은 지난 2003년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 부친 최윤식씨의 철저한 교육에 따라 야구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야구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육군 장교 출신인 최윤식씨는 아들을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집안 한쪽에 간이 야구시설-지금으로 보면 투구스피드를 측정하는 시설쯤 되는-을 만들어 놓고 컨트롤부터 잡아 나갔습니다.

최동원이 든든한 축족(軸足 오른발)을 기둥삼아 왼발을 높게 차올리고 길게 내딛는 등 자신의 체격에 견줘 큰 투구 동작을 갖고 있었음에도 안정된 컨트롤을 지닌 투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초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엄격한 지도 아래 확실한 투구자세를 만든 게 큰 힘이 됐습니다.

이때 최동원이 '카피'한 투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호리우치였습니다. 현재 요미우리 사령탑을 맡고 있는 그는 V9신화(1965년∼1973년)를 이룰 때 기둥투수였습니다. 프로 통산 203승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선동렬은 투수로서 한창 커나갈 때인 광주일고 시절 '야구일기'를 썼습니다. 그날의 훈련내용, 반성해야 할 점, 보완해야 할 사항, 스스로 터득한 투구요령 등 깨알같은 글씨로 일기를 썼습니다. '무등산 폭격기'의 X파일인 셈입니다. 그는 말하자면 독학파였습니다. 스스로 투구자세를 만들었고 컨트롤도 잡아 나갔습니다.

독학파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선동렬이 1980년∼90년대를 풍미한 슬라이더의 대가라면 1960년대를 대표하는 슬라이더의 최고수는 김소식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입니다. 김 부회장이 부산고등학교에 다닐 때 일입니다.

"어이, 소식이. 오늘 운동장 10바퀴 돌고 200개 던져."

당시 감독 A씨가 날이면 날마다 지시하는 훈련내용이었습니다. 모범생 김소식은 군소리없이 감독 지시대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김소식의 공을 받던 포수가 갑자기 "야, 소식아 너 지금 던진 공이 뭐냐"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직구 던진 거야."

그리고 김소식은 200개의 규정투구 수(?)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던졌습니다. 그런데 잠시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김소식도 그때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던진 공이 직구와는 다른 궤적을 그린 것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그 공을 던진 순간의 손가락 위치, 공을 뿌린 팔의 움직임 등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다시 한번 던졌습니다. 슬라이더였습니다. 스스로 깨우친 변화구였습니다. 저보다 덩치가 훨씬 큰 김 부회장도 선동렬과 마찬가지로 저와 악수하면 손을 맞잡습니다. 손가락이 짧은 것입니다.

독학파 선동렬의 최대 무기는 불같은 강속구였습니다. 공을 이리 빼고 저리 뺄 이유가 없었습니다. 광주일고-고려대 시절 한복판만 아니면 타자들은 헛스윙하기 일쑤였고 때려도 내야땅볼이 고작이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선동렬에게 컨트롤이란 단어 자체가 무색했습니다.

많은 야구팬은 박찬호의 경기를 보면 왠지 불안하다고 합니다. 불안감의 가장 큰 이유는 컨트롤일 것입니다. 텍사스 레인저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겨 다닐 때만의 일은 아닙니다. LA 다저스 시절인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에 걸쳐 최고의 피칭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 던지다가 갑자기 컨트롤이 흔들리는 장면을 많이 봤습니다. 투수는 완투를 전제로 9이닝을 던지면서 페이스가 매 이닝 일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닝에서조차도 초반과 후반이 다릅니다. 똑같은 투수가 왜 그리 기복이 심할까요. 만약 시즌 전반에 걸쳐 또는 경기 내내 일정하게 페이스를 유지하는 투수가 있다면 그는 두 말 할 나위없는 초특급투수입니다.

좀처럼 평상심을 잃지 않는 선동렬도 선수 시절 얼굴이 벌게지는 일이 이따금 있었습니다. 야수의 엉뚱한 실책, 빗맞은 안타에 의한 실점 등 투수의 평상심을 흔드는 '지뢰'는 수없이 많습니다. '지뢰'를 밟아도 흔들리지 않아야 대투수가 됩니다.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투구 균형이 무너지고 그때부터는 공이 춤을 춥니다. 팔뚝 둘레가 보통 사람의 허벅지만큼이나 되는 우악스런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주문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자신감의 결여는 컨트롤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박찬호의 컨트롤 불안과 관련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박찬호는 1990년대 중반 미국 진출 초기에 최동원과 비슷하게 왼발을 높이 차올리는 투구 동작을 취했습니다. 이른바 하이 키킹입니다. 물론 최동원을 '카피'한 게 아니고 놀런 라이언을 '카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카피'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를 버리고 자신의 투구 자세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이후에 또 몇 차례에 걸쳐 투구 자세를 손봤습니다. 1994년 메이저리그에서 2게임만 뛰고 마이너리그 더블A 샌 앤토니오 미션스로 내려 갈 때 투구 동작을 기억하시는 팬들이 많을 겁니다.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까운 시간이었습니다.

투수삼국지는 이제 투구 외 요소인 마운드에서의 위압감, 견제능력, 수비능력 그리고 현대야구에서는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는 연투능력 등을 살펴봅니다.
"와~"
제2구 시속 151㎞ 직구 스트라이크.
"우와~"
제3구 시속 138㎞ 슬라이더에 다이호 헛스윙 삼진.
"오∼"

시골구장의 일본 팬들은 경악했습니다. 이날 선동렬이 던진 직구는 6개. 초구만 빼고 모두 시속 150㎞가 넘었습니다(최고구속 152㎞). 속도뿐만 아니라 선동렬의 공은 쇠구슬처럼 묵직했습니다. 이때 선동렬의 나이 만 32세였습니다. 그의 엄청난 파워와 타고난 체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직구 시속이 150㎞를 넘어가면 이후 시속 몇 ㎞의 차이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타자 쪽에서 보면 그저 "와, 빠르다"하고 느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시속 150㎞를 넘는 이들 세 투수의 1라운드(구속)는 무승부.

