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 - Goldberg Variations, BWV 988 골드베르그 변주곡 /Piano : Glenn Gould 1981년

Gould가 연주한 Bach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81년 녹음과 55년 녹음이 있는데 81년도의 녹음은 사색적으로 느껴질만큼 느리고 Gould가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뀜을 알 수 있습니다. (55년도에는 LP였으므로 그가 81년 녹음과 같이 느리게 연주했더라면 나누어 담았어야 했을 겁니다.)55년 녹음에서 Gould는 각 변주를 독립적으로 취급하여 해석하였지만 81년 녹음에서는 전체를 통일적, 유기적인 관계로 보고 해석

밤의 숨결을 깨우는 피아노의 정수

1742년 바흐는 "클라비어 연습곡집(Clavierubung book) 제4부"로서 "2단 건반 달린 클라비코드"를 위한 여러가지 변주를 지닌 아리아"로 출판 했습니다. 뒤에 이 곡집은 "골드베르크변주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현재에도 바흐의 클라비어곡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듯 부제만 보더라도 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피아노에 맞게 교정된 악보로 연주를 합니다.

이것은 그의 제자이며 드레스덴 주재 러시아 대사 카이절링크 백작의 쳄발리스트인 골드베르크(Johann Gottflied Goldberg)를 위하여 작곡하였습니다. 바흐의 좋은 후원자였던 백작은 불면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동안 자신을 위로해 줄 음악을 작곡하여 달라고 바흐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던 겁니다. 실상 백작을 위하여 밤에 연주를 하여야 했던 사람은 바로 골드베르크였죠.

이 곡에 선택된 테마는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소곡집"에 들어 있는 사라방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0번 변주곡에는 두 개의 대중적인 멜로디인 "나는 배추와 담배에 질렸어요"와 "오래전부터 나는 너와 함께 있지 못하였네"를 삽입하였습니다. 백작은 이 곡을 무척 사랑하였으며 바흐에게는 프랑스 금화 100냥으로 금술잔을 만들어 사례하였습니다. 덕분에 "골드베르크변주곡"은 다른 모든 작품보다 바흐에게 가장 많은 결실을 안겨다 준 곡이 된 셈이 되었습니다. 이 곡은 주제를 처음과 끝에 두고 그 사이에 30개의 변주를 질서정연하게 배열하여 전체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는 논리적인 구성이 잡혀 있습니다. 각 변주가 모두 상상력이 넘치는 것으로서 변주곡 사상 불멸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개설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바흐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흔히 바흐는 딱딱하고 어려우며 뭔가 고루한 느낌의 음악인 것 같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아름다움, 특히 주제곡인 아리아의 단순하면서도 명상적인 선율속에 숨어있는 무한한 아름다움을 한번 맛보게 되면 이와 같은 편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인간이 만들어낸 변주곡 중에서 이와같은 위대한 작품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매우 회의적이다. 그 누구도 단순한 아리아 한곡을 바탕으로 이렇게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며 변화무쌍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바흐의 다른 곡을 모두 없애버리고 이 한 곡만 남겨둔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은 음악사에서 여전히 불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그 다양한 변화의 조화로움에 감탄하였던가.

음악학자 가이링거(K.Geiringer)는 바흐가 이 변주곡에서 클라비어 음악의 여러 가지 분야를 총결산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은 작곡자의 끝없는 상상력과 최고의 기술적 수완이 발휘된 작품으로서, 18세기의 클라비어 변주곡 중 이와 견줄만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2. 구성

이 변주곡은 장중하면서도 아름답고 명상적인 사라방드 스타일의 G장조 주제와 그에 이어지는 30곡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아' 라고 이름 붙여진 G장조 4분의 4박자의 주제곡은 1725년에 작곡된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에 실려있는 '사라방드'에서 취해진 것이다.(이 모음곡에는 영화 <접속>에 인용되어 유명한 '미뉴엣'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어지는 30개의 변주곡 중에서 세 곡은 G단조이고 나머지는 모두 G장조이다. 각각의 변주곡은 32마디의 저음부를 공유하면서 이것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멜로디 라인이 저음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구사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아리아의 선율보다는 베이스 라인에서 변주의 소재를 취함으로써 각 변주의 멜로디나 곡의 형식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흐는 이 곡에서 사라방드, 푸가, 토카타, 트리오 소나타, 코랄, 아리아 등의 여러 가지 형태의 곡들을 자유롭게 배열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여러 곡들이 무작위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세곡 단위로 묶여져 있으며 각 묶음의 첫곡은 항상 카논(돌림노래형식의 일종) 형식인데, 이 각각의 카논들은 한 음정씩 증가하는 규칙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3변주는 1도 카논, 6변주는 2도 카논, 9변주는 3도 카논..... 27변주는 9도 카논 하는 식으로). 그리고, 마지막 제 30변주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민요 두곡의 멜로디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 곡의 가사내용은 "나는 오랫동안 너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돌아오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다오" 라는 내용이다. 이 마지막 변주가 끝나면 다시 처음과 동일한 아리아가 반복되는데, 이는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간청에 못이겨 아리아가 다시 나타나는 것 같은 재미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흐는 이와 같은 음악의 구조 내에서의 수학적인 질서를 매우 중요시하였는데, 골드베르그 변주곡 뿐만 아니라 B단조 미사나 마태 수난곡 등의 대곡에서도 아주 정교한 수학적 규칙에 따라 음악이 구성되어 있어서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물론 이 곡은 갖가지 수수께끼와 많은 일화들을 간직하고 있으나 우리는 거기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순함 속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함과 다채로움, 그리고 무한한 생명력, 음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세계의 위대함, 이러한 것들이 이 곡에 숨어있는 진정 위대한 보물들이며 바흐 음악의 진면목이 이 한곡에 집대성 되어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웹진 'Go! classic'에서 인용함.

<골드베르크변주곡>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2단 건반의 챔발로를 위해 작곡한 클라비어곡.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여행하고 있을 때, 작센 궁의 러시아 대사로 있던 카이저링크 백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만성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백작은 불면의 시간동안 자신이 들으며 즐길 웬만큼 길이가 되는 다양한 성격의 곡을 작곡해 달라고 바흐에게 부탁했다.
바흐는 백작의 요청에 의해 이 곡을 작곡해 바쳤고, 백작의 전속 쳄발로 주자이자 바흐의 제자였던 골드베르크에게 연주해 주도록 했다. 이것이 바흐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쓰게 된 배경이라고 한다.
변주곡에 바흐가 붙인 원래 이름은 [여러가지 변주를 가진 아리아 Aria mit Verschiedenen Veraenderungen]으로 1742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제4부로 출판하였는데, 바흐가 30의 변주로 된 이 곡을 제자인 요한 테오필 골드베르크를 위해 작곡하였기 때문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변주곡은 연주에 약 50분을 요하는 장대한 것으로 성격 변주곡의 부류에 속하며, 구성적으로는 주제인 베이스의 기본적인 선(악보 1)을 각 변주에서 역시 베이스로 자유롭게 재현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단 제6과 제18변주만은 이 기본선을 상성부에 두고 있어 각 변주에서 주제에서의 화성적인 골격도 대체로 유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각 변주의 성격은 각각 다르다.

변주의 배치 설계는 그야말로 바흐답게 계산되어 있는데, 30의 변주 중에서 바탕조인 G장조는 3회만 g단조로 옮겨지며, 중앙의 제16변주는 서곡이라고 적힌 프랑스풍 서곡으로 되어 있어, 전곡을 두부분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제3. 제6, 제9의 식으로 3의 배수의 변주는 카논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같은 음의 카논에서 시작하여 1도씩 음정이 불어나서 마지막 제27변주는 9도의 카논으로 되어 있다.

이 곡은 2단식의 건반을 가진 클라비어로 연주하는 것으로, 바흐는 각 변주마다 1단 건반 또는 2단 건반이라고 지정하고 있다.

주 제 : G장조, 3/4박자아리아라고 적힌 장중한 사라반드풍의 곡으로 장식음도 많이 쓰고 있다.


