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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이명박 대통령이 출범했을 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선 공약에서 밝힌 것처럼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과감하게 펼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포용, 신뢰와 같은 인문적 가치를 등한시한 채 물질적 색채가 짙은 ‘실용’을 과신한 나머지 집권 100일도 안 돼 국민의 지지를 잃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은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인간의 가치에 바탕을 둔 문화와 함께 발전할 때 가능하다. 사랑과 이해, 용서와 관용은 물론 우정과 신의 같은 인간의 덕목을 두터운 교양의 힘으로 축적된 결과인 것이다.
이윤추구를 절대적인 가치로 아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에겐 어떤 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 ‘과정의 미학’은 비생산적인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치 지도자가 조화의 예술을 요구하는 정치 세계에서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중시한다면 국민과의 소통이 어려워져 리더십의 요체인 신뢰를 잃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CEO 출신의 이 대통령이 지금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엄청난 정치적 상처를 입게 된 것도 인문적인 철학과 상상력의 결핍에서 연유한 성급한 실용주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통령이 리더십 문제로 국민으로부터 이렇게 신뢰를 잃게 된 것은 그간 누적돼온 불만에서 비롯된 것 같다. 새 정부의 출범에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은 대통령직인수위의 아마추어리즘과 ‘강부자’ 내각 구성 등을 지켜보면서 대통령의 리더십에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4·9총선 공천 과정에서 경선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급기야 미국산 소고기 협상을 졸속으로 타결한 사실까지 드러나자 민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 결과 대통령이 얻은 게 무엇이었던가? 총선에서 자신의 팔다리와 다름없는 측근들이 줄줄이 잘려나갔다. 출범 100일 만에 치러진 새 정부 첫 보선마저 참패로 막을 내렸다. 수도권 패배는 물론 텃밭인 영남에서조차 한나라당 간판을 내려야 배지를 달 수 있는 지경이 됐다. 대통령의 지지도는 20% 안팎으로 추락했고 보수세력까지 등을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대통령이 총선 직후 잘못을 빨리 깨닫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믿기 힘든 대통령이란 인상만은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당내 불협화음도 눈 녹듯 사라지고 그의 지지기반 이탈도 이토록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대선 때 박 전 대표를 ‘정치 동반자’라고 치켜세우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일찍이 순자(荀子)는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어버리기도 한다”고 일갈했다. 물은 바로 민심이고, 그 민심은 신뢰에서 나온다. 땅바닥까지 곤두박질친 대통령의 신뢰는 정권의 수난이자, 국가적 재난이다. 그런 신뢰 위에선 어떤 정책도 제대로 추진할 수 없으며,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하루속히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말을 아껴야 한다. 말이 앞서면 기대감이 없고 결과가 없을 경우 신뢰를 잃게 된다. “가장 알려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굳게 믿어지는 것”이라는 미셸 몽테뉴의 말처럼. 대통령은 CEO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바란다.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조화의 정치를 하라는 얘기다. 호머는 ‘일리아스’에서 “서로의 신뢰와 상호부조로서 위대한 행위가 행해지고,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지금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말일 듯싶다.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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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08.06.05 (목) 21:04, 최종수정 2008.06.05 (목)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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