그렇다면 변화구는 어떨까요?

마운드에서의 위압감을 이야기하기 전에 투수가 얼마나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포지션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투수들이 공을 던지는 곳을 마운드라고 합니다. 언덕(마운드)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습니다. 그라운드(운동장)의 다른 지역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야구규칙에서는 마운드 높이를 약 25.4㎝~33㎝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른 손바닥으로 한 뼘 정도 높이입니다.

수치상으로는 "그 정도야∼"싶은데 실제로 마운드에 서보면 그 높이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네~'입니다. 또 요즘은 직장야구나 동네야구를 하는 분이 많아서 아시겠지만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약 18.44m)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있는 힘껏 던져도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선수들이 던지는 것처럼 직선(?)으로 날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투수라고 가정해 보실까요.

자, 그라운드에서 툭 불거진 마운드에 서 있습니다. 잠실 또는 사직이나 문학구장의 만원 관중을 기준으로 할 때 6만여 개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관중들은 다른 야수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2-1로 앞선 9회말 마지막 수비. 2사 주자 만루. 상대는 4번 타자. 볼카운트 2-3. 아마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마운드에 서 있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투수출신인 김소식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은 "투수는 일부러라도 강한 자신감-어찌보면 오만하다 싶을 정도의-을 내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야수들에게 믿음을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투수가 기가 꺾이면 그 경기는 보나마나 입니다.

최동원과 선동렬에게는 야수들이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그 어떤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타자쪽에서 보면 마운드에서의 위압감은 투구 자세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최동원의 투구 동작을 떠올려 보실까요. 그는 선동렬보다는 작은 체격이었지만 왼발을 높이 차올리고 길게 내딛는가 하면 글러브를 낀 왼손을 안정시킨 가운데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는 투구 동작을 구사했습니다. 수탉이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털을 곧추 세워 자신의 몸을 크게 보이려 하는 것을 연상해 보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선동렬의 투구 동작을 되살려 보겠습니다. 그는 타고난 유연성을 활용해 윗몸을 최대한 포수 쪽으로 끌고 나와 공을 뿌렸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 출신인 야구 해설가 김광철씨는 이와 같은 투구자세에 따라 공을 놓는 위치가 많게는 30㎝정도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포수쪽에서 본 선동렬의 그와 같은 투구 동작에서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떠올렸습니다.

이상적인 투구 자세를 지닌 오버핸드 투수는 공을 놓는 순간 오른쪽 무릎에 그라운드의 흙이 닿을 정도가 돼야 하고 가슴의 앞부분이 왼쪽 무릎에 닿을 정도가 돼야 합니다. 그 정도로 윗몸을 끌고 나와야 타자를 압도하는 공을 뿌릴 수 있습니다. 최동원과 선동렬의 위압적인 투구 동작과 견줘 보면 박찬호의 투구 동작은 왠지 얌전해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퀵 모션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습니다.

견제 능력은 세 투수 모두 정상급 투수다운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주자가 도루를 하게 되면 포수의 능력(어깨)을 거론하지만 투수 탓을 더 해야 옳은 일일 것입니다. 견제능력이 떨어지면 주자에게 긴 리드를 주게 되고 이는 도루성공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90피트(약 27m)의 누간거리에서 뜀박질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리드를 많이 하느냐가 도루 성공의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왼손잡이라는 이점이 있긴 했지만 1970년∼80년대 아마추어와 프로에 걸쳐 이름을 날린 이선희는 주자견제에 일가견을 가진 투수였습니다. 그 앞에 선 주자, 특히 1루 주자는 베이스에 거의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제5의 내야수로서의 수비능력도 세 투수 모두 뛰어납니다. 특히 선동렬은 투구 후 자세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수비자세로의 전환이 그 어느 투수보다 빨랐습니다.

이제 마지막 항목인 연투능력입니다. 현대야구에서는 필요 없는 요소이긴 합니다. 따라서 참고삼아 연투에 관련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최동원, 선동렬, 박찬호의 투수삼국지를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1978년 6월 4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는 대통령기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 연세대-동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연세대 최동원과 동아대 임호균의 피나는 투수전 속에 연장 14회 0-0 일몰 일시정지경기가 됐고 이튿날인 5일 벌어진 계속경기 연장 18회 초가 돼서야 김봉연의 결승 솔로 홈런이 터져 연세대가 1-0으로 이겼습니다.

몇 시간의 휴식이 있었고 이어서 연세대-성균관대의 결승전이 펼쳐졌습니다. 물론 연세대의 선발투수는 또 최동원이었습니다. 연세대는 접전끝에 3-2로 이겨 우승 헹가래를 쳤습니다.

고인이 된 김동엽 당시 성균관대 감독은 마운드까지 걸어 나와 이틀 연속 던진 상대팀 에이스 최동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습니다. 김 감독다운 멋진 제스처였습니다. 이틀에 걸쳐 27이닝에 투구 수 375개 12안타 33탈삼진 2실점의, 요즘의 투수 운용 방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투구내용이었습니다.

이 대회는 1회전에서 강호 한양대가 김성한이 호투한 동국대에 덜미를 잡히고, 고려대가 임호균이 호투한 동아대에 져 탈락하는 등 화제가 만발한 대회로 야구사에 남아 있습니다. '오리궁둥이' 김성한이 프로야구 원년 3할대 타율에 10승대 투수였다는 사실은 어지간한 야구팬은 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