변 주

1. 제1변주에서 제4변주까지는 1단 건반으로 연주. 제1변주는 조성과 박자가 주제와 같으며 2성으로 씌어져 있고 전주곡풍

2. G장조, 2/4박자. 3성으로 씌어졌으며, 위의 2성부가 주제 선율을 암시하며 베이스는 물론 기본선을 따름

3. G장조, 3/8박자. 동음의 카논으로 3성, 모방은 1마디 늦게 행해짐

4. G장조, 3/8박자. 동기의 모방을 둔 활기있는 곡으로 여기서도 기본선이 베이스에 있음

5. G장조, 3/4박자. 1단 또는 2단의 건반에 의한 경묘한 곡

6. G장조, 3/8박자. 다시 1단 건반으로 2도의 카논으로 모방은 1마디 늦고(악보 3), 기본선은 위의 2성에 감추어져 있음

7. G장조, 6/8박자. 1단 도는 2단의 건반으로 연주되는 시칠리아풍의 곡으로 따뜻한 분위기

8. G장조, 3/4박자. 2단 건반용의 것이므로 현재의 피아노로는 연주하기가 어렵다고 함. 2성의 토카타풍의 곡

9. G장조, 4/4박자. 3도의 카논으로서 1단 건반으로 연주되며 3성으로, 2성만이 카논이고 베이스는 자유 대위법
10. G장조, 2/2박자. 4성의 푸게타(악보 4)로 1단 건반의 것

11. G장조, 12/16박자. 2단 건반을 위한 토카타풍의 곡

12. G장조, 3/4박자. 1단 건반에 의한 4도의 카논인데, 모방은 전회형(轉回形)에 의함

13. G장조, 3/4박자. 2단 건반에 의한 것으로정교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곡으로 현악기적

14. G장조, 3/4박자. 2단 건반용으로 다시 쾌활해지며, 전주곡 혹은 토카타풍

15. g단조, 2/4박자. 1단 건반에 의한 5도의 전회 카논으로 안단테로 지정되어 있으며 표정이 부드러운 우아한 곡

16. G장조, 전반은 2/2박자, 후반은 3/8박자. [서곡]이라고 적혀 있음. 프랑스풍 서곡의 느리게ㅡ빠르게ㅡ느리게라는 정형에서 마지막 느리게를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음. 전반은 안단테 정도의 2성의 전주곡풍의 것이고, 후반은 알레그로 정도의 3성의 푸게타.

17. G장조, 3/4박자. 활발한 2성부의 토카타풍의 곡으로 2단 건반용

18. G장조, 2/2박자. 1단 건반용의 6도의 카논. 베이스는 자유 대위법으로 가담하고 있는데, 속도는 떨어지지만 명랑한 곡이고, 주제의 기본선은 위의 2성에 감추어져 있음

19. G장조, 3/8박자. 1단 건반을 위한 것으로 무곡풍이기도 하지만, 3성으로 자유 모방 대위법

20. G장조, 3/4박자. 2단 견반용의 화려한 기교적인 곡. 피아노로는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21. g단조, 4/4박자. 7도의 카논으로 반음계적인 서법도 씀
22. G장조, 2/2박자. 푸가풍의 곡으로 온건한 느낌
23. G장조, 3/4박자. 모방 대위법을 쓰고 있는데, 즉흥적인 요소가 있고 번쩍이는 화려함도 있으며, 음계적인 진행이 두드러져 보이는 2단 건반용

24. G장조, 9/8박자. 8도의 카논으로 1단 건반용

25. g단조, 3/4박자. 아다지오로 로맨틱. 2단 건반용

26. G장조, 전주곡풍 취향의 것으로 18/16과 3/4박자의 선율을 대립

27. G장조, 6/8박자. 2단 건반용의 9도의 경묘한 카논. 이 카논만이 2성부로 되어 있고, 자유 대위법의 성부가 없음

28. G장조, 3/4박자. 2단 건반용의 기교적인 곡으로 트릴이 일관하여 두어져 있어 화려한 효과

29. G장조, 3/4받자. 1단 또는 2단의 건반을 위한 호모포닉
30. G장조, 4/4박자. 1단 건반용으로 쿠오들리베트(Quodlibet)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중세기부터 행해진 창법으로, 민요풍의 선율을 몇개 짜 맞춘 것. 바흐는 여기서 베이스에 변주의 기본선을 명확하게 내고, 그 위에 2개의 민요를 실음. 모두 바흐 일족의 파티 같은 때 애창되었던 것으로 하나는 17세기 이탈리아 민속 음악의 베르가마스크에 유래하는 [캐비지에 순무]이며,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군]이라는 독일 민요

아 리 아 : G장조, 3/4박자. 마지막의 제30변주 다음에 이어지는 아리아로 주제가 재현하여 전체의 통일과 마무리

글출처 : http://blog.naver.com/mallang_y?Redirect=Log&logNo=40049524420

글렌 굴드 / 저자 피터 F. 오스왈드 Peter F. Ostwald


피터 F. 오스왈드는 심리학자이자 의사이며, 1982년 글렌 굴드가 죽을 때까지 20여 년을 친구로 지냈다. ‘연주자를 위한 건강 프로그램’을 고안하기도 한 그는 『슈만: 음악 천재의 내면의 소리』, 『바슬라프 니진스키: 광기로의 도약』 등의 예술가 평전을 펴낸 전문 작가이기도 하다. 『글렌 굴드』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던 천재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를 날카롭게 분석한 평전으로, 오스왈드는 1996년, 이 책을 탈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 Short Summary
고독과 광기를 예술로 승화한 음악가, 글렌 굴드 Glenn Gould의 삶과 음악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책.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저자는 굴드의 음악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에너지와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적당히 내세우면서도 비교적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굴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캐나다 출신의 글렌 굴드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고, 1955년에 발표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는 급작스러운 뇌졸중으로 50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굴드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며, 풍부한 이야기와 일화를 통해 그의 다양한 면모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저자는 굴드와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누었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굴드의 아버지, 친구, 사촌, 동료 음악가 등 다양한 인물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또한 불안했던 굴드의 정신적인 면과 병적인 증세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1. 글렌 굴드와 만나다

연주회
1957년 2월 28일, 스물아홉 살의 진지한 성격의 정신과 의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나는 캘리포니아의 한 무대에서 스물네 살의 세계적인 괴짜 피아니스트를 만났다. 무대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대 위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 그는 자신의 덩치에 비해 너무 큰 연미복을 입은 것이 편치 않은 듯 매우 어색해 보였고, 청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주저하듯 초점을 잃은 데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표정이었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의 세 다리 밑에는 나무 발판이 놓여 있어서 피아노가 조금 올라와 있는데다 그 유명한 굴드의 흔들거리는 접이의자는 보통의 피아노 의자보다 낮아서, 굴드가 앉았을 때 피아노 건반과 그의 몸이 이루는 각도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보통 피아노 연주자의 팔은 건반보다 약간 높게 위치하는데 굴드의 팔은 건반과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자세로 앉은 굴드 자신은 편안해 보였다.

미소를 띠고 피아노 건반에 거의 맞닿을 듯 얼굴을 댄 그가 바흐의 바단조 협주곡을 시작하였고, 곧 몸을 박자에 따라 움직이면서 모든 음을 입으로 따라하고 있었다. 때로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입체적인 삼차원 조각처럼 모든 소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의 연주는 한마디로 놀라웠다. 넋을 잃은 듯한 표정, 감겨 있는 눈, 그의 손은 마치 피아노와 사랑을 나누듯 건반을 애무하고 있었다. 굴드가 연주하는 모습과 함께 연주가 내뿜는 신비한 기운은 어느새 청중에게 전달되어 이제 청중도 넋을 잃고 그의 연주에 빨려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연주였다! 음악을 극히 지적으로 이해하면서 그토록 멋지고 당당하게 몸으로 녹여 보여주는 마술과도 같은 솜씨를 지닌 피아니스트를 나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준 굴드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무대 뒤로 찾아갔다. 독주자 대기실의 잠겨 있는 문을 두드리자, 글렌 굴드가 정중한 태도로 나를 맞아들였다. 그는 혼자였고, 방문자가 찾아와서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마틴 캐닌의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로 내 자신을 소개한 다음 연주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노라고, 바흐의 작품이 그렇게 훌륭하게 연주된 걸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점점 긴장을 풀더니 강한 목소리로 즐겁게 자신이 협연했던 관현악단, 좋아하는 지휘자들, 선호하는 작곡가들에 대해 화려하게 독백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용히 그의 도발적인 유머 솜씨를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굴드의 활기찬 독백이 자신의 건강 문제로 돌아가더니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감기로 몸져눕지 않을까 큰 걱정을 했다. 숨이 막힐 만큼 덥고 습기 차서 마치 사우나탕 같은 방안의 높은 온도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는 자신의 증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항생제를 복용하고 있었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도 사용했고, 특히 등과 팔, 어깨가 쑤시는 데에 좋다는 지압치료와 초음파치료도 받는다고 하였다. 그의 주 목표는 팔 위쪽으로 가는 힘을 손과 손가락으로 옮기는 것이었고, 초음파 치료와 낮은 접이식 의자를 사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했다. 나에게는 큰 근육조직을 없애기 위해 초음파 진동을 이용하는 것이 비록 위험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리 믿을 만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방금 굉장히 까다로운 작품을 힘들게 연주했어요. 당연히 과로하고 탈진한 상태일 거예요. 이 숨 막히는 방에서 나가 신선한 공기를 좀 쐬도록 합시다.” 이 말에 굴드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더니 몸을 돌려 짐을 싸기 시작했고, 곧 무거운 외투, 모자, 양모 목도리, 양모 장갑을 착용한 다음 접이식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교우 관계는 향후 20년 동안 여러 차례 굴곡을 거치면서 지속되었고, 1982년 글렌이 쉰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야 끝을 맺었다.

천재의 어린 시절
글렌의 어머니 플로렌스 그레이그는 음악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러셀 허버트라는 이름 대신 버트 골드(글렌 굴드의 원래 성은 ‘Gould’가 아닌 Gold였음)라고 불리던 글렌의 아버지가 플로라를 만난 것도 두 사람의 음악 활동을 통해서였는데, 버트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인데다 타고난 가수로 가끔씩 합창 파트를 맡아 노래를 불렀고, 사고로 바이올린을 더 이상 켤 수 없기 전까지는 바이올린 연주도 즐겨했다. 1925년 두 사람은 플로라가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는 날 혼인했고, 버트는 아버지의 모피상을 이어 받아 집을 장만하고 플로라는 토론토의 큰 교회에 나가 일하기도 하고, 안락한 집에서 음악 레슨도 하면서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탰다.

몇 차례 유산 끝에 마흔 살에야 겨우 임신하여 달을 채우는데 성공한 플로라는 아이가 훌륭한 음악가, 그 중에서도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품고 태아에게 하루 종일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와 노래를 들려주었다. 1932년 9월 25일 온 집안의 걱정과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글렌이 태어난다. 아기 글렌의 특이한 점은 아이라면 당연히 울어야 할 상황인데도 늘 입을 다물고 노래하듯 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글렌의 부모는 아들이 음악 소리와 리듬에 특별히 반응하며 눈에 띄게 음악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에서 음악적 재능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글렌의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는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은, 아들이 위대한 음악가가 될 운명이라는 어머니의 기대를 확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런데 아이가 울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비정상이며 사십 대였던 산모의 첫 아이라는 것, 언어 발달에서 보여준 특이한 점과 함께 태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 마치 음계를 연습하듯 손을 휘두르는 동작은 발달장애로 의심해볼 수 있다. 글렌은 자폐증을 앓지는 않았지만, 소년 시절과 사춘기 때 어떤 물체에 대한 공포,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점,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데서 물러나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정형화된 행동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점 등은 아스퍼거 증상과 비슷했다. 이 질환은 지능과 언어가 정상적으로 발달하면서도 사회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뒤떨어져 자폐증적인 행동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이 증상을 앓는 사람들은 감각이 예민해져 곧잘 기묘한 행동을 하며, 일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어린 아기 글렌의 남다른 손놀림을 본 주치의는 꼬마가 의사나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우연찮게도 글렌은 이 예언의 두 가지를 다 실현시킨 셈이 되었다. 건반 위에서 이룬 그의 업적은 굉장한 것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임상적 증상이나 질환, 치료법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그것을 통해 의학전문가 뺨칠 정도가 되었다. 그는 평생 수많은 의사들과 상담을 했고, 온갖 종류의 처방을 시험해보곤 했는데, 그럼으로써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데는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신동으로 불리다
글렌이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자마자, 글렌의 어머니는 아들을 피아노로 데려가 건반 가까이 앉히고는 아들이 빨리 음악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며 피아노를 쳐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글렌이 세 살이 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글렌의 부모는 글렌이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능력을 어린 글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음계 가운데 있는 어떤 음이라도 그 위치를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 능력이 아주 특별한 것은 이런 능력을 가진 이가 그만큼 드물기 때문인데, 우선 유전적 소인이 있어야 하며,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과 접하여 유전적 능력이 계발되어야 한다. 때문에 글렌이 절대음감을 지녔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닌 것 같다.

플로라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모든 음을 노래로 함께 부르도록 했다. 이것은 자신이 연주하는 작품을 명확히 파악하고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글렌은 이 습관을 평생 고수했다. 글렌은 글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악보를 읽은 데다, 음악적 기억력도 대단해서 방금 들었거나 연주했던 작품을 다 머리에 담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악보로 흘깃 본 것까지도 금세 외웠다. 모차르트와 자주 비교되던 어린 글렌은 그때까지는 명랑한 천재였다.

그러나 글렌은 꼬마였을 때부터 손가락을 다칠까 봐 무척 두려워했다. 또한 선물로 받은 불자동차 장난감의 빨간색에 기겁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등 밝은 색깔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바깥에 놀러 나가거나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 모든 일상적인 일로부터 피해 피아노라는 안전한 피난처 앞에만 있으려 했다. 그의 부모는 곧 아들에게 규칙을 가르치거나 벌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피아노 뚜껑을 닫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글렌은 다섯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었다. 온타리오 욱스브리지 연합교회에서 열린 ‘사업가들의 성경반’ 30주년 기념 일요일 오후 예배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것인데, 글렌은 이때 ‘이중창곡’을 연주해 청중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 뒤로도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기회를 더 가지게 되면서 글렌의 음악교육을 혼자서 맡아 오던 어머니는 다른 외부 전문가에게 글렌의 능력을 보이고 평가받아야 할 때가 됐음을 알게 되었다.

토론토 음악원의 테스트에서 글렌이 받은 점수는 역대 최고점이었다. 이를 계기로 글렌은 더더욱 피아노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그렇게 성장하는 동안 글렌에게 모피상을 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점점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어 버린다.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자기와 함께 다른 ‘정상적인’ 활동들을 즐겁게 하면서 가업까지 이어받을 수 있도록 키우고 싶어 했지만, 글렌은 이 모든 것을 혐오스러워했다. 아버지의 모피상에서 팔고 있는 가죽은 글렌에게 동물 학살을 떠올리게 했을 뿐이고, 나중에 글렌은 채식주의자가 되고 동물의 권리를 지키는 기수가 됨으로써 동물 학살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고야 만다. 그리고 자신의 유언장에도 재산의 많은 부분을 토론토 동물애호가협회에 기부하도록 명시해놓았다.

2. 굴드 사운드의 탄생과 비밀

새 스승과 도약
글렌이 음악적으로 뛰어난 분야는 단연 기막힌 피아노 연주 실력과 절대음감, 미리 연습하지 않은 음악도 악보를 보고 즉시 연주하고 외우는 신비한 능력, 그리고 열성적으로 부르는 노래였다. 이러한 글렌의 능력은 음악원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레오 스미스 교수는 그에게 음악 이론을 가르쳐주었는데 머지않아 소년의 머리는 전조(轉調)와 화음 진행, 그리고 성부(聲部) 라인의 반복 진행 등에 관한 개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글렌은 화성학 기본도 빨리 습득했고, 음악적 주제가 서로 얽히고 겹치는 대위법에는 특별한 소질을 보였다. 그가 열 살때 입학한 토론토 음악원의 원장은 토론토의 뛰어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기도 한 저명한 어니스트 맥밀런 경이었다. 그는 재능 있는 소년이 음악원에 등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음악 발전에 큰 관심을 갖고 그를 가르쳤다. 한편 낮은 의자에 앉아 건반과 수평이 되도록 손가락을 유지하는 법, 어깨에서 팔을 통해 전달된 에너지를 사용하여 손가락의 민첩함을 강조하는 법 등 글렌 특유의 피아노 테크닉은 모두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피아노 스승인 게레로에게서 익힌 것이다.

1944년 처음으로 콩쿠르에 참가한 글렌은 그보다 나이 많은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보여 장학금을 받았으며, 1945년에는 공개 무대에 일곱 차례나 등장하며 이름을 날렸다. 12월에는 글렌과 그 가족이 진정한 의미에서 공식 데뷔 무대로 중요하게 꼽는 이튼 오디토리움에서의 오르간 연주로 언론의 확실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계속 그랬지만 어린 글렌은 연주를 하는 순간 외에는 무대에서 안정되지 않은 듯 보였으며, 대중 앞에서의 연주를 불편하게 여겼다.

또 그 해에 그는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느낀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글렌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 동안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피아노 가까이에서 켠 진공청소기의 소리에 그의 연주가 갑자기 파묻히게 되었는데, 그때의 느낌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마치 욕조 안에서 두 귀를 물에 담근 채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어대며 노래 부를 때 드는 느낌’으로, 진공청소기 소리는 확실히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끼어들어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방해하였지만, 대신 그가 그 소리를 연주해내는 동작을 더욱 예민하게 감지하도록 해주었다. 흔히 내성적인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글렌 역시 바깥에서 들려오는 연주보다 내면의 소리를 더욱 좋아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두 가지 영향을 주는데, 급히 외워야 할 악보가 있을 때는 텔레비전과 같이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피아노 가까이 두는 버릇이 생겼고, 또 실제 음악 소리에 만족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게 되어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마이크와 사랑에 빠져"


글렌은 테이프 녹음기를 사용해 자신의 연주를 점검하였다. 테이프에 녹음하여 들으면 자신이 실제로 연주할 때보다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어서 실수를 교정할 수 있고, 곡의 속도를 바꾸거나 표현 방식, 크기와 세기 등을 조정할 수 있다. “모든 스승 중에 가장 위대한 스승은 테이프 녹음기”라고 하면서 어린 나이에 테이프 녹음기 사용법을 스스로 익힌 그는 평생 녹음기에 의지하게 된다. 녹음기와 함께 글렌의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라디오 작업인데, 라디오는 나중에 그의 음악 활동에서 최우선 관심사가 된다. 1950년 처음으로 CBC(캐나다 방송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였고 그 후 라디오 방송 연주를 계속 경험하면서 글렌은 음악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우선 연주회장에서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바로 앞에 있는 목격자들인 청중”이 요술처럼 사라져 무대공포증의 직접적인 원인 하나가 약화되었으며, “방송을 했던 행복한 순간을 희미하게나마 재생해주는 부드러운 아세테이트 음반”을 물증으로 확실히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그는 라디오 방송 연주를 기억할 만하다고 했다.

실제로 글렌은 청중을 몹시 싫어하는 흔치 않은 예술가였다. 잘못을 찾아내는 비판적인 그의 어머니상이 연주를 들으러 오는 모든 청중에게 과장된 방식으로 투사된 것 같다. 그는 연주회장의 청중이 던지는 무언가 캐는 듯한 눈초리를 항상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했다. 글렌은 이미 이십대 초반에 무대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연주회를 계속해 나갔다. 또한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끈질기게 이어져 어떻게든 현대음악에 가까워지려고 애쓰면서 캐나다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의 새롭고 대담한 작품을 청중에게 소개하여 친숙해지도록 노력을 다했다. 글렌을 이끌어주려는 매니저의 노력과 여러 공연, 라디오 방송 출연 덕분에 글렌은 캐나다에서 두드러지는 인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스스로 택한 고독 속에 빚어낸 굴드 사운드
열아홉 살이 된 글렌은 맬번 칼리지에이트 인스티튜트를 그만두었다. 학교 공부와 음악 활동을 동시에 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글렌은 처음으로 스스로한테 부과한 유예 기간을 갖고 부모와 교사들에게서 떨어져 지내며 전반적인 사회 활동에서 벗어나 심코 호숫가에 있는 부모의 오두막에서 혼자 지냈다. 오랜 친구였던 밥 풀포드는 “억압적인 환경에 반항하는 창조적인 개인”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글렌보다 먼저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는데 이 두 중퇴생은 함께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음악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회사는 그때까지 토론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음악만을 소개하는 연주회를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쇤베르크를 주제로 한 두 번째 무대까지 그런 대로 성공리에 마친 그들은 세 번째 공연으로 바흐를 선택한다. 새로운 음악을 소개한다고 했던 그에게 왜 바흐냐고 묻자 “바흐는 언제나 새로우니까”라고 대답했는데, 사실 그는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매우 열심히 연습해왔다. 그러나 이 연주회는 허리케인이 닥치는 바람에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다.

글렌은 이후 오두막에 처박혀 바흐와 다른 레퍼토리를 열심히 연구하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새롭게 해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굴드는 이 은둔의 세월 동안 이십대 초반을 보내면서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와도 다른 그 자신만의 독특한 피아노 스타일을 완성했다.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뚜렷한 대비, 보통 이상으로 빠르고 느린 템포, 생동감 넘치는 뛰어난 리듬감, 지극히 투명한 터치, 대위법적 특징을 누구보다도 잘 살려내는 능력, 그리고 음악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끌어내는 힘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연주를 독특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행동 습관이 생겨났는데, 그는 손가락이 건반 위를 민첩하게 내달릴 때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늘 허밍을 하거나 노래를 하며 입으로도 음악을 따라갔고 한 손이 피아노 건반에서 떨어지면 지휘자처럼 손으로 다양한 표현을 나타내는 동작을 취하곤 했다.

사회적으로 굴드를 ‘괴짜’로 보이게 만든 특성 역시 이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옷을 많이 껴입고, 유머와 농담을 과하게 드러내며, 병의 징후라고 느껴지는 몸 상태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굴드의 신경증적 태도 역시 그의 예술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언제나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며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려 했던 글렌은 스스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창조적인 예술가라고 느꼈고 이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행동 양식이 바로 신경증적 태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천재성뿐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다치기 쉬운 사람인지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미국 정복에 성공하다
글렌은 미국 데뷔 무대를 앞두고 미국에서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몹시 걱정했고, 미국에서 성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프로그램을 짜는데도 고심과 조정을 거듭했다. 그의 워싱턴 데뷔 무대는 청중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비평가 폴 흄은 <워싱턴 포스트>지에 굉장한 호평을 실었고, 이 평론은 음악가들 사이에 불처럼 퍼져 나가 피아니스트들을 비롯한 많은 실력가들이 새로 나타난 경쟁자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두 번째 연주회가 열리던 뉴욕 타운홀로 몰려갔다. 독특하고 새로운 그의 연주는 경쟁자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언론의 호평과 무엇보다도 마침내 뉴욕에서 연주를 해냈다는 사실에 그의 가족과 매니저, 또 토론토의 고향 사람들은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그러나 정작 글렌 굴드가 국제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 계기는 타운 홀 연주회가 아니라 그로부터 24시간 후의 우연한 행운의 사건이었다. 컬러비아 음반사의 녹음부 책임자였던 오펜하임이 그의 연주를 보러왔다가 청중석에 다른 음반사에서 나온 대표들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당장 그의 음반을 제작하기로 나선다. 그는 단 한 번의 연주를 통해 글렌의 실력을 알아봤고, 언제, 무엇을 녹음할 것인지도 글렌에게 맡겼다. 글렌은 훌륭하지만 무미건조한 18세기 유물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하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그 곡은 연주자에게나 청중에게나 별 매력이 없는 작품으로 여겨져 잘 연주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대담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위법으로 작곡된 변주곡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치밀하게 짜여 있어 이 작품이야말로 글렌이 천재성을 시험해볼 수 있는 곡이었다.

글렌은 통찰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면의 자아를 반영하는 음악으로 빚어내면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느낌과 마음 자세를 표현해냈다. 글렌이 살아생전에 연주하고 녹음했던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그의 피아노 솜씨를 보여주는 최고의 본보기가 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음반은 1956년에 출시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이 지금까지 잘 팔리고 있다.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둠으로써 젊은 피아니스트와 그의 부모, 매니저는 모두 기쁨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글렌은 ‘이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어려운 시절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전 세계로부터 연주회 요청이 쏟아지는 상황을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3. 연주 생활이 그를 병들게 하다

서로 충돌하는 요구들
미국 데뷔 이후 글렌의 무대 공연 횟수는 급속도로 늘어나 1955년에는 열네 번, 56년에는 스물세 번에서 최고치를 이룬 1959년에는 쉰한 번이나 연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연주회 횟수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1964년에는 더 이상 공개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본래 공개 연주에 반감을 갖고 있는데다 지휘와 녹음도 하면서 고독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글렌은 자주 연주 여행을 다녀야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또한 작곡도 하고 글도 쓰고 싶었으니, 이런 다양한 야망에서 나온 욕구들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근본적으로 글렌은 “연주회 참석자들에게는 거의 가학적인 욕망이 있다”라고 말하며 청중을 믿지 않았고, 공개 무대 연주에 편견을 가지고 있던 만큼 녹음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것을 당연히 더 편하게 느꼈다. 공개석상에서 연주하던 갈등의 세월 동안에도 글렌은 토론토에서 캐나다 방송국을 위해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으며, 뉴욕에서는 컬럼비아 녹음부에서 녹음 작업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글렌은 이후 자신의 창조적인 활동 무대가 될 매체에 관한 전문지식을 얻었고, CBC 프로듀서 프란츠 크래머를 비롯한 이 분야의 전문가들과 우정을 다져 나갔다.

이상한 병
1958년 8월, 글렌은 처음으로 잘츠부르크 무대에 서게 되는데 암스테르담 콘세르트게보우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잘츠부르크에서 그가 익숙히 해오던 바흐의 라단조 협주곡을 연주한 뒤 글렌은 심하게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 축제 극장의 냉방 장치 때문에 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감기가 기관에까지 침범하여 기관지염으로 발전하자 염증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하고 목소리도 잘 안 나오는 사태에 이르렀다.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글렌은 유럽 의사들의 명단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에 글렌이 차도를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잘츠부르크에서 하기로 되어 있던 독주회는 병을 이유로 취소되고 말았다. 음악 세계에서 연주회 취소는 웬만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성악가나 플루트 연주자가 아닌 피아니스트가 기관지염을 이유로 공연을 취소하는 것은 사람들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굴드의 상황은 몇 가지 이유에서 예외적인 경우였다. 우선 그의 노래는 피아노 연주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호흡기 감염이나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은 연주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참작될 수 있고 또 그의 몸은 너무나 섬세하게 감응함으로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불편하면 금방 몸 전체가 아픈 느낌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연주회를 싫어했던 그에게 공연 취소는 스트레스에서 즉각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 신장 질환 진단까지 받았다고 말하는 글렌의 건강상의 문제는 여러 요인이 있었는데, 실제로 잘 먹지도 않았고, 잠도 충분히 자지 못했으며, 운동 부족에 약을 과다 복용하는 등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원인도 있었다고 본다.

4. 연주보다 녹음에 열정을 쏟다

작곡과 연주 사이에서
글렌은 이십 대가 끝나갈 무렵, 또다시 작곡을 하고 싶다는 갑작스런 충동에 휩싸이는데, 이번에는 오페라를 쓰고 싶어 했다. 스물세 살인 1955년, ‘작품 1’인 현악 사중주를 완성한 이후 글렌은 작곡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 오스카 모라베츠는 그가 그토록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은 ‘불멸’에 대한 소망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1962년 한 인터뷰에서 글렌은 그 자신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음악적인 르네상스인”으로 생각했고 작곡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글렌은 작곡하는 법을 빨리 터득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현악 사중주를 보면 현악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투적인 피아노 스타일에서 놀랄 만큼 벗어나 있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매우 진지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대신 굉장히 음울하고 때로 초조하며, 어떤 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된 다성 음악을 35분 내내 듣고 있어야 한다.

글렌은 여러모로 캐나다 촌사람 같은 자질, 즉 자신의 믿음에 안주하며 캐나다인이라는 자긍심을 느끼고 진보에는 관심이 없는 자부심 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평생 같은 종류의 옷만 입었고, 먹는 음식도 거의 바꾸지 않았으며, 의자의 뼈대만 남아 있을 때까지 평생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무 의자만을 사용했다. 또한 고독을 열렬히 사랑했고, 자신의 계획을 한마음으로 추구해 나간 사람이었던 그가 작곡가로서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은 그에게 아주 적합한 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아마도 굴드의 첫 작품, 현악 사중주가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글렌 생전에 작품 2는 태어나지 못했으며, 그 자신 또한 정식 기악곡을 작곡하려는 시도도 다시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순수 음악보다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는 욕구가 넘쳐 공연과 영상물로 그것을 극화하려는 열망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을 보면 오페라를 기획하고 작곡하려 했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작곡 작품이 아니라 많은 녹음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라디오 방송 참여를 통해 그 자신을 드러냈다.

무대에서 물러나다
글렌이 1964년 무대에서 물러난 것은 그렇게 갑작스런 은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정말로 무대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고, 은퇴하기 몇 해 전부터는 여러 가지 분란과 나빠지는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은퇴는 자연스러운 결말이었다. 글렌은 마지막으로 잡힌 공연마저 취소하고 <녹음의 전망>이라는 글에서 녹음이 실황보다 우수하다는 철학을 내세우며 “대중 공연은 지금부터 한 세기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최근 음반 산업에서 일어난 변화와 발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 때의 나이가 겨우 서른하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의 활동 중지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구적인 은퇴를 뜻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글렌은 다시는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고 “무대로 돌아가는 것은 끔찍한 후퇴”라고 점점 더 굳게 믿었다. 대신 그는 CBC의 라디오 독주회와 그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대중 매체 산업에 더욱 확실하게 진입하였다.

5. 피아니스트에서 프로그램 제작자로

배우, 철학자, 그리고 기술자
공연 생활을 접었음에도 불구하고 글렌의 불안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불안감이 작동하는 활동 무대가 연주회를 할 때의 대중 앞에서 이제는 녹음 작업을 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글렌은 연주회를 여는 예술가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스타로 변모해가면서, 다행히도 자신의 불안감을 처리하는 방법을 계발할 수 있었다. 이전에 했던 인물 흉내내기를 바탕으로 한 이 방법들은 점점 발전하여, 이제는 그 자신이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됨으로써 글렌은 한결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스스로 짊어진 예술적 책임이라는 짐도 얼마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 가상 인물 놀이는 CBC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등장하여 1969년 <글렌 굴드의 예술>이라는 제목의 주간 방송에서 글렌은 험프리 프라이스-데이비스 경으로 등장하여 가상의 음악학회에서 발언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고,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권투선수를 비롯한 여러 인물을 소화해냈다. 역할 놀이는 점점 글렌의 인간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가 말한 바대로 다른 사람 노릇을 하면서 그의 글은 유려해지고 유머러스하게 변해간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대위법적으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 글렌의 정신적 측면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을 아무런 해도 없이, 때로는 익살맞은 방법으로 밖으로 끄집어내는 수단이 된 것이다.

사춘기 초기부터 그는 매우 사색적인 정신을 보여주었고 때론 잘난 체 하는 투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것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으며, 그의 글 역시 때때로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곤 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또 철학적인 문체로 글을 쓰지도 않은 그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이다. 글렌이 쓴 엄청난 양의 글과 테이프에 녹음해둔 내용들 -음악과 삶, 그리고 세계에 대한 언급- 에서 철학 비슷한 것을 추출해본다면, 경쟁에 대한 거부감과 고독을 좋아하는 성향, 그리고 음악과 말을 대등하게 보는 시각으로 이루어진 삼차원 구성이 될 것이다. 글렌은 자기 녹음을 제작하는 사람은 어디서 이어 붙이고 어떻게 테이프를 편집할 것인지를 최종 결정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편집 과정을 다 마치기 위해서는 솜씨와 엄청난 인내, 그리고 글렌의 예술적 능력을 존경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뛰어난 제작자인 카즈딘이 그러한 적임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높이 평가하는 대가의 관계였고 카즈딘과 함께 일하면서 자극을 받은 글렌은 그 자신이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다. 그는 녹음 장소를 토론토로 옮긴 후 자신을 위해 마련한 전문 스튜디오에서 혼자 편집하고 녹음할 수 있게 되었다. 연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에서 라디오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이제 전천후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새 얼굴, 새로운 도전
1971년 새로운 도전을 해볼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감독 조지 로이 힐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드레스덴에서 일어났던 폭격을 다룬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제 5도살장>의 배경 음악을 부탁하러 그를 찾아 온 것이다. 힐 감독은 바로크적 분위기를 내기 위해 ‘영화 전체에 바흐 음악과 가능하면 바흐를 주제로 한 즉흥선율이 흘렀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렌은 드레스덴 장면에 바로크 음악을 사용하는 데 매력을 느끼고 뉴욕필하모닉 단원들과 함께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과 함께 “대담한 상상력으로 가득 찬” 즉흥연주를 녹음해 왔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글렌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예술작품이 아니다”라며 이 영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평론가들은 15분 분량에 달하는 글렌의 음악에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했다. 3년 뒤 워너브라더스사에서는 영화 <터미널 맨>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발췌한 곡을 사용했으며, 1981년 티모시 핀들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전쟁>이라는 영화에서는 글렌이 직접 브람스와 슈트라우스 등의 곡을 잘 뽑아 음악 감독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전쟁>은 캐나다에서 꽤 성공을 거두었고, 글렌은 그 영화를 뛰어나게 세련된 영화라며 높이 평가했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글렌은 작가, 평론가, 그리고 수필가로서 활동하는데 1974년 프랑스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브뤼노 몽생종은 그를 주제로 <음악의 길>이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만들어 음악가이자 기술자로서의 글렌의 여러 면모를 담아냈다. 이후에는 3년이라는 기간동안 이번에는 글렌이 주도적으로 하여 브뤼노와 함께 바흐 연주를 중심으로 한 세 작품을 완성하는데, 글렌이 바흐 음악을 연주하고 논의하는 모습을 담아 음악 세계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중년에 접어들며
글렌은 1974년 새롭게 나타난 심각한 증상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그 전까지 일과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글렌은 생각하고 글쓰기 위해 꼭 필요한 혼자만의 자유와 고독을 얻기 위한 노력과 전자 매체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두 가지의 모순된 노력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이루려고 애썼다. 또한 라디오 프로그램 뿐 아니라 CBC TV 프로그램 몇 가지를 직접 기획하고 제작에도 참여하면서 글렌의 작업량은 점점 많아졌다. 이렇게 강도 높게 일하는 가운데 글렌에게 현기증과 균형 감각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증상 등을 동반한 극심한 고통이 찾아온다. 또 1975년 초에는 고혈압을 앓던 여든 셋이 된 그의 어머니가 뇌일혈 발작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머니의 위독한 상태에 글렌은 대단히 걱정하였지만, 정작 병균이 우글대는 병원에서 자칫 감염되어 자신마저 몸져눕게 될까봐 어머니를 보러 가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글렌의 전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어떤 여성과도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했던 글렌에게 그의 기쁨과 실망, 꿈과 연주회 평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던 어머니는 여전히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글렌은 속으로 깊은 고통과 아픔에 겨워할 뿐 겉으로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1년도 안 되어 글렌 자신도 고혈압 진단을 받게 된다. 자신이 고혈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글렌은 평소 습관대로 다른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증상을 호소했고, 혈압을 유지하는 약을 복용하면서 자신의 혈압 변화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였는데 어떤 때는 15분마다 측정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글렌이 먹은 약은 치료에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좋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약들이었다. 물론 글렌은 자신이 먹는 약에 대해서는 “모든 약의 성능을 설명해 주는 커다란 의약 책”에서 찾아 아주 꼼꼼하게 읽었으며 나중에 의사에게 물어볼 요량으로 자신의 증상을 자세히 적어두기도 했다. 글렌은 늘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데다 꽤 매력적이었지만 중년에 이르러서는 그동안의 병과 약의 여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중년에 찍은 사진에서 그는 주름살이 많은 얼굴에 대머리가 두드러지고 등이 굽은 자세를 하고 있다.

1977년 글렌은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마비 증상을 겪는데 이 일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스스로 조금이라도 개선해볼 요량으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데 몇 시간씩 보내곤 했다. 자신만의 방법과 실험으로 손가락을 제어하는 일에 힘썼고 구부정해진 등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연주하는 법을 개발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일기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정작 궁금한 것은 마흔 다섯 살이 된 글렌이 왜 그토록 힘들게 애쓰면서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육체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해부하고 교정하려 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 가지 확실한 이유는 그 무렵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사실이다. 항상 실수를 고쳐주고 자극하던 그녀가 떠나자 어머니가 해왔던 비판적인 기능이 송두리째 그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중년이라는 시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중년이 되면 과거를 되돌아보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육체가 쇠약해지는 현상을 종종 고통스레 관찰하게 되는데, 고혈압 증상에 환자 노릇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 즈음의 글렌은 처방된 약을 먹느라 매력적인 젊음까지 다 잃어가면서 스스로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문제에 관한 일기는 다른 글보다 훨씬 조리 있고, 글씨 자체도 읽기 쉽게 씌어 있어 그가 이 글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는 비슷한 곤란을 겪는 미래의 피아니스트들과 그런 피아니스트를 돕고자 하는 치료사들을 위해 이 기록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었나 보다.

만년
1981년 초 글렌에게 새로운 증세가 갑자기 나타났다. 정형외과 의사인 맥카시 박사는 글렌의 혈중 요산수치가 높아진 것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통풍에 걸릴 가능성을 의미한다. 당시 글렌은 손의 감각이 둔해지고 목의 근육통, 내이염 등의 증상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글렌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영상으로 담고 재녹음한다는 가장 큰 계획을 세우는데, 본래 한 번 녹음했던 것을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거의 없던 그가 1955년 녹음한 이후 최고 음반으로 손꼽히며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그 음반을 재녹음한다는 점에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새로 나온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과 그 녹음 작업을 담은 영상물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1955년 음반과 1981년 음반 중 어느 것이 나은지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두 음반은 모두 너무나 훌륭하여 젊은이다운 흥과 순발력, 눈부신 기교를 원한다면 첫 번째 음반을 들으면 되고, 장중한 위엄과 수학적인 정확성, 중년의 깊은 지혜와 깨끗한 디지털 음을 더 좋아한다면 두 번째 음반을 들으면 될 것이다. 글렌은 손 문제에서 완전히 회복된 듯 유려하고 부드러운 손놀림을 다시 보여주었다.

다만 자세히 보면 글렌의 손이 종종 떨리는 증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 생각으로는 약의 부작용인 것 같다. 물론 그는 눈에 띄게 나이가 들긴 들었다. 최종 편집본에 들어가지 않은 삭제분을 보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아주 조그만 결함을 없애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녹음을 버린 그가 이 녹음에서 쏟아 부은 엄청난 노고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글렌이야말로 진짜 완벽주의자였다. 온갖 병에 시달려 심신이 황폐해진 가운데서도 그의 연주는 창조의 즐거움과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타격
글렌은 누가 보기에도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또다시 에너지를 많이 쏟아 부어야 하는 기획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지휘에 헌신해볼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휘는 그가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야망이었다. 교향악단 지휘자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글렌은 자신이 연주하고 싶은 곡목의 명단을 만들고, 해밀턴 필하모닉 단원들과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고 좀 긴장했지만, 자신의 피아노 연주와 작은 실내악단 지휘 경험이 있었던지라 곧 관현악단을 이끌어갈 수 있을 만큼 동작을 크게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관현악단 연주자들도 그와 함께 연주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글렌과 이 관현악단이 테이프에 남긴 유일한 곡은 1982년 4월에 녹음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 내림 나장조 작품 19번의 첫 두 악장뿐이다. 두 번째 녹음 작업으로 정한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을 위해선 대규모 관현악단이 필요했다. 글렌은 음악가들을 미리 뽑아놓고 계약까지 했는데, 마지막 발작이 그를 덮쳤다. 우리로서는 글렌이 관현악단 지휘자의 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글렌이 남긴 마지막 녹음은 그가 발작을 일으키던 달인 1982년 9월, 뉴욕에서 혼자 피아노로 연주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 작품 5다. 9월 25일은 그의 쉰 번째 생일로 그의 인생과 일에서 꼭 반세기를 헤아리는 의미 깊은 날이었다. 글렌의 아버지와 CBC 친구들은 그를 위해 생일잔치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건강이 얼마나 나쁜지 알고 있는 글렌은 잔치보다는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토요일이던 그날 오후, 글렌은 자기 식대로 생일을 기념했다. 새로 발매한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칭찬하는 기사가 곧 <뉴욕타임즈> 지에 실릴 예정인데 이 호평을 제대로 알아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그의 친구가 기사 전문을 읽어주었을 때, 그는 그 기사에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글렌은 친구들에게 쉰 살을 얼마 못 넘길 거라는 소리를 많이 했고, 생일을 맞은 바로 전 주일 내내 이상하게 ‘심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장례식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 장례식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에게 뇌일혈 발작 증세가 일어난 것을 감지한 그는 병원에 찾아가 검사를 받는데,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그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혼수상태가 심해졌고 현실감각도 잃어버린데다 움직이거나 대답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해졌다. 10월 3일, 글렌은 회복 불가능한 ‘뇌사’ 상태에 빠졌고, 결국 10월 4일 월요일, 글렌이 병원에 들어온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의사는 생명 유지 장치를 거두었다. 오전 10시 그의 심장 박동은 멈추었고 죽음이 선고되었다. 비극적인 소식이 세상에 전해졌다 -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죽다.”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남달랐습니다. (…) 진실로 현대적인 인간이자 뛰어난 개혁자였습니다. (…) 인간의 조건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 내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도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 존 로버츠의 추모사 中

10월 15일 열린 공식적인 추도 예배에는 글렌의 친구와 가족, 동료, 그리고 글렌을 흠모하며 따르던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 등의 음악으로 꾸민 음악 프로그램에서 절정을 이룬 것은 모린 포레스트가 장엄하게 부른 바흐의 <성 마태 수난곡> 중 <자비를 베푸소서> 아리아였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예배가 끝나갈 무렵 글렌이 최근에 녹음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가 빈센트 토벨과 CBC 기술자들이 교회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나지막이 울려 퍼졌을 때였다. 아리아와 함께 간간이 들려오는 그의 흥얼거림은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인 동시에,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환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바흐의 영묘한 음악이 끝나면서 무서운 죽음의 유령과 필연적으로 따르는 소멸에 대한 공포 역시 글렌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갔다.

글렌 굴드( Glenn Gould, 1932∼1982, 캐나다 )와 골드베르그 변주곡

골드베르그 변주곡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크 백작은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골드베르크에게 수면음악의 작곡을 부탁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연주 능력을 가진 골드베르크라 할지라도 불과 14살의 어린 골드베르크는 수면음악이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먼저 곯아 떨어지기 일수였다. 골드베르크는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승 프리드만에게 상의했고, 프리드만은 바흐를 떠올려 백작에게 바흐를 추천한다. 카이저링크 백작은 바흐가 드레스덴 궁정악장으로 임명되도록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흐는 궁정음악가로 매우 바쁜 와중에도 작곡에 임했다.

작곡할 것이 너무나 많았던 바흐는 짧은 시간 안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했다. 악보를 받은 백작은 만족하며 골드베르크에게 매일 밤 이 곡을 연주하도록 했지만 이 곡을 듣고 잠을 잘 잘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바흐는 사실 변주곡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 곡을 작곡하면서 변주곡 양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바흐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1개의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을 작곡했다. 내 생각엔 백작이 조금만 성실한 감상자라면 그리 쉽게 잠을 청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곡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제의 다채로움이 경이로울 지경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성자이자 그 자신이 뛰어난 파이프오르간 연주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 곡에 대해서 "고전 시대 이전의 대작 가운데 이만큼 현대의 피아노 스타일에 접근한 작품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 노래에 대단히 만족한 백작은 이 곡에 대한 사례로 금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 사례를 했고, 이때 받은 사례비가 바흐의 1년치 월급을 웃도는 금액으로서 바흐가 평생 받았던 작곡료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오늘날엔 일반적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바흐가 붙였던 곡명은 <2단 건반이 딸린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갖가지 변주>였다고 한다.

현재는 글렌 굴드를 비롯해 이 곡은 피아노로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인 줄 알지만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쳄발로, 하프시코드 연주가 좀더 일반적인 연주였다. 그 대표적인 연주자들이 바로 란도프스카였다. 그러던 것이 로잘린 투렉과 같은 여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로 연주했고, 이후 글렌 굴드에 이르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오늘날엔 도리어 쳄발로로 연주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으니 짧은 시간에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성공리에 마쳤고 다음 날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마스터웍스 시리즈에 참여하게 되었다. 굴드는 메이저 음반사에서 출반하는 자신의 첫 레코딩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택하였고, 당시만 해도 지루하고 변화없는 곡으로 인식되어 피아니스트들의 일반적인 레퍼토리에 끼지 못하고 한켠에 밀쳐져 있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 되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바흐를 탐닉해 오던 굴드는 자신의 내면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곡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23세의 굴드를 단숨에 정상급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

피아노를 연주한 좀머(Herr Sommer)씨 - 글렌 굴드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까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글렌 굴드와 나의 인연은 꽤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하나 있다. 오늘날까지도 악연이 계속되는 이 친구는 나에게 있어서 때로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존재이자, 이 작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상이 일순 외롭고 쓸쓸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것이 되고 만다. '참을 수 없는 악연의 지속'이랄까. 그런 그가 나에게 전염시켜 준 특별한 질병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글렌 굴드(Glenn Gould)'란 병명을 가진 처치곤란한 고질이 그 중 하나다. 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BWV 988. Bach> 음반을 로잘린 투렉부터 피에르 앙타이에 이르기까지 꽤 여러 종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처음 들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글렌 굴드의 연주였다는 것이다.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나의 음반 콜렉션 초창기 것들 중 하나였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자체를 매우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아쉬운 일이었던 것이 처음부터 글렌 굴드의 연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훌륭한 연주들이 있음에도 굴드의 연주만큼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고로 나는 이것이 일종의 병증이라고 생각한다.

글렌 굴드.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전설로 분류된 사람. 평생 결혼하지 않고 50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일생동안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피아니스트.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4년(32세) "고통일 뿐인 속임수"라며 돌연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하고 그후론 단 한 차례도 공개된 장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던 굴드. 나는 글렌 굴드의 연주와 그의 생애에 대해 알아 갈수록 어쩐지 글렌 굴드가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씨 이야기>의 주인공. 좀머씨를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 아닌 피아니스트가 되기 까지의 글렌 굴드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한 글렌 굴드. 그의 아버지 러셀 허버트는 모피제조공이었고, 또한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도 한때 직업 연주자를 꿈꾸었을 만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의 외가쪽 먼 친척 중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얼만큼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굴드의 집안이 그만큼 음악과 가까운 집안이란 것이다. 굴드의 회상에 의하면 그의 외할머니는 파데레브스키의 연주를 듣기 위해 그녀가 살던 시골 마을 욱스브리지를 떠나 온타리오까지 장거리 여행을 할만큼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글렌 굴드는 간신히 걸음마를 옮겨놓을 무렵인 3살 때 어머니에게 첫 피아노 렛슨을 받았다. 이후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어린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스승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천재 음악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소위 '절대음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글렌 굴드는 5살 때 단순한 곡들을 연주했고,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굴드의 같은 반 급우였던 작가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9살 무렵 이웃에 살던 굴드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글렌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노력했기 때문에 외로웠다. 그는 음악에 대해 부드럽고도 열정적인 엄청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 그건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살 되던 해 굴드는 어머니 이외의 새로운 스승을 찾아야 했고, 칠레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를 만났다.

이후 게레로는 더 이상 굴드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고백하기 까지 9년 동안 굴드를 맡아 지도했다. 굴드는 자신의 스승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음악적 접근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으로 느끼는' 인간이었던 데 반해 나는 '머리로 이해하는' 소년이기를 원했다." 굴드의 나이 6살 때 그는 부모를 따라 요제프 호프만의 독주회에 가서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한다. 굴드는 연주회 뒤 내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연주회 광경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음향' 만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만약 우리가 굴드에게 있어 고전적인 의미의 피아니스트보다는 일종의 '음향 연주자'로서의 음악가적 면모를 보게 된다면 그가 지닌 '절대음감'과 더불어 그가 음악을 먼저 '음향'으로 이해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굴드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4년 2월 15일 키와니스 페스티벌의 '피아노 트로피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음악학교에 직업 피아니스트와 동등한 자격으로 합격한다. 그는 단순히 연주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었던지 1946년에는 음악 이론시험에서도 일등상을 받았다. 어린 굴드에게 유일한 우상이 있었다면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었다. 굴드는 '슈나벨'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할 만한 말을 했다. "슈나벨은 실제로 악기로서의 피아노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피아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이었는데, 이 목표는 베토벤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글렌 굴드는 그 목표를 아마 '바흐'로 삼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음향'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만들어 냈다.

경이로운 데뷔로부터 경악스런 콘서트 은퇴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라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글렌 굴드는 미국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굴드는 이후 뉴욕을 데뷔타운 'Debutown'이라고 불렀다 한다). 데뷔 연주회를 가진 바로 다음 날 CBS는 글렌 굴드와 녹음계약을 맺었고,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굴드의 악명높은 기행은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따스한 뉴욕의 6월, 굴드는 베레모를 쓰고,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는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며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과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된 5개의 약병, 그리고 한 무더기의 타올을 챙겨 들었다. 게다가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유명한 의자까지 글렌 굴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굴드의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는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굴드는 이 의자에 앉아 그 특유의 연주자세를 만들어 냈다. 마치 건반 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건반을 향해 머리를 깊이 박고, 몸을 전후좌우할 것 없이 비틀어가며 움직이는 그의 연주 모습에 이 의자는 어쩌면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굴드는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반드시 더운 물에 손을 20분간 담그고 자신이 준비해온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의 연주를 녹음하던 음향 엔지니어는 아마 세 번 놀랐을 것이다. 한 번은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여러 준비 작업을 거쳐야 하는 그의 기이한 행동에, 몸을 비비틀며 연주를 시작했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에 놀라고, 그가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에 빠져 입으로도 쉴새없이 허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계속 몸을 앞으로 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고, 그 와중에도 입으로는 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계속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반을 녹음할 때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데, 이건 연주자가 바로 건반 위에서 입으로 허밍을 하고 있으니 엔지니어로서는 최악의 연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음반을 듣다가 혹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굴드의 음반에는 크든 작든 이런 허밍들이 들어 있으므로.

음악이야 물론 실연을 듣는 것이 가장 좋은 음악감상법이겠지만 해외의 명연주자들은 물론 이미 죽어 버린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남긴 음반을 듣는 것이다. 모든 음반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굴드의 연주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오디오에도 상당한 투자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된다. 질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허밍 소리는 그러나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글렌 굴드의 가까이에서 연주를 듣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의 음반을 듣다보면 한 가지 명확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굴드가 현대적 녹음 시스템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기계들을 놀랄만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나벨이 베토벤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를 이용했듯이 굴드는 바흐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와 녹음을 매우 자유롭게 이용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우리가 실제 듣게 되는 피아노 소리와 상당히 다르게 들리는 데 여기에는 굴드 자신이 가벼운 터치를 위해 기울인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굴드가 녹음된 자신의 연주를 들으며 당시 기술로 가능한 음향적 가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짜깁기 통조림 음악가인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자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굴드는 1964년 이래 더 이상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않았다. 소위 '립싱크'란 것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대중음악 현장에서도 립싱크를 주로 하는 가수들에 대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글렌 굴드가 콘서트를 포기하고 음반 녹음에만 치중했다는 사실이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더군다나 당시 굴드는 콘서트 현장에서도 최고의 각광을 받는 피아티니스트였다. 1957년에 글렌 굴드는 냉전이 한창이던 소련에서 2주간의 연주회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소련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다. 그의 소련 연주회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의 연주에 대해 청중은 물론 비평가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유럽순회 연주기간동안 <베토벤 3번 협주곡>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음반에 담긴 음악을 '통조림 음악'이라고 불렀던 세르주 첼리비다케였다면 글렌 굴드를 좋게 평가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음반 녹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친 카라얀이 음반 녹음 과정 자체를 하나의 연주로 승화시킨 굴드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0년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필과 함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다. 굴드는 1960년의 TV 출연 이전에도 이미 캐나다 TV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미 유명 인물이었고, 정기적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들었는데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글렌 굴드는 전생애를 통해 확고한 평화주의자였고, 그런 때문인지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상황을 주제로 한 캐나다 영화 <전쟁>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964년 4월 10일 LA에서 마지막 연주회 이후 굴드는 콘서트 연주자로서 자신의 경력을 끝냈다. 파블로 카잘스도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엔 절대로 연주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 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곧잘 콘서트 활동을 중단했지만 글렌 굴드는 이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굴드는 이후 전혀 연주회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는 마치 보드빌배우(vaudevillian)처럼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처럼 글렌 굴드는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쩌면 굴드는 자신의 직업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공적인 생활을 모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여러 방면의 생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 방송활동, 작곡, 지휘 등 그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해보고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때 이상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글렌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로 부르기 보다는 그를 일종의 '전위예술가'로 구분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읽고 매우 참신한 주장이며 상당히 옳은 지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렌 굴드는 연주라는 음악의 재현에 매달렸던 전통적 개념의 피아니스트,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피아노만을 고집한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생애 동안 콘서트 연주자로 활동한 기간은 넉넉히 잡아주어야 10년 남짓한 기간에 불괴했다(물론 그 10여년 동안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하긴 했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에는 분명 다른 연주자의 그것과는 다른, 단순히 '파격'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굴드는 녹음 기술을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채택했고, 자신의 연주 중 가장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당시 다른 연주자들이 느끼는 거북한 기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마 기술적인 제약만 없었다면 글렌 굴드는 신서사이저나 컴퓨터를 도입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목적을 향해가는 도정에서 채용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가 한 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1981년 다시 녹음하게 된 것은 1955년과 1981년 사이에 엄청난 기술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며 골드베르크변주곡과 바흐는 바로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와 바흐 그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일찌감치 콘서트를 포기한 탓인지 글렌 굴드의 음반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음반들이 글렌 굴드라는 명성에 걸맞는 것들은 아니었다. 평생동안 편식(그는 고기는 물론 야채도 즐겨먹지 않았다. 성인이 된 뒤 그는 거의 크래커와 오렌지 주스 같은 것들로 연명했다고 한다)과 기행으로 일관한 그 답게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들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그는 쇼팽과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않았고, 심지어 브람스의 경우에도 녹음 직전에야 겨우 연습하여 녹음에 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작곡가는 오로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였고,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이 말은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는 명확한 설정이 없다는 점에서) 바흐 이전의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다.

굴드가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고, 26년 전 자신이 처음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한 것도 기술적 진보에 따른 그의 도전이자 동시에 세월을 거치며 다시 마음 속에 담게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2002년 월드컵 4강을 매우 감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대륙, 그것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올랐다는 것도 하나일 것이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이렇듯 비유럽인들의 진출은 매우 어렵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대부분이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들이기 때문에 일종의 정서적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는 음악의 특성상 동양적 정서 속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클래식음악을 감상한다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을 연주하고 새롭게 해석하며 게다가 청중에게 감동까지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단 동양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어서 레너드 번스타인과 같이 오늘날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들조차 유럽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땀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정경화, 정명훈 등과 같이 클래식음악의 변방이랄 수 있는 우리나라 출신 음악가들에 대한 사랑에 대해 '애국심'이란 한 꺼풀을 벗겨내더라도 그들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것은 북미 출신 음악가들에게도 비슷하게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글렌 굴드는 비교적 손쉽게 유럽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낸 사람이었지만, 그가 처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냈을 때만 하더라도 대중의 환호와 달리 일부 비평가들은 "미친 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가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솔직히 내 경우엔 그의 연주가 오히려 정격 연주로까지 들릴 만큼 귀에 익어 버렸기 때문에 도리어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가 밍숭밍숭하니 재미없게 들릴 지경이라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확실히 그의 연주는 남달랐다. 그의 연주가 어떤 점에서 파격적인지 음악 용어들을 동원하여 설명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와 관련된 사례 한 가지를 들어보겠다.

글렌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 카네기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협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최종 리허설에 이를 때까지 이 곡의 템포 문제를 놓고 서로의 음악적 해석과 견해가 달라서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번스타인이 굴드의 고집에 못이겨 엄청나게 느린 그의 템포에 뉴욕 필을 맞추기로 했다. 한 번이라도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을 보면 짐작이 되겠지만 지휘대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을 만큼 힘차고 다이나믹한 지휘와 템포를 가진 번스타인이 굴드의 느려터진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4번을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대번에 어떤 상황일지 짐작이 될 것이다. 결국 연주가 끝나고 이런 상황을 알리 없는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지만 번스타인은 그 순간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방금 연주한 곡의 템포는 제가 원하는 템포가 아니라 굴드가 고집한 템포이니,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번스타인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이 굴드는 자신의 템포대로 연주한 뒤 어리둥절해하는 청중들을 뒤로 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가 버렸다.

굴드는 유럽적 전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의 음악을 시작했고, 자신만의 템포와 해석방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연주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다른 연주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학습기간을 보냈고, 그 기간에도 유럽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여긴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고,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글렌 굴드의 일화들

글렌 굴드에 대해서 아무리 좋은 쪽으로 해석해주려고 해도, 그가 남긴 기행들 모두를 이해하기엔 나의 머리가 너무나 단순하다. 앞서 그가 녹음이나 연주에 임하기 전 생수 두통과 알약병, 몸 전체를 칭칭 감아맬 정도의 옷차림을 하고 몸을 전후좌우로 연신 흔들어가며 정신없이 허밍을 늘어놓는 연주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지만 굴드는 절대로 에어콘이 켜진 식당을 가려 하지 않았고, 타인과의 접촉도 최대한 피했다. 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면 전화를 통해야만 했는데 전화 통화 중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감기 옮아요."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노이로제 증세는 매우 심각해서 이스라엘 항공사의 비행기만을 이용했다. 그가 이스라엘 항공사만 이용했던 까닭은 이 항공사의 비행기 수가 적으니 그만큼 정비에 시간을 더 들이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나중엔 그나마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인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다른 사람과의 악수도 피하고, 손을 내밀어도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어요."하며 거절했다.

그의 이런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피아노 제작회사인 스타인웨이를 향한 30만 달러 피해보상 소송이었다. 굴드의 피아노 터치는 매우 가벼운데 굴드 자신도 바흐 시대 악기의 특징을 염두에 둔 듯 작고 변화없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중시했다(피에르 앙타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OPUS111>을 들어보면 굴드가 얼마나 가벼운 터치를 위해 노력했는지 새삼 알게 된다. 피에르 앙타이의 쳄발로 연주는 고악기 특유의 매우 가벼운 터치들이 돋보이는 연주를 하고 있는데, 굴드는 피아노를 통해 이에 못지 않은 가벼운 터치를 보이고 있다). 굴드는 자신에게 맞는 피아노를 찾기 위해 매우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자신에게 꼭 맞는 피아노를 발견했다. 바로 <스타인웨이 CD318> 제작번호 174번이었다. 그러나 1958년 클리블랜드 연주회 직후 운송하던 트럭이 피아노를 떨어뜨리고 크게 손상을 입었다. 굴드가 크게 상심한 것은 불문가지였고, 어떻게든 이를 재생하기 위해 들인 노력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174번은 살아나지 않았고, 굴드는 다른 <스타인웨이 CD318>을 사용해야 했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즐겨쓰고 좋아한 피아노는 역시 <스타인웨이 CD318>이었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사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의 소유자. 소련에서 니콜라예바와 악수할 때도 장갑을 낀 채 였던 굴드에게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에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재판에서 누가 승소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를 더욱 악화시킨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굴드는 이전부터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댈 만한 것만 있으면,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의 꾀병과 노이로제 증세는 정작 그의 몸에 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의사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변변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좀머씨의 죽음 - 과연 그는 호수를 향해 걸어갔는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 순회공연중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번스타인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곧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얼굴이 묻힐만큼 깊이 파묻힌 굴드는 창문을 모두 닫고 난방을 최고로 높였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 올린 라디오가 악을 쓰는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소음과 땀에 파묻힌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했더니 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얼마 후 글렌 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토론토의 아파트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불을 모두 켜둔 채 잠을 자던 그는 토론토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데뷔 레코딩곡>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굴드는 두 번째 녹음 이듬해인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피아노 건반에 코를 박듯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연주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속 결말이 어찌 끝나는지 잘 알고 있다. 소설 속의 좀머씨는 호수를 향해 그냥 걸어 들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는 그가 과연 자살을 위해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지 그냥 걸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청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을 포함해서) 사실 고전 음악의 최전성기 때조차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받은 대접이 그렇게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몸을 누일 만한 그럴 듯한 관짝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페라 작곡가들은 온갖 연애담과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로 대접받았던 시기는 고전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연주자들은 더 이상 예술가라기보다는 메이저 음반사에 묶인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들은 마음의 심연을 두드리는 음악보다는 듣기 좋게 짜깁기된 콤필레이션 음반들을 더 선호하고, 불황으로 활로를 찾을 수 없는 음반사들은 음악성보다는 뛰어난 외모를 갖춘 연주자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려 든다. 글렌 굴드가 이와 같은 이유들로 청중들을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에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글렌 굴드에 대해서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그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글렌 굴드의 음악을 들으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은밀한 상처들을 응시한다. 혼자 되었을 때 누구도 속일 수 없고, 속이려는 마음조차 없는 마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가끔 오래된 상처들이 제멋대로 벌어져 가득 찬 고름들을 외부로 흘려 보낸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랑은 때로 모든 걸 알고, 이해하기 전에 덮어주고 모른 척 하길 바라는 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논리 위에 성립하는 계약이 아니므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먼저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 쓸데없는 사설들에 대해 글렌 굴드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굴드'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된 사람이다. 이 병은 그의 연주를 들어야만 치유될 수 있는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다. 글쎄, 과연 굴드가 고독한 사람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글렌 굴드의 연주에 대해서 '미친 놈의 연주'라고 했던 어느 평론가의 지적은 그 악의적인 뜻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확한 평가로 보인다. 그는 음악이 펼쳐놓은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시험한 이카루스였지만 도시의 익명으로부터는 치명적인 해독을 입는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 글렌 굴드에 대한 나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불행히도 글렌 굴드에 대해 어떤 글을 쓰기에 나는 아직도 너무나 젊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껏 50년을 살았던 피아니스트에 대한 글을 쓰는데 이렇듯 허덕이는 기분이 드는 까닭, 왜일까? 그에 대한 정답을 찾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언젠가 해답을 찾으신 분은 내게도 알려주시길….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SONY의 글렌 굴드 공식 홈페이지 (영문)

The Glenn Gould Archive (영문)

『글렌 굴드,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2002년 - 지난 88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유명한 페미나 바카레스코상까지 수상한 전기문학이지만 매우 특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미셸 슈나이더는 굴드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담아 그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기인 글렌 굴드를 조금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글출처 : http://windshoes.new21.org/classic-gould.htm( 음정joba정리)

+ Recent posts